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화
자리에 앉아있는 마법사들은 내 말에 나름대로 반응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럴까요? 아, 설치하는 마법진의 위치 말인데.”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단순한 식사 중 잡담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빠르게 본론으로 돌아와 준다.
“아, 맞아요. 그게 또 중요하죠. 기왕에 설치해야 한다면 수색대가 가기 어려운 쪽에 설치하는 게 좋은데.”
나는 그 마법사의 말에 대답을 돌려주면서 계속 마법사들을 살폈다.
하이랜더의 무덤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이전까지는 도리안 밖에 없었다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하이랜더의 무덤 위치를 특정 지을 수 있는 또 다른 녀석이 튀어나왔다.
그것도, 그냥 가본 경험이 있다 정도가 아니라 이전까지의 조사를 통해서 모은 객관적인 자료를 활용해서 위치를 특정지었다고 하는 녀석이다.
이 중에 누군가, 마법사로서의 업무보다 하이랜더의 무덤에 더 관심이 있는 녀석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할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식사를 너무 급하게 한 모양이에요. 아까부터 계속 체기가 있어서…….”
그리고, 마법사 중 하나가 속이 안 좋은 표정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아가씨는 내가 하이랜더 무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그 순간까지도 썰어놓은 햄에 감자를 올려 맛나게 먹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다. 그런 주제에 아까부터 체기가 있었다고?
유부남이 새벽 2시 모텔에서 알몸으로 이십 초반 여자를 끌어안은 채 마누라에게 걸렸는데, 사실 레슬링 동아리에서 서로 만나 파테르 연습 중이었다고 주장하는 걸 믿어 달라는 거랑 비슷하다.
믿을 개소리가 따로 있지.
“저런, 약은 있으십니까?”
내 말에 다나 힐베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해서 배낭에 약을 챙겨왔어요. 미안해요, 이렇게 많이 준비해주셨는데…….”
나는 그 말에 웃으며 손을 저었다.
“괜찮습니다. 푹 쉬시고, 혹시 약을 드셔도 더 좋아지지 않는다면 꼭 병사에게 말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네, 그럴게요.”
그리고 여자는 돌아갔다. 이름이 뭐였지. 그래, 다나 힐베른. 붉은색이 도는 다갈색 머리카락에 파란 눈동자. 나이는 28세.
오른손잡이. 몸에서는 연한 작약꽃 향기가 났지.
키는 162cm에 몸무게는 50 초반, 발크기는 235. 빠르게 머릿속에 구겨 넣었던 정보들을 꺼내 확인한 나는 미소를 지은 채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식사 즐거웠습니다. 아마 관문의 수비대장님이 잠깐 마법사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할 텐데. 내일은 오늘보다 더 즐거운 등산이 될 예정이니, 너무 오래 붙잡아 두는 것 같으면 양해를 구하시면 됩니다.”
한 30분 정도 더 이야기를 나누던 나는 인사를 하고 자리를 마무리했다. 어차피 얻어야 할 것들은 다 얻은 입장에서 더 시간을 끌 필요는 없으니까.
이 자리에 앉아있는 네 명은 수상한 점이 많이 희석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너무 다나 힐베른에게 의심을 집중하는 것도 곤란하겠지만.
“왜 돌아갔을까.”
방 안에 털썩 주저앉은 나는 하품을 한 번 크게 했다.
“어차피 대가리가 이런 일에 직접 나서는 경우는 없으니. 보고를 하려는 것일 가능성이 높은데.”
도리안을 조져야 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 우리를 에스칼 산머리까지 인도해주는 마틴이라는 친구를 조지는 것도 괜찮아 보이는데요?! 같은 이야기.
“이후 행동을 보면 알겠지.”
시도해 볼 만한 건 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휘파람을 불면서 숙소를 나와 수비대의 의료를 담당하는 사람에게 갔다.
“매실 있습니까?”
매실즙을 얻어낸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그 병을 챙겨 다나 힐베른의 숙소로 향했다. 쉽잖아. 나는 남자고, 다나 힐베른은 여자다.
자고로 세상에서 정보고 돈이고 뜯어먹고 벗겨 먹고 써먹기 가장 쉬운 호구가 바로 상대 여자는 관심이 전혀 없는데 혼자 사랑에 빠져서 간이고 쓸개고 다 내주는 남자다.
이 상황 이 시점에서 내가 다나 힐베른에게 관심이 있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겨준다면 다나 힐베른은 어떻게 나올까?
“여기에서 다나 힐베른이 받아주면 이상한 거지.”
나는 물론 여기에서 벗어날 생각이지만, 쿠르스트 산맥에서 의무를 다하고 벗어나는 건 무지막지하게 힘든 일이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행정고시 합격한 잘 나가는 5급 공무원이 한 10년 뒤에나 전역하는 기간병을 연애 대상으로 느낀다는 건데. 상식적으로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그러니 시도해보는 거다. 여기에서 다나 힐베른이 관심이 있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 여자에 대한 내 의심은 한층 더 깊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다나 힐베른의 입에서 하이랜더의 무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거기서부터는 의심이 아니라 확신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저기, 안에 계십니까?”
다나 힐베른의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하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곧 대답이 돌아왔다.
“아, 잠시만요.”
조금 뒤 문이 열리고, 다나 힐베른이 약간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무슨 일이시죠?”
나는 그 말에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으며 병을 내밀었다.
“수비대에서 받아온 매실즙입니다. 체하셨다고 하니 혹시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에.”
내 말에 다나 힐베른이 내가 내민 병과 나를 잠깐 번갈아 쳐다본다.
“그, 고마워요.”
다나 힐베른은 나에게서 병을 받아들고는 감사 인사를 한다.
“아닙니다. 괜히 제가 설레발 떤 건 아닐지 모르겠네요.”
내 말에 다나 힐베른이 고개를 저었다.
“설레발이라니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나 힐베른이 인사를 하고 문을 닫으려 하자 나는 입을 열었다.
“저기…….”
내 말에 그녀가 문을 닫는 행위를 멈추고 잠깐 나를 바라본다. 1초, 2초, 3초. 나는 이내 아하하 하고 웃으며 말했다.
“푹 쉬세요.”
내 말에 다나 힐베른이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레드우드 씨도.”
말을 마친 다나 힐베른이 문을 닫았고, 나는 작게 한숨을 쉰 다음 걸음을 돌렸다. 어차피 수색대 본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시간이 제법 있으니까.
그 와중에 지속적으로 티가 나게 다나 힐베른을 신경 써준다면 입질이 올 거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굴러가나 보자고.”
잠깐 닫힌 문을 보고 있던 나는 낮게 휘파람을 불며 숙소로 돌아가 침대에 누운 채 마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틈이 날 때마다 끌어모았던 마력은 엄청난 성장은 아니지만, 처음 붉은 가지를 몸에 박아넣었을 때보다는 조금 더 늘어있었다.
“시간 참, 더럽게 빨리 가네.”
2-3시간 정도 마력을 끌어모으고, 잠을 한숨 자고 나자 벌써 일어날 시간이다. 침대에서 일어나 눈가를 비빈 나는 곧바로 몸을 씻고 마법사들의 숙소를 돌기 시작했다.
일단은 이 친구들의 대장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엘렌 리버플로우부터 시작해서 다른 마법사들에게 식사 준비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의심하고 있는 친구 다나 힐베른.
“식사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내 말에 문을 열고 나온 다나 힐베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식사 후에는 또 등산이겠죠.”
“금방 익숙해지실 겁니다, 힐베른 양.”
내 말에 그녀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수 있으면 좋겠네요.”
이쯤에서 잠깐 침묵, 다나 힐베른은 들어가지 않고 서 있었다. 짧은 침묵을 끝내고 나는 입을 열었다.
“다른 마법사분들에게는 이미 말을 전해두었습니다.”
“어머, 제가 마지막인가요?”
나는 그 말에 애매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되네요. 혹시 준비가 더 필요하신가요?”
내 말에 잠깐 자기 머리카락을 비비 꼬고 있던 다나 힐베른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겠지.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머리에 물기가 남아있으니까.
“그럼, 저기. 같이 내려가시죠.”
약간 걱정하는 듯한 느낌으로 같이 내려가자고 하자, 이내 흔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머, 그러면 되겠네요.”
밖으로 나온 다나 힐베른이 내 옆에 서고, 나는 그녀와 함께 어제 식사를 했던 곳으로 내려갔다.
“저기, 아침 식사는 좀 부드러운 걸로 가져와 달라고 할까요?”
내 말에 다나 힐베른이 고개를 저었다.
“준비하는 사람들이 번거롭잖아요. 게다가, 어디까지나 신세를 지는 입장에서 그런 걸 부탁하는 것도 좀 그렇고.”
“아닙니다. 필요하시다면 제가 바로 말하겠습니다.”
나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정말입니다. 수색대가 쿠르스트 산맥 국경 수비대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그렇게 낮지 않거든요. 요청을 한다면 분명히…….”
내 말에 다나 힐베른이 잠깐 웃음을 터뜨리고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정말로 괜찮아요. 어제 주신 매실즙을 먹고 좀 쉬었더니 말끔해졌어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식당에 도착해서 식사를 한다. 자연스럽게 다나 힐베른의 옆자리에 내가 앉게 되었다.
“혹시, 조금 더 드시겠어요?”
식사를 하던 중에 다나 힐베른이 자신의 몫을 약간 덜어내서 나에게 준다.
“힐베른 양, 식사는 든든하게 해두시는 편이 좋을 거예요. 길이 험합니다.”
“그래도 급하게 먹어서 체하는 것보다는 나을걸요? 그러지 말고, 조금 도와준다고 생각하세요.”
다른 마법사들이 나와 다나 힐베른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면서 식사를 계속하기 시작한다.
하루 사이에 다나 힐베른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상당히 변했다는 것 정도는 이 자리에 있는 누구나 알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이 정도라고 한다면 본인이 모를 리는 절대로 없다. 계속해서 나는 최선을 다해 다나 힐베른에게 반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등산을 시작했을 때도 그러한 나의 노력은 변치 않았다.
“물 좀 드시겠습니까?”
가던 길에 괜히 내 수통의 물을 건네주기도 하고.
“이쯤에서 조금 쉬어갈까요.”
휴식을 취하는 타이밍도 다나 힐베른이 힘들어하는 시점에 맞췄다.
덕분에, 다른 마법사들이 꽤나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너무 자주 쉬는 것 같은데. 오늘 머무르기로 한 관문에 도착할 수 있는 겁니까?”
한 남자 마법사의 말에 다나 힐베른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너무 시간이 끌리고 있는 거죠?”
나는 그 말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사실 안 괜찮아. 너 별로 힘들지도 않으면서 지금 내 태도를 간 보기 위해서 일부러 계속 힘든 기색을 비추고 있는 중이잖아?
나와 다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렌이 음, 하는 소리를 내고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거리가 제법 남은 걸로 아는데. 힐베른 양이 생각보다 힘들어하시는 것 같네요. 하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걸음을 재촉하면 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
잠깐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던 엘렌이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레드우드 씨가 힐베른 양을 부축해 주시는 게 어떨까요?”
엘렌의 제안에 대해서 보여줘야 하는 반응은 정해져 있다.
“그래도 됩니까? 아니…… 그래야겠죠?”
내 말에 엘렌이 작게 한숨을 쉬고는 이내 웃었다.
“어쩔 수 없잖아요? 부탁 좀 드릴게요.”
다른 마법사들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엘렌의 해결책에 동의했다.
좋은 일이다. 다들 나를 다나 힐베른에게 환장한 푼수 정도의 이미지를 나름대로 굳혔다는 소리니까.
“죄송해서 어쩌죠.”
“괜찮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나 힐베른을 부축한 채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