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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34화 (34/275)

034화

그렇게 설원을 돌아다니기 시작한 지 5일 차가 되었다. 다나 힐베른의 특기가 화염 마법이라 그런지, 2일 차 이후부터는 마법을 통해 눈을 녹여서 어떻게든 목욕 비슷한 행위라도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쌓인 피로를 많이 덜어낼 수는 있었지만, 목욕 몇 번 할 수 있다고 해서 싹 사라질 만한 피로가 아니라 그런지 다나 힐베른의 모습은 꽤 수척해져 있다.

“여기가 마지막이죠?”

다나 힐베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꽤 낮은 고도에 위치한 숲속이다. 당연히, 동물들이 돌아다닌 흔적 같은 것도 보인다.

“늑대들이 꽤 많이 돌아다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내 말에 다나 힐베른이 서류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다고 되어있네요.”

“이 동네 늑대들은 덩치도 무지막지하고, 사람이나 불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요.”

과장 조금 보태면 어지간한 동네에 사는 곰 만한 크기다. 사람이 살 만한 땅에는 죄다 그런 것들이 몰려다니며 사냥을 하니, 제정신인 사람들이 쿠르스트 산맥에 주거지를 마련하지 않는 거다.

아마, 우리가 마법진을 설치하려고 들면 몇 녀석들이 슬금슬금 다가와서 '니들이 오늘 우리 점심이니?'라고 물어볼 것이다.

“제가 경계를 하고 있을게요.”

다나 힐베른이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빨리하고, 도울게요.”

그리고, 우리가 마법진을 설치하기로 정한 지역 근처로 다가가자, 근처의 숲속에서 뭔가가 투다닥하며 뛰어다니는 소리가 난다. 다나 힐베른이 잠깐 움찔한다.

“괜찮습니다.”

지들이 무서워 봤자 하이랜더만큼 무섭지는 않다. 다나 힐베른이 바닥에 찍혀 있는 발자국을 보고는 약간 안색을 굳혔다.

“발자국이…….”

사람 손바닥보다 크지? 원래 이 동네 특징이야. 위험한 녀석들은 죄다 커. 그 사이 수풀에서는 또다시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일단 여섯 마리네.”

하긴, 기껏해야 사람 두 명 무게 정도의 먹거리밖에 없는데 초장부터 삼십 마리씩 달라붙지는 않겠지. 다이어트 중이라면 모를까.

“믿고 있을게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수풀이 일렁거리는 모습을 살펴보며, 나는 투창기에 작살을 끼워 집어 던졌다. 깨갱! 하는 외침과 함께 수풀에서 뭔가가 확 하고 튀어나온다.

등짝에 작살이 쑤셔박힌 녀석이 피를 줄줄 흘리면서 안광을 번들거린다.

“개새끼 꼬라보긴.”

칼을 뽑아 든 나는 다나 힐베른을 보고 턱짓을 했다. 뭐해, 빨리 설치해. 내 몸짓을 알아들은 다나 힐베른이 정신을 차리고 바로 경보 마법의 설치를 시작한다.

“시간은?”

“여기는 돌아다니는 생물이 많아서 걸려있는 조건이 꽤 많아요. 30분 정도는 필요한데.”

30분이라.

“알았어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그 사이 작살이 꽂혀서 열이 잔뜩 받은 늑대가 나를 향해 덮쳐들었다.

분신이 나타나 녀석의 턱주가리를 후려친다. 그사이 나는 검을 휘둘러 녀석의 앞다리 하나를 썰어내고 크게 벌어진 늑대의 아가리 속으로 검을 밀어 넣었다.

깨갱!

입 안에 칼이 쑤셔박힌 늑대의 동공이 흐려진다.

시체에서 칼을 뽑아낸 나는 발로 밀어서 시체를 옆으로 치우고 말을 이었다.

“천천히 하세요. 서두르다가 실수하면 다시 해야 하잖아요?”

그 와중에 저 멀리에서 늑대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 상황을 보아하니 여섯 마리로 소화하기에는 좀 빡세다는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몇 마리가 와도 똑같아 이 자식들아. 못 먹는 음식에 미련 버리고 가지?”

그 사이 뒤편에 서 있는 다나 힐베른을 중심으로 희미하게 붉은빛이 감도는 마법진이 바닥에 그려지기 시작한다. 저게 완전히 그려지고, 색이 진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

쿠르스트 늑대들의 움직임은 언제나 똑같다. 주변을 빙빙 돌면서 포위하고 빈틈을 만든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곧바로 달려들어 숨통에 이빨을 박아넣는다.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목표의 시선을 붙잡아두면, 그사이 다른 녀석들이 슬쩍 뒤로 돌아가서 눈앞의 위협에 정신이 팔린 먹이를 끝장낸다.

남아있는 두 개의 작살 중 하나를 투창기에 끼운 나는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멍.”

나는 그런 소리를 내며 분신을 만들어내 눈앞에서 으르렁거리며 시선을 붙잡아두는 늑대 중 한 녀석의 턱주가리에 칼을 박아넣는다.

그 즉시, 그 옆에서 함께 이를 드러내고 있던 늑대들이 분신에 달려들었지만 놈들의 목표물은 이미 사라졌다. 그리고, 돌진의 목적을 잃은 늑대들이 순간 서로 뒤엉킨다.

“후우.”

심호흡과 함께 전신에 마력을 돌리고, 곧바로 창을 던진다. 날아간 작살이 두 마리의 머리통을 꼬치구이처럼 꿰어버렸다. 좋아, 세 마리 끝났고.

뒤편을 돌아보니 번뜩이는 안광이 수풀 사이에 숨어 다나 힐베른을 노린다.

“어딜 감히!”

그 여자는 아직 죽일 생각 없어. 집어 던진 칼이 쒜엑, 하는 파공음을 내며 다나 힐베른을 노리던 늑대의 마빡에 박혀 들었다.

내 손에 무기가 없어진 걸 확인한 늑대 한 마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수풀에서 팍 하고 튀어나와 나를 향해 달려든다.

“그래, 거기 있는 거 알고 있었다.”

분신이 나타나 시체에 박힌 칼을 뽑아내 나에게 달려드는 늑대를 향해 던진다. 마찬가지로 칼날을 향해 헤딩한 늑대의 숨통은 그대로 끊어졌다.

칼을 뽑아낸 나는 잠깐 주변을 살펴보다가 시체를 칼로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저기…….”

다나 힐베른이 내 행동을 보고 약간 의문을 표한다.

“이걸로 안전할 겁니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늑대는 코가 좋거든요.”

용량이 작다고 하지만 뇌가 없는 건 아니니까. 쉬운 다른 먹잇감 남겨두고 굳이 동족 피 냄새가 흘러넘치는 곳으로 오지는 않는다.

“다른 곳에 신경 쓰지 말고, 마법진.”

내 말에 다나 힐베른이 다시 마법진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마법진이 완성되고, 서서히 색이 짙어지기 시작한다. 잠시 뒤, 다나 힐베른이 후우, 하는 소리를 냈다.

“끝났어요. 이걸로 완성이네요.”

나는 그 말에 아하,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럼 이제 경보 마법 설치는 끝난 거다. 나중에 책임을 묻게 될 수도 있으니 마법진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장난을 쳤을 리는 없고.

“…….”

하기로 결정한 일을 뒤로 미루는 성격은 아니다.

나는 내가 서 있는 자리에 허상을 만들고, 은신을 써 몸을 감춘 채 다나 힐베른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저기, 마틴?”

왜 불러.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녀의 뒤통수를 검 손잡이로 내려찍었다.

“커……허…….”

다나 힐베른은 그런 단말마와 함께 기절했다. 허상을 지운 나는 기절한 그녀의 몸을 밧줄로 묶은 다음, 그대로 짊어졌다.

이제 해줘야 하는 일은 다 끝났으니, 오붓하게 이야기 좀 나눠 보자고 아가씨. 그녀를 짊어진 나는 곧장 몸에 마력을 돌린 채 달리며 안전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인적이 드문 곳이지.

* * *

“일어나.”

다나 힐베른은 얼굴에 확 부어진 차가운 무언가에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에 쌓여있던 하얀 눈이 부스스 떨어진다.

“이건…… 저기, 마틴?”

다나 힐베른은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삭막한 절벽 근처의 작은 공터였다. 그녀는 밧줄에 묶인 채 마틴을 마주보고 있었다.

“마틴은 개뿔.”

눈앞의 남자는 기절하기 전과는 완전히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검 끝은 정확히 다나 힐베른의 손등을 겨누고 있다. 다나 힐베른의 시선이 거기에 닿고, 안색이 하얗게 질린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

진정해야 한다. 다나 힐베른은 떨리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 짜내며 마틴을 바라봤다.

“다나 힐베른.”

마틴 레드우드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그녀의 목으로 손을 뻗었다. 목을 잡은 마틴이 입을 열었다.

“뭐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어. 조금 불편해도 참아.”

목이 졸리는 느낌에 긴박감이 차오른다. 다나 힐베른이 침을 삼키고 입술을 떨며 말했다.

“왜 이러는 거예요. 당신,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뭘 하려는 거지. 다나 힐베른이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리고 급하게 말했다.

“뭐든지 괜찮아요. 저, 당신이라면 괜찮다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말고…… 네? 부탁이에요, 조금만 상냥하게 해줘요. 이런 건 싫어…….”

일단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틴의 표정은 살벌하다.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몸 정도는 내줄 만하다, 그런 계산과 함께 꺼낸 다나 힐베른의 말에 마틴이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아가씨 몸뚱어리에 뭐하러 관심을 가져?”

그게 아니야? 다나 힐베른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을 크게 뜨고 마틴을 바라봤다. 마틴이 쥐고 있는 칼날이 툭, 하고 그녀의 손등에 박힌 카넬리안을 건드렸다.

“로티샤 호수, 그리고 에스칼 산머리에서 일어난 수색대의 납치. 너도 관련되어 있지?”

그 말에 다나 힐베른은 자기도 모르게 약간 입을 벌렸다. 그리고, 이내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예…… 아아아악?!”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틴은 손을 뻗어, 다나 힐베른의 검지를 손등 쪽으로 확 꺾어버렸다. 으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검지가 180도 꺾여 손등에 닿았다.

“내가 인내심이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야. 다나 힐베른. 개수작 부리지 말고, 곱게 대답하는 게 좋아.”

엄포를 놓은 마틴은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은 채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곱게 말하는 편이 좋아. 아가씨처럼 모르쇠로 일관하던 녀석들, 나중에는 다들 크게 후회하거든. 마음만 먹으면 아가씨가 알몸으로 게다리춤을 추게 만들 수도 있어.”

말을 마친 마틴은, 꺾어버린 검지를 놓은 다음 그녀의 중지를 꽉 움켜잡았다.

“뭘, 뭘 원하는 건지는 알려줘야지 저도 대답을 할 거 아니에요!”

그 말에 마틴은 아하, 하는 소리를 냈다.

“질문 말이지?”

“아아아악!”

그리고, 다시 한번 뿌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중지가 꺾였다. 그 격통에 다나 힐베른의 눈앞에 별이 번쩍인다.

“질문을 하면 대답이 한정되지. 대답을 한정할 수 있으면 사람들은 수작을 부리기 마련이고.”

말을 마친 마틴이 꺾인 중지를 놓고 그녀의 뺨을 한 번 쓰다듬었다. 손이 닿자, 다나 힐베른의 몸이 부르르 떨린다.

“전부 말해. 그리고, 나한테 이래 달라 저래 달라 요구하지마.”

처음부터 잘못되었던 모양이다. 두 개의 손가락이 꺾인 다나 힐베른의 머리가 마침내 그런 결론을 내렸다. 이 남자, 전혀 자신에게 반해있지 않았다. 오히려, 반했다고 착각하게 만든 거다.

“너, 하이랜더의 무덤의 위치를 안다는 것도 거지이이이잇?!”

꺾인 다나 힐베른의 검지, 그 손톱 밑으로 자신의 손톱을 집어넣은 마틴이 그대로 손톱을 들어 올려 뜯어내며 중얼거렸다.

“칼자루 쥔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꺼내야지. 하고 싶은 말을 꺼내면 쓰나. 그치? 곱게 협조하는 게 좋을 거야. 이 왼손 하나 가지고 최소 두 시간은 재밌게 놀 수 있거든.”

허억, 허억 하며 숨을 몰아쉬는 다나 힐베른이 눈물이 맺힌 얼굴로 마틴을 노려본다.

“개같은 새끼! 어차피 죽일 생각이겠지? 죽을 거 알면서 내가 말할 것 같아?!”

마틴이 다나의 말에 웃음을 흘렸다.

“아, 멋대로 뽑아버려서 미안해. 다시 돌려줄게.”

뜯어져 나간 손톱 끝이, 피가 흘러내리는 다나 힐베른의 검지 밑 살에 깊게 박혀 든다. 사지가 묶인 채 다나 힐베른은 몸을 뒤틀었다.

그렇게 이어진 두 시간. 마틴은 자신의 말을 지켰다. 그가 망가뜨린 건 다나 힐베른의 왼손뿐이었다.

“그만, 그마안!”

그리고 그걸로도 충분했다.

다나 힐베른의 외침에 마틴이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만하길 원하면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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