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화
해골의 뒤편에 검은 문이 열렸다. 그 말과 동시에, 해골의 몸을 휩싸고 돌던 재와 불티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그리고, 뜨겁게 달아올랐던 몸에 서릿발처럼 차가운 공기가 쏟아진다. 본래 쿠르스트 산맥에서 맞이할 수 있는 공기.
나는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밀어 넣었다. 그 사이 해골이 엘렌을 바라본다.
― 열었나? 네 실력이 제법이로다.
엘렌은 대답하는 대신 주먹을 꽉 쥐었다. 해골의 뒤편에 나타난 검은 구멍에서, 은빛으로 번쩍이는 사슬이 쏟아져 나와 해골을 휘감는다.
“있어야 하는 곳으로 꺼져.”
― 네가 감히 나를 구속하려 드느냐.
해골의 몸을 휘감고 있던 사슬이, 그 한마디와 함께 뻘겋게 달궈지고, 이내 뻘건 쇳물이 되어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무슨……!”
― 아직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으니. 범한 무례는 묵과하마.
녹아내리는 쇳물 속에서, 해골은 가만히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렌이 급하기 다시금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한다. 다시 쇠사슬로 묶으려는 거겠지.
“그만둬, 엘렌!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저 녀석의 손에는 더 이상 그 살벌하게 불타는 숯덩이가 들려있지 않다. 싸울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 마법사는 성공했고, 전사는 버텼다. 너희들의 승리로 내기가 끝났으니 나는 돌아갈 것이로되, 내 걸음에 구속은 없다.
간단하게 말해서, 억지로 끌고 갈 생각하지 말라는 거다. 가만히 서 있던 녀석이 나를 슥 훑어본다.
“으…… 아…….”
살가죽이 통째로 뜯어져 나가는 것 같은 격통이 전신을 달리고, 근육과 뼈가 멋대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참으려고 해도 입에서 피가 섞인 침이 질질 흘러내리며 눈앞이 흐려진다.
격통이 사라졌다. 온몸에 뒤집어쓰고 있던 화상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손등에 몰려든다.
붉게 달아오르고, 물집 잡히고, 숯처럼 검게 변했던 흔적들이 손등에 모여, 화상 자국으로 자리 잡았다.
멍하니 손등을 바라보고 있자, 목소리가 들렸다.
― 혹여 누군가 네 손등에 남은 흉터가 무엇인가 묻거든 헤로스가 두고 갔다 하라. 그를 마주하고 살아남았다 자랑해도 좋다.
뒤편에서 엘렌의 신음이 들린다. 뒤를 돌아보니, 엘렌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헤로스? 세상에.”
헤로스라고 자신을 밝힌 해골은 엘렌에게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말을 마친 녀석은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녀가 열어놓은 검은 아가리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열려 있던 검은 아가리가 서서히 수축하고, 이내 사라졌다.
“…….”
내 몸이 퍽, 하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괜찮은 거야?!”
엘렌이 내 쪽으로 달려와 몸을 살펴본다.
“헤로스라는 게 뭐지?”
내 말에 엘렌이 대답했다.
“헤로스. 전장의 폐허를 거두는 자. 피와 불꽃의 사령관…… 이름은 많아.”
그래, 보통 유명하신 분들이 별명이 많더라고. 하지만 별로 설명이 되지는 않는다.
“태초마로 분류되는 악마야.”
“태초마?”
그게 뭔데 임마. 내 말에 엘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질문이 이어지는 걸 보니 몸은 다행히도 문제가 없는 모양이네.”
대답이나 해줘. 자동차에 뺑소니를 당한 상황인데, 차종과 차량번호 정도는 알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 뭐가 날 치고 지나갔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냐.
“인간이 소환에 성공하는 악마는 대부분 계약마야. 태어날 때부터 악마였던 태초마와 계약하고, 그 영혼을 저당 잡혔다가, 죽음 이후 태초마를 섬기는 악마로 변한 존재들이지.”
계약마는 악마로서 태초마를 섬기고, 동시에 사람들의 소환에 응해 소원을 들어주는 대가로 다시 영혼을 저당잡고 계약한 사람이 죽으면 악마로 만든다.
즉, 태초마 입장에서는 한 녀석이라도 계약마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면 이후에는 어지간해서는 소환에 응해주지 않는다.
때문에, 태초마와 직접 계약에 성공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아득히 먼 과거, 역사에나 존재하는 모양이다.
쉽게 말하면, 태초마는 원조 맛집이다. 나머지 계약마라는 녀석들은 원조와 계약해서 식당을 연 체인점 느낌이고.
아, 다단계로 비유하는 편이 더 적절하려나?
“그런 게 왜 튀어나온 거야. 보통 소환에 응해주지 않는다면서. 다나 힐베른이 의외로 엄청난 재능이 있었던 건가?”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저었다.
“다나 힐베른은 헤로스를 소환한 게 아니었어. 어떤 악마건 일단 이 세상으로 오기만 해달라는 거였지.”
악마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조건이다. 쾌락 없는 책임은 모두가 싫어하지만, 책임 없는 쾌락이라면 반대로 모두가 반기잖아.
좀처럼 보기 힘든 소환 방식에 나와 방금 싸웠던 헤로스라는 해골이 흥미를 보인 모양이다. 그래서 튀어나왔고, 이 사달이 났다.
“그런 식의 시도는 제정신이라면 아무도 하지 않아. 튀어나온 악마는 일단 바로 눈앞에 보이는 소환자부터 조지고 시작할 테니.”
실제로, 헤로스를 소환했던 다나의 최후는 꽤 끔찍했다.
헤로스가 사라진 곳을 보고 있던 엘렌이 입을 열었다.
“헤로스와 싸우고 살아남은 사람은 전장의 하늘에서 그의 형상을 볼 수 있다던데.”
“형상?”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자리에서 일으켜 부축한 채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피, 화염, 전사자…… 헤로스는 전장을 지배하는 태초마야. 그의 형상이 아군의 하늘에 떠오른다면 이후 싸움에서 아군이 패배한다는 예언이지.”
반대로 적군의 하늘 위에 헤로스의 형상이 보인다면 적군이 패배한다는 예언인 모양이다.
“일종의 경보기네.”
싸우기 전에 승패를 알 수 있다면, 전투에서 패배해도 전쟁에서는 승리하기가 훨씬 쉬워질 것이다.
지피지기를 안 해도 백전불태가 가능하다니. 손자가 억울해서 무덤을 뛰쳐나올 만한 일이군.
“헤로스라니. 다른 마법사들에게 말해줘도 못 믿을걸.”
“그럼, 너도 전장에서 헤로스의 형상을 볼 수 있는 건가.”
왕국에 고성능 경보기가 하나 생겼네. 내가 이 나라의 왕이라면 좋아서 날뛸 것이다.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저었다.
“헤로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 실제로 돌아가기 전에는 나를 거의 무시했잖아.”
그럼 나만 해당되는 건가.
“전력으로 싸운 건 아니지?”
내 말에 엘렌이 푸후, 하는 소리를 냈다.
“헤로스가? 그럴 리 없어. 그 검을 보면 알 수 있거든.”
나는 그 말에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바라봤다. 이게 뭐.
“그 검에는 마법이 걸려있어. 손에 쥔 사람이 전의를 상실하면 유리보다 더 약해지겠지만, 전의가 충만할수록 견고해지고, 날카로워져.”
부축하고 있던 와중, 저 멀리에서 피리 소리가 들렸다. 수색대가 이제야 도착한 모양이다. 그 피리 소리를 들은 엘렌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를 바라봤다.
“그 검이 부서졌으면, 헤로스는 순식간에 나와 너를 불태웠을걸.”
내가 전의를 상실했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녀석이 싸우던 와중 틈틈이 내 검을 바라봤던 모양이다. 모랄빵이 나면 깨지는 검이라.
하긴, 그 몰골을 하고 살벌하게 휘두르는 거대한 숯덩이를 보면서 버티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지.
“결국 나 혼자 다 한 거네.”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네가 전의를 상실했으면 나도 죽었을 테고…… 실제로 돌아가는 길을 여는 데는 성공했지만 내가 한 일은 그것뿐이었으니. 고마워.”
“말로 하는 감사 인사는 의미가 없어.”
내 말에 엘렌이 대답했다.
“혹시, 쿠르스트 산맥에서 평생 있을 생각이야?”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여기에 억류되어 있을 생각은 없지.”
내 말에 엘렌이 대답했다.
“그걸 도와주는 정도면 감사 인사로 어떨까?”
“약간 손해 보는 기분인데.”
“지금 내 주머니에서 나올 수 있는 건 이게 최대야.”
갚아야 하는 사람들 입에서는 늘상 저런 소리가 나오곤 하지.
“그럼 남은 건 빚으로 달아놓지.”
내 말에 엘렌이 혀를 내두르고는 중얼거렸다.
“부자 되겠네.”
“뭘 또 칭찬까지 해주고 그러실까.”
그런 말을 하고 있으려니 저 멀리에서 수색대 사람들이 달려오는 게 보인다. 그들을 보던 엘렌이 나를 슬쩍 보고 말했다.
“헤로스와 맞섰다는 이야기는 하지 마.”
“응? 왜.”
내 말에 엘렌이 침을 한 번 삼켰다.
“쿠르스트 산맥에서 평생 썩을 생각은 없다고 했잖아? 헤로스와 맞서고 살아남은 사람이 전장에서 그의 형상을 본다는 사실은 나만 알고 있는 게 아니야. 국경 수비대에서는 너를 절대로 놓아주려고 하지 않을걸.”
아, 국경수비대 입장에서는 승패를 알려주는 조기 경보기를 곱게 놓아주고 싶지 않겠지. 엘렌이 도우려고 해도 국경 수비대에서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안 내보내 주려고 들면 설사 나오는 게 가능하다고 해도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일리가 있네, 알았어.”
그 사이, 도리안이 부축을 받고 있는 내 쪽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그리고, 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나는 순간적으로 난관에 부딪쳤다.
먼저 입을 연 건 엘렌이었다.
“쿠르스트 산맥으로 파견되었던 다나 힐베른은 금지된 마법을 사용했고, 그 과정에서 최소 한 명의 어린아이와 소녀를 죽였어요. 마틴 레드우드는 다른 누구보다 빠르게 다나 힐베른의 수상한 점을 눈치채고 빠르게 행동했지요.”
그 말에 도리안이 으음,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런 도리안을 보던 엘렌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수색대장님께서는 이미 어느 정도 알고 계셨던 모양이군요.”
“마틴이 다나 힐베른 양을 수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은 알고 있었지요. 하지만…… 살인, 그것도 유아 살인이라니.”
엘렌이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살인뿐이 아니에요. 하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정식 서류를 통해 알려드릴게요.”
그것도 중요하지만…….
“엘렌은 본부에 도착하면 쉬기 전에 제 집무실에 들러줘. 나눌 이야기가 좀 남아있으니.”
내 말에 엘렌이 슬쩍 나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엘렌에 대해서 별다른 악감정은 없다. 물론, 결국 헤로스라고 하는 악마를 잡은 건 나 혼자 해낸 일이지만…….
다나 힐베른과의 밀회가 걸린 상황에서 엘렌이 내 이야기를 들을 생각을 해주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최악의 상황도 얼마든지 될 수 있었으니까.
그 상황에서 엘렌이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다나 힐베른과 함께 나를 죽일 기세로 두들겨 팼다면 거기에서 죽거나, 아니면 감방을 갔겠지. 부축을 받아 수색대 건물로 이동한 나는 곧바로 엘렌과 함께 내 집무실에 앉았다.
“할 이야기가?”
“다나 힐베른의 왼손을 갈아내면서 얻은 정보.”
내 말에 엘렌이 자기 이마를 손으로 팍 한 번 때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있었지. 헤로스에 정신이 팔려서 그걸 잊고 있었네. 왕국 군부의 높은 분이 연관되어있다고 했지?”
어차피 이 상황에서 발을 빼는 건 동굴에서 도리안을 구할 때부터 확정이었다. 내가 무승부로 하자고 울면서 빌어도 저쪽에서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다.
“누군지 알아내야 해.”
하지만 나는 지금 당장 쿠르스트 산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엘렌 리버플로우는 믿을 만하지.
“군부에 높으신 분이라고 해도, 그걸로는 너무 부족해. 당장 국경수비대 총사령관일 수도 있잖아.”
“연관점이 없을 수는 없어.”
사람이 어디에 소속되기 위해서는, 소속된 사람을 만나야 한다.
“다나 힐베른이 사용하던 잔. 아직 사용량이 남아있어. 오래 유지할 수는 없겠지만, 어떻게든 발동된다면 교신 위치의 범위를 좁힐 수 있어.”
그래, 마법사라서 할 수 있는 방법도 있는 법이다.
“거부감은 딱히 없는 모양이군.”
내 말에 엘렌이 대답했다.
“내가 쓰지 않는다고 해서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는 게 아니잖아.”
“좋아, 가능하면 바로 시도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이고 가방에서 잔을 꺼내 들었다.
“시작할게.”
말을 마친 엘렌이 잠깐 눈썹을 찡그리자, 아무것도 없는 잔에 피가 차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갑자기 잔에서 시커먼 연기가 확 하고 피어오르더니 그대로 잔에 있던 피들이 증발해버렸다.
“뭐야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