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19화 (19/275)

019화

그렇게, 우리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아킬레스건이 상한 하이랜더를 그 자리에 남겨둔 채로 수색대의 본부를 향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 모든 사태를 겪고도, 우리는 꼬박 3일 정도를 더 걸어 올라가야 했다.

마침내, 산 위에 어둠이 내려앉을 때 즈음이 되어서야, 저 멀리에서 희미하게 모과색을 닮은 불빛이 아른거리기 시작한다.

“환영한다.”

내 부축을 받은 채, 도리안은 그렇게 말하고 험준한 산 위, 그나마 좀 평평해 보이는 땅 위에 세워진 건물을 가리켰다. 돌과 얼음뿐인 평평한 땅 위에, 눈과 얼음을 뒤집어쓴 채 자리 잡고 있는 건물 위에는 왕국의 깃발과 국경 수비대의 깃발이 나란히 걸려, 몰아치는 바람에 뜯어져 나갈 듯이 펄럭이고 있었다.

“여기가 제7수색대의 본부다.”

“하.”

수색대 본부라는 이름이 붙은 건물의 모습은, 거인의 몸에 기생하고 있는 한 마리 벼룩 같았다.

몰아치는 바람과 대지에 깔린 얼음 속에서, 가까스로 땅에 매달린 채 몸을 움츠리고 달달 떨며 눈치를 보고 있는 벼룩.

이 거대한 산맥이 엄포를 놓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아무리 기를 쓰고 노력해도 이 돌과 얼음뿐인 세상에 발을 내디딘 이상 네놈들이 남길 수 있는 문명의 흔적은 고작 이 정도가 전부라고…… 이 이상은 기대하지 말라고.

“초라합니다.”

내 말에 도리안이 흐흐흐, 하고 웃었다.

“수십 년이 걸렸다고 알고 있다. 이 산 위로 조금씩 건축 자재를 나르고, 물자를 쌓았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이 세월과 함께 빚어낸 건물이야. 초라하다고 해도, 이 근방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숙소야.”

수십 년을 노력해서 만들어낸 것이 고작 저거다. 심지어, 여기는 산머리라고 불리는 장소도 아니었다. 저 멀리에는, 돌과 얼음으로 이루어진 산이 까마득히 먼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다가 도리안을 바라봤다.

“지금 막 쿠르스트 산맥이 무서워졌습니다.”

오는 길은 힘들었고, 하이랜더는 내 생각 이상으로 강력했다. 하지만, 이 산맥에 들어선 이후 두려움을 느낀 건 지금이 처음이다. 내 말에 도리안이 내 등을 퍽 하고 한 번 쳤다.

“당연히 무서워해야지. 이 땅의 지배자는 하이랜더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다. 숨어 살고 있는 괴물이나 거대한 짐승도 아니지. 쿠르스트 산맥의 주인은 쿠르스트 산맥이야. 잠깐이라도 정신을 다른 곳에 팔거나, 방심하면 이 산맥이 너를 먹어치울 거다.”

말을 마친 그는 나와 함께 건물 안으로 향했다.

“제7수색대는 기사 세 명, 그리고 오십 명의 숙련된 병사로 구성되어있다.”

53명이라고?

“규모가 작은 것 같습니다.”

내 말에 도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색대의 최우선 목적은 위협요소를 찾아내는 거지, 제거하는 게 아니니까.”

물론, 수색대 선에서 제거할 수 있는 수준의 위협이라면 당연히 수색대가 처리한다.

하지만, 수색대 선에서 처리하기 버거운 위협을 발견한 경우에는 저 산 아래 관문에 자리 잡고 있는 수비대가 발견한 위험에 대해 대비하도록 경고해야 한다.

“게다가, 어차피 이 이상 숫자를 늘리면 정상적으로 보급을 유지하기 힘들어.”

옮겨야 하는 물자의 양이 많아지니까. 걸어왔던 그 수많은 샛길과 경사로를 생각해보면 55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먹여 살리고 있다는 게 오히려 기적 같은 일이다.

그나저나, 마법사라. 직접 보게 되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은데.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마침내 본부라는 이름의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대장! 신입 주워온다고 하더니!”

건물 안의 벽난로에는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휘몰아치는 찬바람은 이따금 건물 벽을 때릴 뿐, 최소한 이 건물 안으로 쑤시고 들어오지는 않았다. 앉아있던 녀석이 도리안을 보고 반갑게 아는 척을 했다.

“시끄러, 특이사항 있으면 보고해.”

도리안의 말에 앉아있던 녀석 중 하나가 고개를 저었다.

“관리 중인 도로와 시설 모두 이상 없음. 물자는 3번 막사에 페미컨 10개, 식수 한 통을 보급해야 하고…… 나머지는 모두 식수 세 통, 페미컨 30개 문제없이 채워져 있어. 보자, 제럴드 포함 다섯 명이 현재 정기 수색에 향했는데, 슬슬 연락이 올 거야.”

그리고 저 멀리에서 희미하게 삐이이이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피리 같은 건가. 그 소리를 들은 남자가 도리안을 보며 말했다.

“자, 들었지? 이상 없음. 아, 그리고 조금 있다 따로 이야기 좀 했으면 좋겠는데.”

말을 마친 남자가 나를 슥 보고는 입을 열었다.

“피터다. 명목상 부대장이지.”

나는 그 말에 인사를 하며 그를 한번 훑어봤다.

“마틴입니다.”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깐 나를 훑어본다.

“좋아 마틴. 조금 기다리라고.”

말을 마친 그는 건물의 계단을 올라갔다. 위쪽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난다. 잠시 뒤 돌아온 마틴이 내 앞에 턱 하고 짐을 내려놓았다.

피터가 제일 먼저 꺼내 든 물건은 작은 피리였다.

“중요한 물건들 중 하나다. 아까 피리 소리는 들었겠지.”

이걸로 서로 신호를 보내서 안부를 묻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알프스의 요들송도 원래 목적은 산에서 멀리 있는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 개발되었던 거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었지. 피리를 내 앞으로 내민 피터가 곧바로 나에게 책을 한 권 내밀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신호집이다. 보안을 위해 주기적으로 사용하는 신호를 바꾸니, 항상 숙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임무 수행 중 따로 책자는 챙기지 않도록 조심해.”

보안이라, 하긴. 하이랜더들이 우리가 사용하는 피리 신호를 역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면 문제가 생기니까. 나는 그 말에 수긍하고 책을 받아들었다. 다음으로 내 앞으로 내밀어진 물건은 날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검 한 자루와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크기를 엄청 키워 놓은 효자손처럼 생겼는데.

“검은 쓸 줄 아는 모양이고, 이게 뭔지 아나?”

“죄송합니다.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내 말에 저런, 하는 소리를 냈다.

“저런, 천상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야 되겠군. 뭐, 어쩔 수 없지.”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대장, 이 녀석 실력은 확인해봤어?”

피터의 말에 도리안이 대답했다.

“본부로 오는 중에 하이랜더에게 습격받았다.”

그 말을 들은 피터가 눈을 크게 뜨고 나와 도리안을 바라봤다.

“몇 마리나 마주쳤는데, 피리는 왜 안 불었어, 날이 추워서 입이 얼어붙기라도 했던 거야?”

도리안이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피리 범위 밖에서 일어난 일이야. 한 마리였고. 눈보라 때문에 길을 잃은 것 같더군.”

이후, 이어진 도리안의 설명을 들은 피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자마자 1인분이라. 좋은데.”

뭘 또 그렇게까지 간지럼을 태우고 그래, 부끄럽게.

도리안이 입을 열었다.

“사실, 그것보다는 다른 점이 인상 깊어서 뽑았었지. 마틴, 저 친구에게서는 뭐 알 수 있는 것 없나?”

해줄 말이라. 나는 이 장소에서 시간을 오래 보내야 한다. 유용한 인재라는 것을 어필해 둘 필요가 있다.

“오늘 커다란 짐승을 상대하셨습니다. 복귀하는 길에 두 번 정도 미끄러지셨는데, 오른 발목에 상처를 입은 동료를 부축하고 이동하다가 발생한 일입니다. 부대장이 이동한 경로도 눈보라가 심했던 것 같은데,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내 말에 피터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너 뭐냐?”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신입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피터 부대장.”

내 말에 피터가 입을 열었다.

“자세히 설명해, 어떻게 알았지? 아직 대장에게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는데.”

나는 그 말에 음, 하는 소리를 내고는 피터에게 다가가서 옷을 슥 훑어보며 말했다.

“옷에 엉겨 붙어있는 짐승의 털. 어깨는 물론이고 머리 위에도 엉겨 붙어있는 걸 보면 작은 동물이 아닙니다. 최소한 부대장만 한 크기의 짐승입니다. 더 클 수도 있습니다만, 제가 아직 이 동네 생태계를 잘 모릅니다.”

늑대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커다란 짐승을 마주쳤다.

“미끄러진 건? 아니, 정확히 말하면 횟수를 어떻게 안 거야.”

“엉덩이에는 젖었다가 마른 진흙이 약간 묻어있고, 신발 뒤꿈치 부분에 생긴 지 얼마 된 것 같지 않은 긁힌 자국이 보입니다. 그러니 엉덩방아입니다. 묻은 흙이 두 종류니 두 번 미끄러졌다고 찍어본 겁니다.”

더 많이 엎어졌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 동네를 돌아다니는 데에는 도가 튼 전문가다. 막 싸움을 끝낸 상태에서 동료를 부축하는 건 힘든 일이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끄러진 횟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부상당한 동료의 다친 부위는?”

“왼쪽 발목 옆에 약간의 핏자국이 보입니다.”

피터의 왼 발목에 피가 묻으려면 부축한 상대는 오른 발목에 부상을 입었어야 한다. 내 대답을 들은 피터가 눈을 빛내며 다시 한번 질문을 던진다.

“그렇군. 눈보라는?”

“입고 있는 옷의 뒤쪽은 물에 흠뻑 젖었다가 마른 흔적이 남아있지만 정면에는 그런 흔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냥 눈이 내린 게 아니라, 심한 바람을 동반한 겁니다.”

바람이 세게 몰아치는 와중에 눈이 내린다? 그게 눈보라라는 짧은 단어를 길게 표현한 거잖아.

“눈보라를 등지고 이동했기 때문에, 등에는 젖었다가 마른 흔적이 남아있지만 정면에는 그런 흔적이 덜합니다. 하지만, 뒷목 언저리에는 물에 젖은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부상당한 사람의 팔을 어깨를 목에 둘러 부축한 채 걸었다는 뜻입니다.”

목덜미로 향하는 바람은 부상당한 사람의 팔이 대신 맞아주었다. 그래서 안 젖었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피터가 도리안을 보며 말했다.

“어디서 이런 물건을 주워온 거요?”

피터의 말에 도리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오랜 친구 하나가 선물을 주더군. 안 그래도 신세만 지고 있었는데 말이야.”

“기가 막힌 녀석이군. 말로만 듣던 천재를 내 눈앞에서 보게 될 줄이야.”

나는 그 말에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천재라니,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내 대답을 들은 피터가 히죽 웃으며 도리안을 바라봤다.

“겸손까지 떨 줄 알다니.”

그럴 리가. 이건 겸손한 게 아니다.

일하는 과정에서 원치 않게 천재를 몇 번 만나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생물들은 나 같은 것들이랑은 차원이 다르다.

녀석들은 나를 그냥 잘 훈련된 사냥개 정도로밖에 보지 않는다. 실제로, 내가 만난 천재들은 나를 사냥개 정도로 취급해도 할 말 없는 생물들뿐이었지.

그래, 소위 말하는 천재라는 것들은 확실히 사람은 아니었다. 사람 껍데기를 쓰고 있을 뿐인 무언가 다른 생물.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내가 만난 천재들은 다들 그랬다.

“원래는 임무 수행하는 모습을 보고 결정할 생각이었지만…… 교육을 마치고 나면 바로 월버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더군.”

도리안의 말에 피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빈자리를 오래 남겨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저는 찬성입니다.”

수색대의 대장과 부대장이 동의했다면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다.

“자, 좀 기다리고 있어 봐. 다른 대원들에게도 자기소개해야지.”

나는 피터와 도리안의 안내와 함께 다른 수색대의 대원들에게 자기소개를 했다. 일단, 간부 역할을 맡길 생각으로 나를 선발했기 때문에 병사들은 나에게 존대를 해주었다.

밖에서 잠깐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피터가 말해주자, 앉아있던 수색대원들이 흥미를 보이며 나에게 자신들에 대해서 맞춰보라는 식의 말을 던졌다.

나는 말해도 괜찮은 것과 아닌 것들을 가려내서 말해주었고, 그것만으로도 수색대원들이 얼이 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 질문을 던졌다.

“레드우드 가문의 도련님께서, 쿠르스트 산맥으로 끌려온 이유가 뭡니까?”

병사들은 살기가 힘들어 자원하는 경우도 꽤 있다. 기사들은 쿠르스트 산맥으로 배속 명령을 받는다면 좋든 싫든 여기로 와야 한다. 하지만 귀족이 쿠르스트 산맥으로 오는 이유는 하나뿐이지. 대원 중 하나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레브란트 후작가의 후계자가 나 때문에 죽었어. 엄밀하게 말하자면 사고지만, 어쨌든 레브란트 후작가는 나한테 책임을 묻고 싶었던 모양이고.”

내 말에 꽤나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를 찬바람이 한 번 크게 휩쓸고 지나간다.

“저런, 그건 확실히…… 쿠르스트 산맥으로 향할 만한 사정이긴 합니다.”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 몸뚱어리 주인은 성격도 개차반이었지만 재수도 드럽게 없는 녀석이었던 모양이니까.

잠깐의 침묵이 끝난 다음, 다시금 이야기가 시작된다.

“당분간 죽었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내 훈련에 대한 이야기였다. 도리안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저 녀석은 이미 구심점에 어지간한 기사 이상의 마력을 모아두었어. 검술도 제법 기본은 할 줄 알더군. 가르쳐야 할 지식을 다 전하고 나면 이후로는 바로 실제 임무에 밀어 넣을 생각이다.”

도리안의 말에 나에게 말을 걸었던 대원이 오,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럼 2주 정도만 고생하면 될 겁니다.”

그 이후, 내 앞으로 내밀어진 책자들. 이미 여러 번 사용되어서 그런지 꽤 낡아 있었다.

“페이지는 다 붙어있습니다.”

그것참 다행이네, 혹시 페이지가 몇 장 뜯어져 나갔으면 어쩌나 하고 고민했거든. 책을 받은 나는,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수색대의 분위기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국의 군대와는 느낌이 다르다. 사실, 생각해보면 한국의 군대와는 분위기가 다를 수밖에 없지.

한국도 북한과 전쟁 중이기는 하지만…….

여기는 코앞에 괴물들이 돌아다니는 장소니까.

부대장이 거대한 짐승에게 습격당했고, 그 와중에 부상자가 발생했다. 부상자가 생겼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를 걱정하기는 하지만, 대단히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처럼 굴지는 않았다.

“자주 발생하는 일이라는 뜻이지.”

쓸데없이 먼저 들어온 사람이라고 깝죽거리다가는 좋지 않은 최후를 당할 수 있다는 걸, 모두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이 닥쳤을 때 결국 의지하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이 수색대의 대원들뿐이라는 것도 잘 이해하고 있다.

“도리안이 사람을 가려 받는 걸 수도 있고.”

어쨌든, 쉽게 말하면…… 몸은 더럽게 힘들어도 쓸데없는 부조리만큼은 없는 부대라는 거다. 사실, 군대가 힘든 게 함께 있는 사람들이 엿 같아서 힘든 게 굉장히 크니까. 처음 도착한 막사에서 두들겨 맞을 때만 해도 한국 군대보다 더 심각한 상황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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