018화
잿빛의 피부, 마구 기른 머리카락에 가려진 얼굴 사이로 시뻘건 안광을 흘리는 눈동자.
손에 들고 있는 거대한 돌몽둥이는 어지간한 집의 대들보로도 쓸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게, 제대로 한 대 맞으면 그대로 달나라로 뿅 가버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마주치자마자 처음 든 생각은 하나였다.
“하이랜더 관련 책 쓴 새끼, 만나기만 해봐라.”
실력 있는 기사라면 저렇게 흉악하게 생긴 걸 상대로 이길 수 있다고? 지랄하고 자빠졌네.
걸리기만 해봐. 사지를 묶은 다음, 쿠르스트 산맥 꼭대기까지 끌고 와서 덕장에 걸어놓은 황태 꼴로 만들어주마.
다행인지 뭔지 저 회색 덩어리도 눈보라 속에서 우리를 만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잠깐 멍하니 우리를 보는가 싶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약간 뒤로 물러났다.
“으아아아아!”
그리고 고함을 내지른다.
아침 식사로 빵꾸낸 오토바이 마후라를 구워 처먹었나, 소리통 한번 기가 막히게 쩌렁쩌렁하네.
안 그래도 확확 뿜어져 나오던 하이랜더의 콧김은 이제는 숫제 압력밥솥이 증기를 뿜어내는 것처럼 격렬해진다.
“어떻게 할까요?”
나는 하이랜더에 대해서 잘 모른다. 하지만 도리안은 알고 있지. 지금 상황에서는 도리안의 지시를 따르는 게 현명하다.
“하이랜더는 적을 마주쳤을 때 물러서는 법이 없어.”
아하, 그 뭐냐. 등 뒤의 상처는 무인의 수치다 뭐 그런 건가. 장수하기는 힘든 습관이군. 어쨌든, 싸움을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거다.
“두 명이서 가능할까요.”
내 말에 도리안이 대답했다.
“날씨가 좋지 않아. 하지만 그건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지.”
해볼 만하다는 소리로 알아들으면 되려나. 하긴, 저 녀석이 입고 있는 거라고는 사타구니를 가리고 있는 거적때기 하나뿐이니까. 추운 걸로 치면 저 녀석이 더 추울 것이다.
“공격은 막지 말고 무조건 피해. 마력으로 강화한 몸은 충격을 견딜지 몰라도 무기가 못 견딘다.”
슬프게도 우리가 들고 있는 검은 듣기만 해도 모두가 알고 있는 희대의 명검이 아니라, 그냥 달군 쇠 깡깡 두들겨서 만들어낸 평범한 검이다.
보통이라면 그 정도로도 충분하지만, 슬프게도 눈앞에 있는 친구는 보통이 아니니까.
“움바와, 푸치크스!”
녀석은 그런 뜻 모를 소리를 외치고는, 눈보라 속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지뢰라도 터진 것처럼 눈기둥이 팍팍 치솟으며 진동이 땅을 타고 퍼진다.
“왼쪽으로.”
대답할 여유는 없었다. 도리안은 오른쪽으로 빠졌고, 나는 지시대로 왼쪽으로 몸을 피했다. 녀석이 휘두른 거대한 방망이가 눈 쌓인 바닥을 내려찍는다.
“우욱.”
휘둘러진 몽둥이는 맨땅을 찍었다. 하지만 몽둥이가 땅을 찍으면서 퍼진 충격파에 휩쓸린 것만으로도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찔해진다. 더 멀리 피해야겠군.
땅을 찍은 몽둥이가 다시 순식간에 들어 올려져 도리안을 향해 휘둘러진다. 딱 봐도 무게가 엄청나 보이는데, 무슨 수수깡이라도 들고 휘두르는 것 같은 모습이다.
도리안의 양다리에서 확 하고 바람이 터져 나오며 굉장한 속도로 그 공격을 피한다. 마치, 다리에 제트 엔진이라도 달린 것 같은 움직임. 저게 도리안의 능력인가.
그리고, 하이랜더는 재빠르게 몽둥이를 회수해, 다시금 도리안을 노리고 휘두른다.
“여기도 사람 있어, 이 새끼야.”
아주, 개무시를 하네. 심장의 두근거림과 함께 혈관을 타고 퍼져나가는 마력이 살과 뼈로 이루어진 육체로는 낼 수 없는 힘을 불어넣는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을 노리고 몸이 쏘아져 나간다. 날카로운 바람이 귀를 스치고 지나간다.
“…….”
녀석은 아무 말 없이 몸을 확 틀었다. 그리고, 나는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뭐 하는 짓이야 인마!”
도리안의 외침, 그리고 하이랜더가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대들보만 한 크기의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래, 공중에 떠 있으면 방향을 바꿀 수 없으니까. 보통은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검을 들어 막아야겠지. 그치?
미안, 나는 아니야 이 새끼야.
아래에서 뛰어오른 내 분신이 내 발을 양손으로 받치고, 힘껏 밀어 올린다. 내 몸이 한층 더 높게 솟구친다. 하이랜더의 정수리가 훤히 보일 정도로.
녀석이 휘두른 몽둥이는 내 다리 아래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내 머리 위에 만들어진 분신이 양다리로 내 등을 힘껏 밀고 사라진다.
“이리, 와!”
분신이 내 몸을 떠밀면서, 나는 엄청난 속도로 녀석의 정수리를 향해 내려꽂힌다. 그리고, 칼끝이 녀석의 정수리를 내려찍는다. 뻐억,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잿빛 두피에 칼이 박혀 든다.
“그래, 안 닿을 것 같았지.”
이래서는 소용없다. 두개골을 뚫고 우동 사리를 휘저어야 한다. 검을 박아넣은 나는 칼자루를 놓고, 칼자루를 있는 힘껏 발로 밟으며 뒤로 쭉 물러났다.
동시에 쉬지 않고 분신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분신이 머리통에 박힌 칼을 발로 내려찍고 사라지기를 빠르게 반복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이어지는 망치질.
퍼퍼퍼퍽, 하는 소리가 쉬지 않고 녀석의 정수리 위에서 울려 퍼진다. 그리고, 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검이 조금씩 더 깊게 박혀 들어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두개골을 뚫지는 못하고 있다.
망할. 머리통에 비브라늄이라도 심은 거냐?
“조금만 더……!”
엄청난 속도로 마력이 빨려 나가며 순간적으로 눈앞이 핑 돈다. 능력을 사용하며 대기 중으로 내보낸 마력은 결국 다시 내 몸으로 돌아온다. 내가 주인이니까.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현기증 때문에 잠깐 비틀거리는 사이, 녀석이 자신의 정수리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다시 뽑아내려는 거다. 하지만 곧바로 뽑아내는 데는 실패하고 잠깐 휘청인다.
그래, 어쨌든 검이 내려 찍힌 충격이 뇌로 전달되었는지. 순간적으로 뇌진탕이 온 모양이다.
“좋아!”
그리고, 도리안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다리에서 제트 엔진 같은 바람을 뿜어내며 쏘아져 나간 도리안의 칼이 하이랜더의 목젖 부근을 쑤시고 들어갔다.
“크그르르르륵!”
하이랜더가 그런 소리를 내고는, 급하게 도리안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미친.”
그 후려침의 결과는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도리안은 마치 스파이크에 때려 맞은 배구공처럼 무시무시한 속도로 바닥에 때려 박혔다.
그리고 다시 그 충격에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가, 다시 바닥에 떨어져 데구르르 눈 위를 구른다. 보고도 눈을 믿을 수 없는 광경이다. 물리법칙에 오류라도 생긴 건가.
도리안을 후려친 하이랜더는 곧장 피가 흘러나오는 자기 목을 손으로 감쌌다.
“살아 있으십니까?”
죽었니 살았니. 대답 좀 해봐.
“커헉, 죽었다 이놈아!”
커헉, 하는 한마디로 끝낼 만한 상황이 아닌데? 굉장한데. 저런 꼴을 당하고도 입에서 피 뿜어내는 정도로 끝낼 수 있다니.
보통 사람이 저런 공격을 맞았다면, 잘은 모르겠지만 테니스 라켓에 후려 맞은 꿀벌 꼴이 되었을 거다.
“저 상처, 얼마나 깊습니까?”
도리안이 잠깐 으윽, 하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쭉 편다. 으드득, 하는 소리가 들리고,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닦은 도리안이 힘겹게 외쳤다.
“후두에는 안 닿았어!”
망할, 그렇다면 치명상은 아니다. 후두를 따는데 성공했으면 호흡을 하기 힘들어졌을 텐데. 이래서는 뼈를 주고 피를 취한 꼴인데.
“머리는 노리지 마, 발리스타라도 가져와서 때려 박지 않는 한 못 뚫는다.”
젠장, 이래서 사람이 경험이 중요하다니까. 그 정도로 골통이 딴딴한 녀석인지는 몰랐다. 그런 건 책에도 안 쓰여 있었다.
도리안이 녀석의 모가지에 칼질을 한 잠깐의 시간 동안, 분신을 만들어내느라 사용되었던 마력이 약간이나마 내 심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장기전이군.”
어쩔 수 없다. 머리통을 두들기는 건 조금 뒤로 미뤄야 할 것 같다. 지금 돌아온 마력으로는 정수리에 박힌 검을 여러 번 내려찍지 못한다.
“흐흐흐.”
하이랜더 자식이 그런 소리를 내며 자기 정수리에 박혀있던 내 검을 쑥 뽑아내 바닥으로 떨군다.
그 꼴을 본 나는 히죽 웃었다.
“이야, 고맙다. 안 그래도 필요했거든.”
바닥에 떨어지는 검을 분신이 받아서, 나에게 던져주고 사라진다. 날아온 검을 받은 나는 검을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네. 뭐, 돌머리들이 다 그렇지만.”
아니면 칼이 두개골을 두들기는 바람에 멍청해진 건가? 내가 보여준 게 있는데, 이 정도는 예상했어야지. 그걸 그냥 바닥에 툭 버리면 어떡하냐 이 안쓰러운 영혼아.
치고받는 사이,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산에서 맞이하는 날씨는 알다가도 모른다더니, 진짜네.
“시야가 많이 좋아졌는데, 그냥 냅다 도망치는 건 어떻습니까?”
내 말에 도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쫓아올 거다. 따라잡히지 않을 자신 있나?”
당연히 없지. 하여튼, 세상에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어요.
“몸은 괜찮으십니까?”
내 질문에 도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다행입니다. 시선 좀 끌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 말에 도리안이 하, 하는 소리를 냈다.
“생각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대단한 건 아니지만, 효과는 있을 것 같습니다.”
내 말에 도리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봐. 서둘러라. 오래가지는 않을 거야.”
도리안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다리에 바람을 휘감고 하이랜더에게 쏘아져 나갔다. 하이랜더가 그런 도리안을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지만, 도리안은 갑자기 돌진을 멈추고, 눈을 향해 바람을 마구 뿜어내기 시작했다. 눈보라로 쌓인 눈이 바람을 타고 휘날리며, 순간적으로 하이랜더의 시야를 가린다.
동시에, 도리안의 입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오래가지 못한다고 했던 이유를 알겠군.
“지금!”
녀석의 시야가 가려진 사이, 크게 돌아 하이랜더에게 접근한 나는 녀석의 발뒤꿈치를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뻐억, 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박혀 들었다. 마력으로 육체를 강화한 상태에서 휘두른 검은, 어떻게든 가죽을 뚫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역시 이번에도 힘줄이 문제다.
“그거 참, 힘줄이 무슨……!”
힘줄이 지독하게 질기다. 가죽을 뚫는 데 성공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피가 나지만, 이걸로는 아킬레스건이 잘리지 않았다.
“어쩐지 이럴 것 같았지.”
예상되는 상황이라면, 대비책을 마련해야 하는 법이다.
나는 쥐고 있던 검을 놓고, 칼자루를 있는 힘껏 발로 내려찍었다. 동시에, 칼날 끝에 분신이 나타나, 칼날 끝을 발로 찬다. 양쪽에서 가해지는 힘의 균형이 맞으면서, 칼날이 단두대처럼 녀석의 발목 속으로 파고든다.
“아, 으아!”
좋아, 완벽하게 잘리지는 않았지만 아킬레스건에 심각한 손상을 주었다. 나는 그걸 확신하고는 급하게 자리를 피해 도리안을 둘러업었다.
“이제 도망치겠습니다!”
저 자식은 이제 절름발이다. 우리를 쫓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이랜더는 적을 앞에 두고 도망치지 않는다고? 어쩌라고, 내가 도망치면 되잖아. 이게 뭐 꼭 막타를 쳐야 레벨업 하는 RPG 게임도 아니고.
하이랜더 사회가 장애인을 우대하는 풍토가 있다면야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저 꼴을 해서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덩치가 그렇게 커서는 목발 구하는 것도 일이겠네. 욕봐라.”
나는 달리면서 둘러업은 도리안을 향해 말했다.
“길, 알려주시면 됩니다.”
내 말에 도리안이 뒤에서 낮게 웃음을 흘렸다.
“미친놈 같으니라고.”
미쳤다니, 영리한 거지. 이형기 시인의 낙화라는 시 몰라?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개인적으로 기가 막힌 명언이라고 생각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