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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26화 (26/275)

026화

이후로도 별다른 일은 없었다. 식사는 잘 나왔고, 머무는 데에도 불편함이 전혀 없었다. 이 정도면 군부대에 머무는 게 아니라 무슨 호텔에 머문다고 생각해도 될 정도였다.

그리고, 사람이 푹 쉬고 있으면 시간이 바람처럼 날아가는 법이다. 벌써 오늘이 왕궁에서 파견된 다섯 명의 마법사들이 오기로 한 날이다.

“이 정도 쉬었으면 되었지.”

별로 아쉬운 마음도 없다. 올라가서 해야 할 일이 벌써 걱정이니까. 물론 피터가 이전까지 하던 가락이 있으니 잘하고 있겠지만, 다시 인수인계받을 생각을 하면 머리가 아프다.

주둔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저 멀리에서 마차가 오는 게 보인다.

“다섯 대라.”

사람이 다섯 명이라서 마차도 다섯 대가 오는 건가. 게다가 하나같이 화려하다. 왕궁에 머무르는 마법사들은 대우가 굉장히 좋군.

나뿐 아니라, 수비대장도 함께 주둔지 앞에서 마차가 도착하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주둔지 앞에 도착한 마차에서 각각 마법사들이 내렸다.

남자 둘, 여자 셋. 그들이 내리자 곧바로 수색대장이 앞으로 나가서 인사를 한다.

“쿠르스트 산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의 말에 가장 앞에 서 있던 여자가 대답했다.

“고마워요. 국경 수비대는 항상 고생이 많은 걸로 알고 있어요. 궁의 많은 분들이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한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다가가서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에스칼 산머리 인근의 수색대 본부까지의 안내를 담당하는 제7수색대 소속 마틴 레드우드입니다.”

내 말에 마법사 중 하나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잘 부탁드리겠어요. 쿠르스트 산맥의 험준함은 잘 알려져 있지만, 수색대의 사람이 안내를 해주신다면 안심이네요.”

“레드우드 백작가의 마틴이라면, 설마 그 올가미…….”

그 말에 마법사 중 하나가 잔기침을 한 번 한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거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대답했다.

“올가미 도련님이라. 거기에는 꽤 복잡한 사정이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복잡한 건 아니다. 죽었는데 다른 사람 몸에 들어갔고, 그 몸의 원래 주인이 쓰레기였을 뿐이니까.

그리고 딱히 그런 별명을 언급한 거 가지고 노발대발하는 것도 웃긴 일이다. 뒤편에서 따분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경보 마법 따위는 별거 아니니, 후딱 끝내고 돌아가죠.”

말을 마친 여자는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저건 뭐야.

“이건 빨래가 끝나고 나면 두 번 정도 뿌려주세요. 그리고 이건 목욕물에 쓸 향료에요. 너무 뜨거우면 들어가기 싫어지니까 온도를 조심해주시고. 제가 식사가 까다로운 편이니 가능하면 요리에…….”

여자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로 병을 받아들었다. 이름이 뭐였지. 아, 그래 엘렌 리버플로우였지.

“리버플로우 양, 저희는 마법사분들이 머무르시는 동안 불편한 점이 없도록 최대한 배려를 해 드릴 예정입니다. 구태여 이렇게 기세 싸움을 하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내 말에 향료 병들을 내민 여자가 잠깐 움찔했다.

“무슨 소리지요?”

“항상 쓰던 물건이라면 뜯지도 않은 새것을 저에게 보여줄 리 없죠.”

이건 그냥 이후의 주도권 싸움에서 이겨보기 위해 한 번 저 여자가 총대를 메고 악역을 담당한 것뿐이다.

어쨌든, 자신들이 우리 일정에 맞추는 것보다는, 우리가 자신들 일정에 맞춰주는 게 이후에 편한 건 당연할 테니까.

오기 전에 서로 머리 맞대고 고민을 많이 한 모양이네. 귀엽기도 해라. 휘둘릴까 봐 얼마나 걱정했으면 저런 깜찍한 생각들을 다 했을까.

하지만 저 친구들이 마련한 시나리오는 내가 간단하게 몇 마디 지적한 것만으로 못 쓰게 되어버렸다.

“게다가 입고 계신 옷에서는 별다른 향료의 냄새가 나지 않고, 옷의 구겨진 정도를 보니 마차를 타고 오시며 쭉 같은 옷을 입으셨군요.”

나름대로 여기까지 오는 길과, 앞으로 가야 할 길이 편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다.

방금 전까지 싸가지 어투를 유지하고 있던 여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더 할 말 없지?

“다섯 분 모두, 쿠르스트 산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잠시 쉬었다가 제7수색대 본부를 향해 출발할 예정이니, 미리 몸을 씻어두시는 편이 좋아요.”

산을 오르기 시작하면 제대로 씻을 여유가 없을 거다.

“옷이 꽤 가벼워 보이는데. 따로 마법으로 처리를 하신 모양이군요.”

내 말에 마법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문제는 없겠지. 따뜻한 옷이 가볍기까지 하다면야 등산에서 그 이상으로 좋은 것도 없다.

“생각했던 것보다 춥거나 힘들지는 않네요.”

휴식을 마치고, 수비대의 주둔지를 떠나 산길을 오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엘렌이 건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가요? 다행입니다.”

가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뭐, 그냥 등산로라고 생각해도 문제없지.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한다. 길이 좁아지고, 돌이 많아지고, 경사가 가파르게 변한다.

“…….”

“다들 괜찮으십니까?”

내 말에 다섯 명은 대답이 없다. 그래 뭐, 어차피 마법사들의 체력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니까. 시간도 일부러 넉넉하게 잡았으니…….

“여기에서 잠시 쉬었다 가죠.”

그 말에 마법사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근처의 돌덩이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기 시작한다.

“앞으로 계속 이런가요?”

“에이, 설마 그럴 리가요. 더 심해지죠.”

쿠르스트 산맥을 뭐로 보고 있는 거야. 내 대답을 들은 마법사 일행들의 표정이 흡사 산책 끝나고 집 앞에 멈춰선 개 같은 표정이다.

“그럼, 얼마나 더……?”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지금 이 속도라면, 쉬었다가 세 시간 정도만 더 가면 두 번째 관문에 도착합니다.”

산책 끝나고 멈춰선 개의 표정에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표정으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물이나 좀 마셔둬.

“그럼, 다시 출발하죠.”

몸 퍼지면 여기에서 이 친구들의 굼뜬 엉덩이가 더 무거워질 것이다. 몸이 풀리면 원래 그렇거든.

내 말에 억지로 몸을 일으킨 마법사들이 내 뒤를 따라오기 시작한다.

“하악, 잠깐! 더 못해……!”

나는 그 말에 뚱한 표정을 짓고 뒤를 돌아보고는 말했다.

“거의 다 왔습니다. 한 10분 정도만 더 가죠.”

뻥이다. 앞으로 1시간은 더 걸어야 한다.

내 말에 헤엑거리며 숨을 내쉬던 마법사 하나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마법사들은…… 시간에 민감합니다.”

아 그래? 어쩔 수 없지. 진실을 말해줄게.

“사실 한 시간은 더 가야 합니다.”

그 말에 고개를 숙이고 숨을 몰아쉬던 엘렌이 대답했다.

“차라리 10분이라는 말에 속을걸.”

내 말이 그 말이다.

“그래도 도착해서 드실 식사는 병사들이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입에 맞으셨으면 좋겠는데요.”

오늘의 메뉴는 햇감자와 땅콩, 절인 양배추를 곁들인 통짜 햄구이다.

몸이 힘들어도 맛있는 걸 먹으면 고통이 좀 덜어지는 법이지. 저거 챙겨온다고 병사들이 궁시렁거렸을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렇게 돌아다니고 먹는 거라면……! 통나무를 씹어 먹어도 맛있을 것 같은데요!”

에이, 아닐걸.

“그럼 저희가 평시에 먹는 음식도 한번 맛보시겠습니까?”

안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서 챙겨 놓은 게 좀 있는데. 말려서 빻은 다음 기름에 반죽한 고깃덩어리를 곡물가루 푼 물에 넣고 끓인 죽이야.

“그 고기 반죽, 책에서 읽어봤어요. 약 200g 정도 먹으면 한 끼 식사로 충분하다고 하던데.”

나는 그 말에 인상을 팍 썼다.

“그 책 쓴 새끼 이름이 뭡니까?”

“왜요?”

왜긴 왜야. 잡아 와서 목구멍에 깔때기 쑤셔 넣고 그 새끼가 말한 200g을 일주일 내내, 끼니마다 쏟아 넣으려고 그러지. 살아남을 수 있나 한번 꼭 보고 싶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절대로 200g을 먹을 수 없어요.”

200g? 그렇게 많이 먹으면 분명히 동서남북으로 토하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닐 거다. 맛을 참고 먹는데에도 한계와 정도가 있는 법이야.

“궁금하면 저녁 먹고 나서 좀 드릴 테니 먹어보세요. 그나저나 힘들다고 하더니 말은 참 잘하시는군요.”

“마법사는, 입 빼면 시체죠……!”

참 대단들 하시다. 어쨌든, 내가 계속해서 저 빈약한 육신에 채찍질을 가한 결과 마침내 우리는 목적한 관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걸 내일 또 해야 한다니.”

뒤편의 중얼거림을 들은 나는 못 들은 척했다. 대답으로 돌려줄 수 있는 말이 너무 절망적이기 때문에, 차라리 아무 말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관문을 지키고 있던 녀석들이 3초 뒤에 죽을 것처럼 숨을 할딱거리는 마법사들의 꼬라지를 보다가 내가 던져준 신분패를 확인하고 관문을 열었다.

“환영합니다. 저는 락밸리에서 에스칼 산머리로 이어지는 제2관문을 지키고 있는…….”

관문이 열리고 수비대장이 튀어나왔지만, 슬프게도 우리의 VIP께서는 차마 그 설명을 들을 수 있는 몰골이 아니었다.

“많이 피곤하신 것 같으니, 이야기는 식사 후에 나누시죠.”

수비대장이 내 말을 듣고는 어흠, 하는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러도록 하지. 고생이 많았네.”

마법사들은 간단하게 인사만 나눈 다음 바로 숙소로 짐을 풀기 위해 이동했고, 나는 그 뒷모습을 잠깐 바라봤다.

* * *

짐을 푼 마법사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쉬고 방을 훑어봤다.

“곰팡내하고는.”

그는 그렇게 중얼거린 다음 손을 휙 털었다. 허공에 반짝이는 가루들이 나타나 문과 벽에 달라붙는다. 벽에 붙은 채 잠깐 반짝이던 가루들은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주변을 감상하듯 훑어본 마법사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감상하는 듯한 눈길로 주변을 살폈다.

“이 정도면 안전하겠지.”

짐을 뒤져,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아래에서 뒤집히고, 위에서 거꾸로. 쌓이는 먼지 위에 짓밟혀 날아오른 나방.”

동시에, 그의 손등에 박힌 카넬리안이 희미한 붉은 빛을 흘리기 시작한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 상자 너머에는 작은 컵이 하나 놓여있었다.

“목소리를 드높이.”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카넬리안을 박아넣은 손을 위로 들어 올리자, 잔 속에 피가 차오른다.

“보고합니다. 에스칼 산머리까지는 며칠 더 걸린다고 합니다. 마틴 레드우드는 말씀하셨던 것처럼 눈치는 제법 빠른 모양이지만, 딱히 저를 의심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마법사가 말을 할 때마다 잔에 가득 차오른 피가 요동친다. 그리고 잠시 뒤, 마법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잔 안에 담긴 피가 요동친다.

― 그건 모를 일이지. 이미 두 번이나 방해했다. 두 번 방해했다면 세 번이라고 방해하지 못한다는 법은 없어.

“각별히 주의하는 중입니다. 방 안에 안배해놓은 경보 마법은 어지간한 수준의 마법사도 뚫지 못할 겁니다.”

붉은 가지를 활용하려고 했던 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호수 안에 박혀있던 붉은 가지는 그 힘을 로티샤 호수에 쏟아 넣고 평범한 목검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쓸 수 없는 카드다.

하지만, 쿠르스트 산맥 어딘가에 있을 하이랜더의 무덤은 위치를 찾아내는 데 실패했을 뿐이다. 아직 기회는 남아있다.

“혹시, 마틴 레드우드에 대해 별도로 지시 내릴 것은 없으십니까?”

마법사의 말이 끝나고, 즉시 대답이 돌아왔다.

― 칠색 내각의 계획을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이다. 가능한 상황이라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제거하도록.

“알겠습니다.”

― 이상이다. 주기적으로 보고하도록.

그 말을 끝으로 컵 안에 가득하던 피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컵 안에서 사라졌다. 잔을 확인하던 마법사는 쯔, 하고 혀를 찼다.

“또 피가 부족하네. 4살 이하의 어린애가 그렇게 구하기 쉬운 것도 아닌데. 돌아가는 길에 또 하나 잡아서 보충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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