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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35화 (35/275)

035화

다나 힐베른의 굴복은 꽤 빠른 편이었다. 그래도 오른손까지는 넘어가야 할 줄 알았는데.

“나는…….”

그리고 다나 힐베른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다 순순히 털어놓는 기색을 취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말을 가만히 들으면서 가끔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30분 정도 지난 다음 나는 다나 힐베른을 보며 웃었다.

“자, 다시 처음부터 말해봐.”

내 말에 다나 힐베른의 표정이 변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다 말했잖아.”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들었어. 다나 힐베른. 그러니 다시 처음부터 말해보라고.”

저 여자가 한 말은 전부 기억하고 있다.

“네가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다시 말해도 같은 이야기를 하겠지? 만약 내가 기억하는 이야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다나 힐베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진다.

“어쩔 수 없이 아가씨의 손이랑 다시 시간을 보낼 수밖에.”

내 앞에서 개수작 부리지 말라니까. 이런 짓을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닌데. 다나 힐베른이 더듬더듬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나는 로즈밸리 마을에서…….”

“아니, 방금 했던 말이랑 틀린데.”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손가락에 박혀 있는 손톱을 꾹 눌렀다. 간질이라도 도진 것처럼 몸을 떨며 비명을 지르던 다나 힐베른의 입에서 다른 소리가 나왔다.

“미안, 미안해! 거짓말이었어!”

나는 그 말에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솔직하게 말했네. 착하기도 하지. 그럼 다시 시작할까.”

다나 힐베른은 다시금 입을 열어 새로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나는 칠색 내각의 구성원 중…… 적색의 아래에서 일하고 있어.”

칠색 내각이라. 적색이라고 말한 걸 보면 다른 색깔들이 더 있는 모양이다. 아마, 회사로 치면 임원진 같은 녀석들이겠지.

“몇 명이나 있는지 말해.”

“무지개, 무지개랑 똑같아.”

빨주노초파남보. 일곱빛깔무지개라. 나는 그 말을 듣고는 별다른 표정 변화를 보이지는 않았다.

“아래에서 일하고 있지만, 칠색 내각에서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일을 벌이는지는 몰라.”

나는 그 말에 아하, 하는 소리를 내고 그녀의 얼굴 앞에 내 얼굴을 들이밀고 눈웃음을 지었다.

“몰라?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인데.”

“정말이야, 정말로 모른다고! 나는 그냥 아래에서 일하는 대가를 받고 있을 뿐이야. 믿어줘!”

다나 힐베른은 내 중얼거림에 발작적으로 반응하며 애원한다. 나는 그런 다나 힐베른을 보다가 약간 얼굴을 멀어지게 하고 말했다.

“계속해.”

칠색 내각 아래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은 그들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며, 그 대가를 받는다.

다나 힐베른의 경우는 후작가의 정실 아내로 들어가는 것과, 연구에 필요한 자금과 자료를 약속받았다고 한다.

“고작 그걸로?”

내 말에 다나 힐베른이 하도 비명을 질러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후작가의 정실 아내로 들어간 다음 내가 아이를 임신하면 남편과 시아버지는 죽을 예정이었어. 받기로 한 자금도 엄청나고, 자료도 아무 곳에서나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고.”

다나 힐베른이 그렇게 중얼거리고 몸을 떨었다.

“왕국 후작가의 장남과 가주를 아무렇지 않게 죽이고, 막대한 자금과 구하기 힘든 자료를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 마틴 레드우드, 네가 지금 어떤 사람들을 건드리는 건지…… 알아?”

“말은 똑바로 하자.”

내가 건드렸냐? 지들이 먼저 시비를 걸었지. 멋대로 남의 가문 가보를 훔쳐 가려고 하질 않나.

꼼짝없이 국경 수비대로 끌려가는 바람에 빨리 전역하려고 노력하는데 갑자기 소속된 부대 대장을 납치해서 고문하질 않나.

지들이 선빵쳐놓고 같이 때리니까 왜 때리냐고 화를 내고 있네. 미친 사람인가.

“계속해.”

내 말에 다나 힐베른이 흐윽, 하는 소리를 내고는 말을 이었다.

“하이랜더의 무덤을 찾다가, 실패했지. 이후 적색은 나에게 지시를 내려 에스칼 산머리에 경보 마법을 설치하는 일에 자원하라고 했어.”

그리고, 원래 계획은 당연히 틈을 봐 도리안을 구워삶은 다음, 하이랜더의 무덤 위치를 알아내려고 했을 것이다.

“거기에서 네가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꺼냈고…… 계획을 바꿨지.”

“썩 좋은 판단은 아니었어, 그렇지?”

내 말에 다나 힐베른은 침묵했다. 뭐, 상관없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이 여자 왼손을 걸레짝으로 만드는 게 피를 보면 좋아 미쳐서 하는 일은 아니니까.

이렇게 하지 않아도 순순히 말한다면 이런 일을 벌이지 않는다. 방법이 이거 말고 없으니 선택한 거다.

“자, 그럼 어디에 쓰려고 했던 건지도 말해줘야지.”

내 말에 다나 힐베른이 대답했다.

“무덤의 시체들.”

그래, 도리안도 그 시체들의 가치에 대해서 말했다. 한 나라의 군대 정도는 모두 무장시키고도 남을 막대한 시체가 가진 전략적 가치.

“적색은 그 시체를 강령술을 통해 사역할 생각이었어.”

잠깐. 이건 내 예상과 다른데.

그래 뭐. 기사와 마법사가 있는 세상이니, 네크로맨서가 있어도 엄청나게 신기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되살아난 하이랜더의 시체는 당연히 엄청나게 강하겠지.

“그래서, 적색이라는 녀석은 누군데?”

이 녀석이 빨갱이인지 적색인지 하는 녀석 아래에서 일하고 있었다면, 최소한 그 녀석에 대해서는 뭔가 알고 있어야 한다.

“나 같은 말단은 몰라…….”

이 몰라는 아까의 몰라와 다르다. 그냥 넘어가기 힘든 몰라다. 한숨을 쉰 내가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하자 다나 힐베른이 눈을 질끈 감고 있다가 외쳤다.

“군대, 내가 알고 있는 건 그게 전부야! 왕국의 군대에서 굉장히 중요한 직책을 담당하고 있을 거야!”

대답을 들은 나는 주머니에 여전히 손을 넣은 채 입을 열었다.

“근거는?”

내 말에 다나 힐베른이 후우, 하고 숨을 내쉬고 입술을 떨었다.

“보고를 하는 와중에 얼핏 들었어. 왕국군 편성에 대한 이야기였어. 그리고, 사용하는 단어도…….”

쭉 이어진 소리를 들어보니, 다나 힐베른의 추측이 완전히 헛소리는 아닌 걸로 보였다.

“좋아 그럼…….”

이 아가씨에게서 얻을 만한 건 거의 다 얻은 것 같다.

“…….”

다나 힐베른이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제발, 제발…….”

그렇게 애원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지.

“너 뭐 하는 새끼야.”

뒤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내가 손에 쥐고 있던 검 주변이 일렁거리더니, 들고 있던 검이 튕겨 나가 벽에 쑤셔 박히고, 내 몸이 붕 떠서 바닥에 퍽 처박혔다.

가까스로 고개를 든 나는 공격한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크흐. 엘렌 리버플로우?”

이 시점에 여기에 왜 저 여자가 있는 거야. 바닥에 처박힌 나를 바라보는 엘렌 리버플로우의 표정은 영 좋지 않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리버플로우 양, 물론 방금 전의 장면은 오해하기 충분한 상황이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사실, 누가 봐도 오해할 것이다. 여자는 꽁꽁 묶인 채 왼손이 걸레짝이 되어있고, 나는 그 과정에서 튄 피가 얼굴에 묻어있다.

이런 장면을 보고 '뭐지, 나 빼놓고 파티하나?' 같은 생각을 할 사람은 없잖아.

아무리 그래도 오해하기 전에 내 말부터 한번 들어보지 않을래?

하지만, 엘렌 리버플로우는 여전히 나에 대한 적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만약을 생각해서 추적 마법을 걸어놓길 잘했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다나가 엘렌을 보고 외친다.

“엘렌, 미안해요! 당신 말이 맞았어요! 저 남자는 악마야!”

잘돼간다. 기회를 타는 데 성공한 다나 힐베른은 여태 동안 당했던 일에 대한 복수라도 하려는 것처럼 엘렌에게 내가 얼마나 개새끼인지 전력을 다해 어필하기 시작했다.

“몸은 괜찮아?”

다나 힐베른과 엘렌 리버플로우는 서로 아는 사이다. 일이 점점 더 안 좋게 돌아가는군. 다이아몬드가 박힌 엘렌의 손은 여전히 나를 향해있다.

언제든지 수상한 짓을 하면 날려버리겠다고 말하는 것 같다.

“저기.”

“듣고 있어. 한 번 씨부려 봐.”

그나마, 정말로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엘렌 리버플로우가 최소한 내 말을 들어 줄 용의는 있어 보인다는 점이다.

말투는 반말이긴 하지만, 이 풍경을 보고 나서도 존댓말이 나오면 그게 이상한 사람이지. 이해한다.

“엘렌, 저 남자는 제 손을 이렇게 만들었어요. 저는…… 저는 세 시간이 넘도록 살려달라고, 그만하라고 비명을 질렀는데도! 무슨 이야기를 듣겠다는 거예요?!”

그렇겠지, 엘렌이 내 말을 들을 용의가 있다는 건 나에게는 다행인 점이지만, 다나 힐베른에게는 전혀 좋은 소식이 아니니까. 아예, 내 이야기를 듣지도 않게 만들고 싶은 모양이다.

“내가 한 일이긴 하지만 사람 왼손을 저 꼴로 만들어 놓았는데 아무런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 말에 다나가 다시 한번 발악한다.

“너에 대한 소문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어! 심심풀이로 사람 목을 조르는 미친놈!”

아하, 여기에서 또 내가 한 적도 없는 과거의 이야기가 내 주장의 신뢰도에 손상을 주네.

일단, 만약을 대비해서 무기는 있어야겠지. 분신을 만들어 놓친 검을 주워 내 쪽으로 던졌지만.

“그렇게 둘 수는 없어.”

나를 향해 던져진 검은 무언가에 후려쳐진 것처럼 튕겨 다시 벽에 박혔다.

“……이 살벌한 분위기에 맨몸으로 서 있으라고?”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면 좋겠는데. 별로 마음에 안 들어?”

“썩 기분이 좋지는 않네.”

말을 마친 나는 후우, 하고 심호흡을 했다. 눈앞의 엘렌 리버플로우가 어느 정도의 마법사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마법사들의 마법은 하이랜더에게 제대로 된 피해를 주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여자의 마법은 분명히 먹혀들었다. 실력자라는 뜻이다.

아마, 한두 마리 정도의 하이랜더였다면 혼자서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겠지.

게다가, 엘렌이 나를 공격하기 시작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다나도 나를 향해 마법을 쏟아낼 거다. 1대1도 자신이 없는데 1대2 상황이 된다면…….

오늘 여기에서 치운다고 생각했던 시체가 다나 힐베른의 시체가 아니라 내 시체가 된다.

“엘렌…… 으윽.”

그 사이, 다나 힐베른은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밧줄을 마법으로 태워버리고 엘렌의 옆에 서서 작게 신음했다.

“쉬고 있어. 마틴 레드우드는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상처가 심하잖아.”

다나 힐베른이 그 말에 처연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상처는 괜찮아요. 하지만,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저에게 이렇게 극악무도한 짓을 하다니. 당하면서도…… 믿을 수가 없어서.”

듣고 있으려니 절로 코웃음이 흘러나오려고 한다. 다나 힐베른이 저렇게 감정에의 호소를 반복할수록 지금 이 상황에서 엘렌이 나를 공격할 확률이 올라간다.

빨리 뭔가 방안을 찾아내야 하는데.

그 와중에 내 시선에 잡힌 것은 엘렌과 함께 챙겨왔던 배낭이다.

“리버플로우 양. 다나 힐베른 양의 배낭은 확인해 보셨습니까?”

내 말에 우선적으로 반응한 건 다나 힐베른이었다.

“가방?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엘렌의 말에 나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다음 그녀를 바라봤다.

“제가 이유 없이 다나 힐베른에게 그런 잔학무도한 짓을 한 건 아닙니다. 가방을 열어서 확인해 보시면 이해할 겁니다.”

내 말에 엘렌이 슬쩍 다나 힐베른을 바라봤다.

“설마, 저 말을 믿으시는 거예요? 엘렌, 당신을 방심하게 하려는 거에요.”

나는 그 말에 양손을 들어 올렸다.

“묶어놓고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엘렌이 내 쪽으로 서늘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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