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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37화 (37/275)

037화

해골은 나를 바라봤다. 원래는 눈알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하는 검은 공동이 나를 주시하더니 입에서 확 하고 연기 섞인 불티를 한 번 뿜어낸다.

― 심장 속에 깃든 에린실의 숨결이 느껴진다. 너는 레드우드로군.

이 몸뚱어리의 조상과 아는 사이인가.

“혹시 친한 사이였다면 눈 감고 그냥 넘어가 주는 건 어때? 알고 지내면서 빚지거나 한 건 없어? 혹시 있다면 퉁쳐주는 셈 치고.”

내 말에 녀석은 낮게 웃음을 흘리며 숯덩이로 빚어진 대검을 휘둘렀다. 몇 조각의 작은 불티가 나를 향해 바람에 실려 날아온다.

뭔지는 몰라도 위험하다. 확신이 든 나는 곧바로 몸을 옆으로 던졌다.

날아온 불씨는 공기를 빨아들여 몸집을 키우더니 귀곡성과 함께 방금까지 내가 서 있던 자리를 휩쓸고 사라진다. 그 꼴을 슬쩍 본 나는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말로 해줘도 되잖아 새끼야.”

꼭 주먹부터 나가는 녀석들이 있단 말이야. 이를 어쩐다.

“미안하지만, 버텨주세요!”

그 사이, 엘렌은 바로 그 역소환인지 뭔지 하는 것을 준비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녀의 몸 주변에 맑은 일렁임이 자리 잡고, 그녀의 양손 등에 박힌 보석이 빛나기 시작한다. 해골이 그런 엘렌의 모습을 슬쩍 보고는 다시 나를 본다.

― 본디 노름을 즐기는 성정이 아니라지만 이 정도로 판을 열어준다면…… 암, 어울려주지 못할 것도 없겠구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와중에 녀석이 턱 하고 들고 있던 대검을 어깨 위에 받쳐둔 채로 나를 향해 피가 말라붙은 손가락뼈를 까딱거렸다.

― 해 보거라. 저 계집이 나로 하여금 다시 내가 있어야 마땅한 곳으로 돌아가게 할 때까지 네 숨통이 붙어있다면 오늘의 산책은 이쯤 해두어 주마.

“내기에서 이겼을 때 따로 주는 사은품 같은 건 없나?”

저 살벌한 해골이랑 싸우는 건 가능하면 미루고 싶다는 생각에 툭 하고 던져 본 말이다. 그리고, 해골은 내 말에 어울려주는 것 같은 기색으로 턱뼈를 쓰다듬었다.

― 사은품이라. 네가 실패한다면 네 조국은 불탈 것이다. 그걸 막는 걸로는 부족한 모양이지?

“그게 나한테 무슨 득이 되는데?”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저 살벌하기 짝이 없는 피딱지 뒤집어쓰고 아가리로 불티 쏟아내는 해골이랑 싸우며 시간을 버는 건 자랑스럽고 용맹하신 왕국의 군대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서 있는 나 혼자다.

내기에서 실패한다면 내 몸뚱어리는 산 채로 불지옥에서 바싹 구워질 각이 날카롭게 섰는데, 난데없이 뚝 떨어진 입장에서 이 왕국의 운명 같은 건 내 알 바가 아니다.

“보람찬 하루를 보냈다는 만족감은 쿠르스트 산맥에서 수색대 생활 하면서 매일매일 느끼고 있어, 그런 거 말고 뭐 다른 게 있으면 나도 조금 더 힘을 낼 텐데.”

사실, 그런 거 안 줘도 괜찮다. 느낌을 보아하니 살아나가는 것도 감지덕지인 상황이니까.

벌써 이 대화만으로도 엘렌이 역소환을 완성시키는데 필요한 몇 초 정도는 시간을 더 벌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 이렇게 하도록 하지. 어차피 그 너절한 쇳조각 가지고는 뭘 해보지도 못할 테니.

해골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거대한 숯덩이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숯 조각이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갈라지고 그 아래에 숨어있던 불길이 날뛴다.

주변의 공기가 급격한 온도 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일렁였다.

해골은 뭔가를 손에 움켜쥐고, 숯덩이 속에서 뽑아내 내 쪽으로 휙 던졌다.

“……칼?”

내 앞에 떨어진 물건은 검이었다. 유리 같은 광택이 도는 시커먼 날을 가진 브로드소드.

“흑요석? 아니…… 다른 물건인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살펴본 다음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순간적으로 내 눈썰미까지 속일 정도로 흑요석과 닮았지만, 다르다. 모르는 물건이다.

뭘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검 자체는 묵직하면서도 어디 하나 불편하지 않게 균형이 꽉 잡혀있고, 날도 바짝 세워져 있다.

근사하고 화려한 장식 같은 건 없었다. 폼멜부터 칼날까지, 뭔가의 숨통을 끊기 위해서 검이 가져야 할 모든 부위를 갖추고 있었지만 그것들을 제외하면 어떤 것도 갖추지 않은 검이다.

오히려, 그래서 괜찮아 보이는 검이었다.

― 이긴다면, 그 검은 네 것이다.

나는 이전까지 잘 쓰고 있던, 저 해골의 해석에 따르면 뭘 해보지도 못할 수준의 너절한 쇳조각을 버리고 그 검을 손에 쥐었다.

“그나저나 꽤 유명하신 분 같은데. 어디, 이름을 말하면 사람들이 바로 알아들을 정도로 대단한가?”

내 말이 끝나자, 녀석이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거대한 숯에서 뜨거운 기운이 불티와 함께 확 일어났다 잦아든다.

― 그쯤 해두거라. 이 이상으로 시간을 끌 생각이라면 지금 이어지는 일련의 상황을 단순한 놀이로 여기지는 않을 테니.

이미 시간을 끌고 있다는 사실은 눈치챘던 모양이다. 저절로 입에서 쳇, 하는 소리가 나온다. 혀로 시간 끄는 건 이제 무리구나.

나는 검을 들어 올리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알았어, 개수작은 이쯤 해둘게.”

이제 뒤져라 버티면 되는구나. 부디, 산채로 구워지기 전에 엘렌이 역소환에 성공하길 빌어야겠다.

자세를 잡은 나는 심장의 마력을 온몸에 풀어놓으며 자리를 박차고 녀석을 향해 돌격했다.

― …….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칼날과 숯덩이가 서로 부딪쳤다. 칼날이 숯으로 감싼 껍데기를 파고 들자, 속에 숨어있던 시뻘건 불꽃이 드러난다.

― 버티는가.

녀석이 건네준 검은 그 온도를 벼텨내 주었다. 녀석이 내 손에 쥐어진 검을 한 번 슥 눈으로 훑어내린 다음, 몸을 움직였다.

“커어억.”

문제는 검이 아니라 나한테 있다. 투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주변의 공기가 터져나가며 나는 뒤로 쭉 밀려났다.

전신을 타고 퍼지는 충격에 순간 눈앞이 아찔해진다. 뼈밖에 없는 새끼가 힘이 왜 이렇게 좋아?! 불타는 미친 해골 자식.

― 그럭저럭이군. 네놈들 사이에서는 제법 기사라 칭할 만하리.

칭찬을 해줄 거면 받는 사람이 기쁜 마음이 들도록 해주면 안 될까? 입가를 한 번 훔친 나는 녀석 주변에 분신을 만들어 냈다. 분신은 손에 쥔 검에 힘을 넣고 녀석을 향해 휘두른다.

― 그래, 그 힘을 이렇게 쓰는 법도 있군.

달려든 분신이 검을 휘두르자, 해골은 손에 쥔 숯덩이를 크게 한 번 휘둘렀다. 휘두른 궤적을 따라 타오르는 것 같은 열풍이 퍼져나가며 쌓은 눈을 단번에 녹이고, 달려들던 분신이 박살 난다.

괜찮아. 어차피 이렇게 대놓고 만들어 낸 녀석이 무슨 큰 성과를 낼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으니까. 곧바로 녀석의 뒤에 분신을 하나 만들어 내며 나도 녀석을 향해 다시금 달려들었다.

― 어서 오거라.

뒤편에 나타난 분신은 해골의 손아귀에 머리통이 잡혀, 그대로 으깨지고, 녀석은 다시 한번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른다. 저걸 검으로 막아내려고 드는 게 얼마나 얼탱이 나간 생각인지는 아까 온몸으로 경험했다.

위로 뛰어오르는 허상 하나를 만든 다음, 나는 눈을 타고 슬라이딩한다.

둘 중 하나는 진짜고, 나머지 하나는 가짜다.

― 좋다.

휘둘러진 숯덩이가 멈추고, 하늘로 뛰어오른 허상을 향해 휘둘러진다. 허상이 흩어지는 것을 확인하자, 녀석은 땅을 미끄러지는 나를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해봐, 이 새끼야!”

분신이 나타나 그 발차기에 몸을 던졌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발에 차인 분신이 저 멀리 날아간다.

다시 나타난 분신이 한 번 더 발차기를 향해 몸을 던진다. 그렇게 세 개의 분신이 연달아 발차기에 몸을 던지고, 그 틈을 타 계속 슬라이딩을 한 나는 녀석을 향해 검을 올려붙였다.

검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숯덩이. 검자루를 잡을 손을 살짝 움직여 칼날을 비스듬히 맞춘다. 검은 칼날이 내려 찍힌 숯덩이가 타오르는 불티를 쏟아내며 비스듬히 세워진 칼날을 타고 미끄러진다.

팔을 타고 전해지는 태산 같은 무게감. 어거지로 검을 빗겨내는 데 성공한 나는 그대로 뛰어올라 녀석의 가슴팍을 노리고 칼끝을 내질렀다. 해골은 훌쩍 뛰어 뒤로 물러나며 내 검을 피한다.

― 너는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그럼 이 상황에 뭘 바래. 안마라도 해줄까?”

내 말에 녀석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 단순히 버티면 된다. 나와의 내기는 잊었느냐.

“맞아, 하지만 너는 나를 죽여야 승리하잖아.”

내가 승리 조건보다는 패배 조건에 민감한 사람이거든. 버티면 된다고 해서 녀석의 공격을 보고 대항하겠다는 어중이떠중이 같은 생각을 하면 죽을 거다.

죽이려고 달려드는 새끼를 상대하면서 같이 죽이려 드는 대신 버티겠다는 말랑한 생각을 하면 실력이 압도적으로 뛰어나지 않은 이상 버틸 수 없다.

다시금, 나는 뒤로 빠진 해골에게 달라붙으며 검을 휘둘렀다.

“게다가, 나는 지금 열심히 버티는 중이거든!”

먼저 공격해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녀석이 수비를 하고 내가 공격을 하는 그림을 유지해야 버틸 수 있다.

나를 향해 휘둘러진 숯덩이 이번에는 흘리는 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세가 흐트러질 정도로 강력한 충격이 몸을 덮쳤다.

“씨파…….”

충격에 몸이 밀린다. 검을 쥐지 않은 손을 땅에 박아넣어 억지로 멈췄다. 그 사이 나타난 분신이 해골을 향해 검을 움켜쥐고 달려들어 휘두른다.

갈라진 틈으로 열기를 쏟아내는 숯덩이가 분신을 후려치고, 해골의 가슴이 열렸다. 틈을 향해 달려들던 나는 걸음을 멈췄다. 코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뼈만 남은 손아귀.

― 하하.

웃어? 나는 지금 죽을 맛인데 입에서 허파에서 바람이 줄줄 흘러나오냐?

“아직 멀었어?!”

내 말에 엘렌은 대답이 없다. 말하면서 시간이 지체되느니, 대답하지 않고 계속 집중하는 게 좋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물론 그게 상책이기는 한데, 버티는 입장에서 타이머가 보이지 않는 것만큼 개 같은 일도 드물다는 건 좀 알아줬으면 좋겠어.

잠깐의 틈을 이용해 뒤로 빠지며 엘렌 쪽을 쳐다보니, 녹색과 적색의 빛이 나선을 그리며 그녀의 주변을 격렬하게 회전하고 있다.

― 걱정하지 마라. 그럭저럭 시간은 다 되었으니. 남은 시간은 조금 더 몰아쳐 봐도 재미있겠구나.

야, 아무리 그래도 니가 대답해주는 건 좀 상황이 웃긴데, 해골아. 하지만 입 밖으로 말을 꺼낼 여유는 없었다.

녀석이 들고 있던 검은 숯덩이가 본격적으로 쩍쩍 갈라진 상태로 불길을 뿜어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또 녀석의 다른 손에 쥐어진 핏덩이가 불길하게 꿈틀거린다. 해골은 자신의 손에 들린 핏덩이를 숯에 가져가 비볐다.

― 끄아아아아아아아아!

수백, 어쩌면 수천에 달할지도 모르는 무수한 목소리가 일제히 비명을 터뜨렸다. 그 비명에 직격으로 노출된 내 몸에서 순간적으로 힘이 빠진다.

동시에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숯덩이.

“지랄……!”

분신이 나타나 내 가슴을 확 떠밀었고, 휘둘러진 숯덩이는 나 대신 분신을 후려쳤다.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눈 기둥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그 뒤를 따라 재와 불티가 폭발해 대지를 떨게 한다.

“후욱…… 크흡…….”

휘날리는 불티와, 대기 중으로 퍼져나가는 달궈진 재 때문에 숨을 쉴 때마다 폐가 산채로 구워지는 것 같다. 직격을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에 물집이 한가득이다.

검을 움켜쥔 나는 분신을 만들어 시선을 분산시키며 억지로 해골 앞에 따라붙어 검을 휘둘렀다. 쿠쿵, 하는 소리와 함께 숯덩이과 칼이 서로를 두들긴다.

흘러내리는 재와 불티. 달궈진 공기는 폐를 넘어 머리통까지 통째로 익힐 기세다. 해골이 내 손에 쥐어진 검을 살펴본 다음 낮게 웃음을 흘린다.

쌍놈이, 아까부터 계속 검을 흘긋흘긋 바라보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신경 쓰이게.

― 그 몰골을 하고도 오히려 덤비는군. 검은 날카롭고, 눈에는 살기가 가득하니 호랑이에게 달려드는 승냥이로다.

눈앞이 어질거린다. 껴입고 있던 갑옷은 열기에 달궈져 살을 지지고, 열기를 견디지 못한 살점에 물집이 잡히고, 물집이 터져 흘러내리던 피부의 곳곳이 검게 변한다.

화마에 달궈진 공기가 폐로 최대한 조금 들어가도록, 숨을 가늘게 쉬며 나는 힘겹게 중얼거렸다.

“다 자란 승냥이에게 달려드는 새끼 호랑이 같은 건 어때.”

나는 늙었지만 이 몸뚱어리는 아직 미성년이잖아. 내 말에 녀석이 웃음을 흘린다.

― 그걸로 만족한다면, 네 마음대로 하거라.

“거기까지!”

뒤편에서, 엘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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