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36화 (36/275)

036화

양손을 들고 있던 나는 위에서 내리누르는 힘에 퍽, 하고 무릎을 꿇었다.

“밧줄로 묶다니, 마법사는 그런 짓 안 해.”

“크으…….”

그리고 한 번 더, 나를 내리누르는 힘이 강해져서 나는 바닥에 그대로 엎드려야 했다.

“다나, 배낭을 한번 보여줄래?”

“엘렌! 우리가 알고 지낸 지 3년이 지났어요, 지금 설마 제 말보다 저 극악무도한 또라이 말을 믿는 거예요?”

엘렌은 다나를 향해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건다.

“다나, 물론 나는 너를 믿고 있지. 하지만 여기에서 내 결정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보면, 단순한 믿음만으로는 부족해.”

그 말을 들은 다나 힐베른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엘렌을 향해 자신의 왼손을 내민다.

“이걸로 부족하다고요?! 지금, 그게 할 말인가요?”

내가 걸레짝으로 만들어 놓은 손을 바라보는 엘렌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뿐이었다. 엘렌이 이내 눈을 살짝 가늘게 뜨고 다나를 바라본다.

“……미안. 하지만, 배낭만 건네주면 빠르게 끝날 일을 이렇게까지 감정적으로 나오는 이유를 잘 모르겠어.”

엘렌의 말에 입을 잠깐 벙긋거리고 있던 다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동시에 내 몸을 억누르고 있던 정체불명의 힘이 서서히 옅어진다.

다나를 의심하고 있는 거다.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만, 나는 가만히 엎드린 상태를 유지했다.

“네가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지?”

다나의 입에서 반말이 튀어나오고, 순간적으로 엘렌이 움찔한다.

“다른 마법사들은 네 말이라면 대부분 설설 기잖아.”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다나.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뭔지 말해줄래?”

엘렌의 말에 다나 힐베른이 오른손을 꽉 쥐었다.

“네가 뭔가 하겠다고 하면 왕국에서는 지원금을 주지 못해서 안달이고, 마법사들은 똥꼬라도 핥을 기세로 달라붙어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으려고 안달복달하잖아?”

뭐야, 고해의 시간인가. 한 번 쓰고 있던 다정한 우정의 가면을 벗은 다나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렌이 눈살을 찌푸린다.

“그걸 또 그렇게 해석해버리면 곤란한데.”

“그 사이, 정말로 지원이 필요한 나 같은 사람들은 뒤로 밀려버리지.”

엘렌이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저기, 네가 마틴과의 동행을 허락해달라고 애원할 때, 내가 제안했던 건 까먹었어?”

뭔가 둘 사이에 오간 이야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뭐, 평생 니 아래에서 잡일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라고?”

“아, 망할. 미치겠네. 너 사람이 존나 꼬였다?”

엘렌의 입에서 점점 험한 말이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휙 하고 엘렌 쪽으로 다나의 배낭이 던져졌다.

“그렇게 궁금해? 좋아, 확인해 보든가.”

다나 힐베른이 앞에 떨어진 배낭을 집어 들려다가 움찔한다.

“이건.”

배낭을 바라보던 엘렌의 표정이 굳었다.

“어떤 미친놈이 배낭에 이런 살벌한 마법을 걸어? 다나, 네 배낭을 열어보려고 한 것이 죽을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엘렌의 말에 다나는 별 반응이 없다. 그리고, 그 배낭을 확인한 것을 기점으로 내 몸을 억누르던 압박이 완전히 사라졌다.

좋아, 이 시점에서 엘렌이 내 말을 믿기로 결정을 내린 모양이다. 그럼, 믿어준 보답을 해야겠지.

엘렌이 손을 들어 올리자 다이아몬드가 살짝 빛나고, 배낭 주변을 감싸고 있던 마법진들이 모습을 드러낸 다음, 유리창이 박살 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흩어졌다.

“…….”

배낭 안에서 튀어나온 건 작은 술잔이었다. 그리고, 잠깐 그걸 바라보던 엘렌이 술잔을 바닥에 집어던지고 뒤로 한발 물러났다.

“다나 힐베른, 이 미친년.”

“오, 엘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그냥, 우연히 주웠을 뿐이랍니다.”

다나의 놀리는 것처럼 빈정거리는 연기에 엘렌이 침을 삼킨다.

“어린아이의 피와 어린 소녀의 성대. 고작 원격 통신을 위해서?”

다나가 웃음을 흘린다.

“수정구는 좀 구리잖아? 엘렌, 너도 수정구의 효용성을 비판하는 논문을 썼던 것 같은데.”

“사람 성대를 뜯어내는 식으로 대체하자는 말은 없었어!”

그걸로 끝이었다. 엘렌이 손을 꽉 쥐자, 서 있는 다나 주변의 공간이 확 일그러진다.

“조금 더 힘내봐 엘렌. 왕국에서 그렇게 물고 빠는 인재가 이 정도밖에 힘을 쓰지 못해?”

다나 힐베른의 오른손에 박혀 있는 카넬리안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그녀를 감싼다. 피처럼 질척이며 흘러내리는 짙은 적색의 불쾌한 빛이다.

“진홍의 사수. 열 개의 시위는 붉게 흘러내리는 나의 색을 머금고 날아라.”

시뻘건 액체들이 화살의 형상을 갖추고 엘렌을 향해 쏟아진다.

“좋아, 이제 일해볼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바로 튀어 나가 엘렌을 향해 쏟아지는 붉은 화살을 튕겨냈다.

그리고, 다나 힐베른이 웃음을 터뜨리며 걸레짝이 된 왼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얼굴을 슥 쓸어내렸다.

“그래, 네 녀석도 있었지. 3일은 괴롭혀줄게.”

“자신감 넘치는 모습 좋네. 처음부터 그렇게 나오지 그랬어. 오히려 지금이 더 매력적인데?”

그랬으면 정말 반했을지도 모르는데.

“카넬리안. 연결점으로 쓰게 되면 피 또는 불꽃이었지?”

엘렌의 중얼거림을 들은 다나 힐베른이 내 말은 싹 무시하고 그 말에 반응한다.

“그래, 꼭 너처럼 연결점을 두 개 박아야 이중 속성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야, 엘렌.”

나는 그 말에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엘렌은 양손에 보석이 박혀 있다. 아무래도 꽤 드문 재능인 모양인데.

하긴, 심장에 구심점을 박아넣은 기사들도 한 번에 두 가지 능력을 가지기는 힘들다고 했잖아.

마법사라고 크게 다를 건 없는 모양이다.

“일해라!”

엘렌이 손을 휘두르자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일그러지고,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다나의 몸을 감싸고 있던 붉은 기운이 한 번 크게 휘청거렸다.

그 틈을 타, 나는 다나 힐베른에게 쏘아져 나갔다.

“소용없어. 속여 덧쓰고 섬겨라, 타오르는 유황불 속에 붉게 흘러내리는 나의 색.”

주르륵, 흘러내린 짙은 적색의 기운이 눈 위에 내려앉고,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질퍽거리는 덩어리들이 솟구친다.

― 그윽, 허.

눈 속에서 튀어나온 시뻘건 점액질은 서로 뭉쳐 단단한 금속질의 광택을 머금고, 우리를 향해 누런 안광을 비추며 나를 노리고 거대한 주먹을 휘두른다.

“이거 참.”

눈 위를 내려찍은 거대한 괴물의 주먹이 유리처럼 박살 나며 날카롭게 깎여나간 금속 파편을 쏟아내며 대지를 할퀸다.

당장 뾰족한 방안이 없는 나로서는 파편이 휩쓸고 지나가는 자리를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악, 후우. 사방에서 울려 퍼져 만방으로 닿아라. 나의 목소리.”

다나 힐베른은 이걸로 끝낼 생각이 없다는 듯이 숨을 몰아쉬면서 계속 입을 놀린다. 다나 힐베른의 몸 주변에 뭔가가 둥둥 떠오른다. 떠오른 내용물을 확인한 나는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저건, 성대잖아.”

다나 힐베른은 지친 표정으로 입가를 훔치고 웃음을 띤 채 우리를 바라본다.

― 목소리는 더욱 붉게. 석양을 좀먹어 덧칠하고.

― 생명을 머금었던 기억을 선명히. 안식의 고리를 끊어라.

― 무릇 선포하니, 침묵하여 삼가라. 내려앉은 왕관에 권능 있음이라.

공중에 떠오른 성대들로부터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공중에 떠오른 성대 중 같은 대사를 하는 녀석은 하나도 없었다. 모든 성대가 동시에, 자기 할 말 만을 떠들 뿐이다.

“저건.”

엘렌은 잠깐 당황한 표정을 지은 다음, 이내 왼손을 들어 올렸다. 손등에 박힌 금록석에서 녹빛과 적빛이 함께 떠오른다.

“소용없어 엘렌. 알잖아? 이런 식으로 시작된 소환…… 아니구나. 초대는 멈추지 않아.”

다나 힐베른의 말에 엘렌이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미안하지만, 의식이 끝난 다음 튀어나온 녀석을 역소환할 수는 있어.”

“말이 쉽지. 그게 얼마나 걸릴까?”

다나의 말에 엘렌이 잠깐 눈살을 찌푸린 다음 이내 표정을 피며 웃었다.

“걱정 마, 아무리 천천히 해도 너보다는 빨리 끝낼 수 있으니. 학습장애 걸린 지진아 년아.”

워우, 말 심하게 하는데? 다나 힐베른은 그 말이 어지간히 상처받은 모양이다.

“그 아가리로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꼴을 못 봐서 아쉽네.”

“염병도 그쯤 하면 말기구나.”

엘렌이 바닥에 침을 뱉은 다음 나를 바라봤다.

“역소환을 시작하면 나는 움직이지 못해. 협조를 부탁하고 싶은데.”

“버텨달라고?”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이렇다니까. 어려운 일은 항상 내 몫이야.

“협조하지.”

별수 없잖아? 검을 들어 올린 나는 다나 힐베른을 바라봤다. 그녀의 가슴팍 부근에서 두궁, 두궁, 하는 둔중한 소리와 함께 뭔가가 꿈틀거리는 게 보인다.

“그냥 지금 죽여버리면 안 되나?”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저년은 조만간 시체야. 죽는다고 해도 소환은 취소되지 않을 테고.”

쓸데없이 힘 빼지 말라는 건가.

“좋아, 뭐가 튀어나오는 건데?”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저었다.

“몰라, 이런 식의, 마법사의 능력을 벗어난 막무가내 소환은 응한 녀석이 튀어나와야 알 수 있거든.”

그게 뭐야. 결국 지켜보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못 한다는 건가. 나는 잠깐 그 광경을 보다가 만약을 대비해 입에 피리를 물고 신호를 보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오는 데 몇 시간은 걸릴 테고, 그 사이 상황은 어떤 형태로든 종료되겠지만…….

나와 엘렌이 둘 다 싸움이 끝나고 뻗어버리면 이 냉막한 산골짜기에서 나란히 얼어 뒤질지도 모르니까.

“카하아악……!”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다나 힐베른의 가슴팍이 퍽 하고 뜯어져 나가고, 피와 함께 부서진 뼛조각이 흘러내린다.

“미친.”

저런 상황을 각오할 수 있는 정신력이 있는데 왼손 가지고 3시간 놀았다고 질질 싼 거야? 뭐 하는 녀석이야 도대체. 당사자도 이런 걸 예상하지는 못했는지 눈을 크게 뜨고 발악적인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비명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우드득, 끄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나가 구멍이 뻥 뚫린 가슴팍의 살점과 뼈가 꿈틀거리더니, 작은 구슬 하나가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다나 힐베른의 시체는 잡아 먹히기라도 한 건지 보이지 않는다.

“크으.”

매캐한 냄새와 함께 타오르는 불티가 뒤섞인 검은 연기가 온몸을 후려치고 지나간다.

족히 수천 년은 녹을 일이 없었을 쿠르스트 산맥에 쌓인 만년설이, 바닥에 떨어진 구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 이름.

휘몰아치던 매캐한 연기와 불티가 잦아든 자리에는 적갈색 피딱지가 한가득 엉겨 붙은 갑주를 두른 해골이 머리 위에 화염을 올린 채 서 있다.

― 그대들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도록.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엘렌이 급하게 외쳤다.

“대답하면 안 돼!”

불티를 질질 흘리며 연기에 휘감긴 해골의 지시와 사지 멀쩡하게 붙어있는 마법사의 조언.

둘 중에 어떤 것을 듣는 편이 신상에 좋은지는 굳이 이성으로 판단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당연히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 떳떳하게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영겁의 고통을 감내하겠다면, 그 또한 존중하지.

해골이 옆으로 손을 뻗자, 불티를 머금은 연기가 녀석의 손을 타고 뭉쳐나가기 시작한다. 만들어진 것은 무지막지한 대검의 형상을 하고 있는…… 숯이었다.

표면은 검게 말라붙었지만, 그 검게 말라붙은 껍데기 아래에 억눌려 있는 지독한 열기를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숯의 검은 표면이 살짝 갈라지자, 시뻘건 화염이 순간적으로 혀를 날름거리고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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