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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29화 (29/275)

029화

다나 힐베른도 이 일련의 상황에서 나름의 확신을 얻은 모양이다. 내 부축을 받은 이후로는 힘들어하는 기색을 거의 내지 않았다.

덕분에, 아슬아슬하게나마 우리는 에스칼 산맥으로 향하는 길목의 두 번째 관문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젠장, 2시간이나 늦었잖아…….”

한 마법사가 불만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연히 내 귀에 들렸고, 다나 힐베른도 그 목소리를 듣고 움찔한 다음 부축하고 있는 내 쪽으로 약간 붙었다.

뻔하지, 저 말에 뭐라도 대꾸라도 좀 해달라는 뜻이다.

“2시간 정도면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닙니다.”

내 말에 작게 구시렁거렸던 마법사가 하, 하는 소리를 내고는 대꾸한다.

“그렇겠죠. 암요.”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네, 괜찮아. 나도 별로 너에게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고 있거든.

댁이 뭐라고 생각하건 어차피 이 산 내려가면 앞으로 다시 얼굴 볼 일도 드물어. 하지만, 저렇게까지 말하니 뭐라고 한 마디 더 해주는 편이 좋으려나.

“제7수색대의 본부까지 안내하는 것은 제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일정의 조율 또한 제가 하지요.”

나는 다소 격양된 표정으로 부축하고 있는 다나의 몸을 감싼 손에 힘을 주고 말했다.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치는 분이 생기지 않는 게 그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다나 힐베른 양이 정해진 일정의 소화에 무리를 느끼셨다면, 제 입장에서는 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내 반응을 본 마법사가 잠깐 움찔하고는 이내 허어, 하는 소리를 내고 대답했다.

“알았겠습니다. 그럼 뭐냐, 식사 때 뵙지요.”

이야기를 마친 마법사는 그 말을 끝으로 관문 수비대의 병사에게 자신의 숙소를 안내받아 가버렸다. 그리고, 다른 마법사들도 잠깐 서서 분위기를 살피다가 흩어졌다.

“……미안해요.”

다나 힐베른이 내 옆에서 작게 속삭이고,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몸은 좀 어떠세요?”

“덕분에, 문제없어요.”

지친 것 같은 목소리. 나는 개인적으로 지금의 지친 목소리는 위장이라 추정하고 있다. 이 여자, 별로 안 힘들 거다.

나는 그 말에 잠깐 다나 힐베른을 응시했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그…… 사실은 조금.”

나는 그 말에 픽 웃었다.

“숙소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다나 힐베른을 숙소로 안내하면서, 나는 지나가던 병사를 향해 말을 걸었다.

“데운 물을 한 바가지 준비해서 여기로 보내.”

내 말에 병사가 네? 하고 반응한다.

“다시 말해줘야 하나?”

내 말에 병사가 아닙니다! 라고 말하고는 급하게 사라졌다. 나는 다나 힐베른을 보고는 약간 웃음을 띤 채 말했다.

“발이 피로할 때는 더운물로 헹구면 좀 편해집니다.”

내 말에 그녀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고마워요.”

시간은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식사 자리에서도 나는 다나 힐베른을 계속해서 신경 썼다. 그리고 밤이 되었고, 방에 머무르고 있으려니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저기…… 주무세요?”

다나 힐베른.

나는 목소리를 확인하자마자 픽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손에 이불깃을 쥐고 휙휙 흔들고, 발끝으로 침대를 툭툭 쳤다.

밖에서 소리만 듣는 입장에서는 아마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후다닥 튀어나오는 것처럼 들렸겠지.

“아닙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급한 목소리를 내며 대답하고는 문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가 문을 열었다. 물론, 문을 열며 숨을 헐떡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혹시, 뭐 불편하신…….”

나는 하던 말을 일부러 잠깐 멈췄다. 다나 힐베른은 꽤나 얇아 보이는 옷을 입고 서 있었다.

“잠이 잘 안 와서요. 혹시, 방해인가요?”

나는 그 말에 멍한 표정을 유지하다가 이내 퍼뜩 정신을 차리는 척하고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방해일 리가요.”

“다행이다. 저기, 들어가도 괜찮나요?”

나는 그 말에 옆으로 비켜 길을 내주었고, 다나 힐베른이 방 안으로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오늘, 저 때문에 다른 마법사분들이 안 좋게 생각하시게 된 것 같은데.”

“전혀 상관없습니다. 괜찮아요.”

내 말에 다나 힐베른이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은 거 알아요. 저는 어딜 가도 피해만 주는 것 같네요.”

아하, 이제는 외로운 여자 행세를 해서 동정표까지 받아내 보겠다는 건가.

“그렇지 않습니다. 수색대는 다나 힐베른 양의 도움이 필요해서 이렇게 먼 길을 오게 한 거예요. 힘들어하신다면 신경을 더 많이 쓰는 건 당연하죠.”

내 말에 그녀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정말 그것뿐이에요?”

나는 그 말에는 일부러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잠깐 나를 보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냥 물어본 거예요. 그렇게 심각한 표정 안 지어도 좋은데.”

나는 그 말에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서 계시면 다리 아파요.”

다나 힐베른은 그렇게 말하고 자기가 앉아있는 침대 옆을 손으로 툭툭 쳤다.

나는 약간 몸을 굳히고는 조심스럽게 옆에 앉았다.

“수색대 일, 많이 힘든가요?”

“적응이 많이 힘들었죠.”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겠죠. 쿠르스트 산맥의 수색대에 대한 이야기는 유명하거든요. 굉장히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죽도록 힘들 뿐인데.”

내 말에 그녀가 웃으면서 자기 손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봐요.”

잠깐 자기 손을 보여주던 다나 힐베른이 갑자기 내 손목을 잡아 들어 올리더니 자기 손바닥과 내 손바닥을 서로 마주친다.

“당신 손이랑 다르죠?”

“힐베른 양은 마법사이지 않습니까. 산속에서 얼음과 돌 위에서 뒹굴며 온갖 것들과 씨름하는 제 손보다 고운 게 당연하죠.”

“그렇게 딱딱하게 말씀하실 필요없어요.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셔도 돼요.”

“그럴수는…….”

내 말에 그녀가 잠깐 웃은 다음 대답했다.

“그럼 저 먼저 부를게요. 마틴, 수색대는 하이랜더들과 싸울 일이 많죠?”

“아무래도, 그렇죠.”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를 바라봤다.

“책에 써진 내용은 물론 알고 있지만, 직접 마주쳐서 싸워보셨다면 더 많이 알고 계시겠죠. 들려주실 수 있어요?”

아하, 거기부터 기초 공사를 칠 생각인 모양이구나. 심지어 자연스럽게 서로 맞대고 있던 손을 잡은 채 침대 위에 둔다.

참 여러 가지로 애쓰는구나. 나는 순순히 내가 경험해본 하이랜더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고, 다나 힐베른은 그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면서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본다.

그렇게 1시간 정도 지났을까. 다나 힐베른이 입을 열었다.

“아 맞아요. 하이랜더들은 죽어도 시체가 남지 않는다고 하던데. 직접 보셨나요?”

나는 그 말에 음, 하는 소리를 냈다.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머, 무덤 이야기도 해주셨잖아요. 다들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저는 그런 전설들에 관심이 많거든요. 혹시 모르잖아요? 위치를 알게 되면, 찾아낼 수 있을지도. 두근거리지 않아요?”

이 아가씨야, 나 같으면 이런 식으로 하루에서 이틀 정도는 더 공사를 치고 이야기를 꺼냈을 거다. 뭐, 그래도 접근 방법은 썩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65점 정도 줄게.

“그게…….”

내가 잠깐 난처해 하는 기색을 표하자 다나 힐베른이 옆으로 바짝 붙어서는 잡고 있던 손을 꼼지락거린다. 일부러 저러는 거다.

“왜요?”

나는 그 말에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비슷한 이야기를 수색대의 대장에게도 했었는데,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 귀에 들어가지 않는 편이 좋다고 하더군요. 믿어주는 사람도 적고, 정말로 있다면 전략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물건이라고.”

내 말에 다나 힐베른이 아, 하는 소리를 내고 곧바로 나에게서 약간 거리를 두고, 잡고 있던 손도 놓았다.

“그렇구나. 하지만 나는 이래 봬도 왕궁의 마법사인걸요. 아무나 뽑히는 게 아닌데.”

말을 마치고 다나 힐베른이 약간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또 이해가 되네요. 제가 보여드린 모습이 약간, 미덥잖아요?”

“아, 저기! 그런 건…….”

내 말에 다나 힐베른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계속 어두운 표정을 유지했다. 이 아가씨 제법 하시네. 결국 어떻게 해서든 하이랜더의 무덤의 위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거잖아?

“사실, 이건 개인적인 욕심이기도 해요.”

그리고는 구구절절 다나 힐베른이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엄격하고 어머니는 냉담하고, 외면받고 불쌍하게 자라다가 어떻게든 마법사가 되었지만 그 능력이 시원치 않아서 다른 마법사들과 비교된다. 영지는 왕국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에 혼자 수도로 왔더니 외롭고 의지할 사람도 없다. 어쩌고저쩌고 구시렁구시렁.

나는 불쌍한 들장미 소녀 캔디에요. 라는 식으로 축약할 수 있는 시시껄렁한 이야기다. 물론, 저 이야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다. 사실 진짜라고 해도 내 알 바는 아니잖아.

“그렇군요. 그런 건 전혀 몰랐습니다.”

내 말에 다나 힐베른이 약간 우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저를 배려해준다는 느낌을 정말로 오랜만에 받아봐요. 이전에 언제 누군가 나를 이렇게 챙겨줬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거든요.”

말을 하던 다나 힐베른이 다시 내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냥, 욕심이 나는 것도 맞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혹시라도 제가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무덤의 위치를 찾아낸다면 조금이라도, 다른 마법사들이 저를 다르게 봐주지 않을까 하는 욕심.”

다나 힐베른이 말을 마치고 가까이 붙은 상태에서 내 쪽으로 얼굴을 약간 들이밀었고, 나는 애써 시선을 피하는 척하며 눈을 굴렸다.

“저를 계속 신경 써주신 거, 정말로 수색대의 의무를 다한 것뿐인가요?”

나는 그 말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다나 힐베른이 들이밀었던 얼굴을 약간 뒤로 고개를 돌린 채 중얼거렸다.

“아니라고 대답해줘도 좋은데.”

나는 그런 다나 힐베른을 굉장히 살벌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쯤 되었으면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다. 이 여자는 도리안 대장을 생포해 고문하던 깡통 녀석과 연관이 있다.

“경보 마법진을 설치하는 일정은 꽤 넉넉합니다. 마법사분들이 너무 지치면 안 되니까요.”

내 말에 고개를 돌리고 있던 다나 힐베른이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런가요?”

“에스칼 산머리 일대는 위험하기에 혼자 가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힐베른 양이 저와 몰래 동행해서 제가 추측한 장소들을 둘러보는 것 정도는…….”

내 말에 다나 힐베른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주실래요? 그리고 그냥 다나라고 불러주세요. 마틴. 세 번이나 부탁하게 하지는 않겠죠?”

나는 그 말에 잠깐 우물쭈물하다가 대답했다.

“그럴게요, 다나.”

내 말에 그녀가 웃음을 머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내 뺨을 한 번 쓰다듬었다.

“고마워요. 무리한 부탁이었는데. 푹 주무시고, 우리 내일 또 봐요, 마틴.”

“네, 내일 또 뵙겠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다나 힐베른은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침대에 기댄 채 히죽 웃었다.

“참 애썼다.”

하이랜더의 무덤 좋아하시네. 내가 거기 위치를 어떻게 아냐 병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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