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39화 (39/275)

039화

내 말에 엘렌이 잠깐 잔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상대 쪽에서 잔을 파괴했어. 눈치챈 거야.”

“다나 힐베른의 죽음을?”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몸에는 별다른 마법이 걸려있지 않았어. 다나 힐베른의 죽음은 전해지지 않았겠지. 그냥 수상하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어떻게 안 거지?”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다. 다나 힐베른은 내가 식량을 구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 저 잔을 사용했을 것이다.

“다나 힐베른이 오늘 무슨 일을 할지 미리 말해두었다면 상대편에서는 수상하게 생각하겠지.”

그녀의 일정을 안다면, 방금의 연락은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온 연락이라고 예상 할 수 있다.

“아무리 그래도…….”

“그래, 과감한 편이긴 하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연락을 받지도 않고 바로 잔을 파기하다니. 보통 그 정도로 결단력 있는 움직임을 보여주지는 않는데.

하긴, 머리가 머리에 앉아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라지.

어쩔 수 없다. 쉽게 가는 길이 막혔으니 조금 돌아가야지. 크게 변하는 건 없다. 처음부터 마법을 통해서 뭔가를 해볼 생각은 없었으니까.

“다나 힐베른이 만난 군부의 사람들을 알아내야 해.”

내 말에 다나 힐베른이 대답했다.

“그래, 그편이 좋겠지. 우선은 최근에 만난 사람들부터.”

아니지 이 친구야. 내가 고개를 젓자 엘렌이 나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낸다.

“다나 힐베른은 쿠르스트 산맥에 혼자 보내졌어. 나름대로 신뢰받고 있었다는 거야.”

엘렌이 내 말에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꽤 오래전부터 그 칠색 뭐시기들과 연관되어있었다는 뜻이구나.”

그렇지, 거기에 더해서 시작해야 할 지점도 어느 정도 특정할 수 있다.

“너는 마법사지. 다나 힐베른이 지원을 신청했던 연구 목록과, 거부당한 목록들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다나 힐베른이 연구 지원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지. 추후 조사 명목으로 뒤지는 건 충분히 가능해.”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더 이상 왕궁에 연구 지원 요청을 하지 않았을 거야.”

그날 이후로 만난 사람들을 조사해서, 군부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을 추려낸다면 충분히 조사 범위를 좁힐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 자주 해본 거야?”

나는 그 말에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대부분 이 정도는 할 텐데.”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하지만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건 몇 분 지나지 않았잖아.”

“이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나 보지.”

귀찮게 뭘 캐묻고 그래. 대충 넘기려고 하자 엘렌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는 않았다.

“어차피 일하는 건 댁이니, 고생하라고. 조사하면서 내 쪽으로 내용 보내는 거 잊지 말고.”

나는 여기에서 나갈 수 없으니까, 칠색 내각이라고 하는 이상한 모임에 대한 조사는 엘렌이 전담해야 한다.

다나 힐베른을 아래에 두고 부려먹던 적색이라는 놈을 찾아내게 된다면, 녀석의 입을 통해 다른 놈들에 대한 정보도 알아낼 수 있겠지.

대화를 마친 다음 엘렌은 돌아갔다. 어쨌든, 이걸로 일단락되는 느낌이군. 잠깐 천장을 바라보면서 쉬고 있으려니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뭐야.”

문이 열리고 병사 한 명이 들어와서 나에게 인사를 하고 뭔가를 내민다.

“편지입니다. 레드우드 가문에서 보낸 모양입니다.”

레드우드 가문에서? 나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고는 편지를 살폈다. 거기에는 로델린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고맙다.”

병사가 돌아가고, 나는 편지를 열어 내용을 확인해봤다.

“아니 참.”

나는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로델린이 면회를 올 생각인 모양이다.

어머니 된 입장에서는 자식놈이 저 멀리 산골짜기로 귀양 간 상황이니 걱정이 많이 되겠지.

“여기가 어딘지 알고 오겠다는 거야…… 웃긴 여자라니까.”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한숨을 쉬었다. 레드우드의 영지에서 여기까지는 거리가 제법 된다.

게다가, 유일한 마을이라고 할 수 있는 록밸리는 로델린 같은 귀족 부인들이 머무를 만한 곳이 전혀 없다.

몸과 정신이 세트로 피곤한 길을 굳이 오겠다고 하다니. 심지어, 보낸 편지도 자그마치 일주일 전에 보내진 물건이다.

편지가 도착하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는 건, 사람이 직접 오는 데에는 시간이 더 걸린다는 뜻이다.

“2주 뒤에 출발하면…….”

대충 한 달은 지나야 이 근방에 도착하겠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리안 대장에게 가서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

“어머니의 자식 걱정이야 어찌 보면 당연한 거지. 물론, 여기까지 오는 건 흔한 일이 아니지만.”

역시 도리안도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한 달은 걸릴 것 같습니다.”

내 말에 도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뻐할 만한 일 아닌가?”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좋으면 좋지, 나쁠 일은 전혀 아니다. 마차 타고 일주일은 넘게 걸리는 길을 내 얼굴 하나 보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는 거니까.

“어쨌든, 방문의 자세한 일자가 확정되면 말해주고. 그 전까지는 일에 집중하라고. 피터가 네 일까지 하느라 밤마다 울부짖고 있었으니까.”

“그러겠습니다.”

인사를 한 나는 문을 나섰다. 그리고 다시 엘렌의 숙소로 찾아갔다.

“응? 이야기 끝난 거 아니었어?”

“그거 말고 다른 일.”

나는 간단하게 로델린의 방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렌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글쎄, 축하해. 근데 나랑은 크게 상관없는 일 아니야?”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다나 힐베른의 멱을 따놓은 이상 나를 알게 모르게 싫어하는 사람들이 꽤 많아졌을 테니까.”

내 말에 엘렌이 아하, 하는 소리를 내고 팔을 꼰 채 나를 바라봤다.

“어머니가 걱정되는 모양이네?”

여기까지 오는 길은 멀고, 오랜 시간이 걸린다. 거기에 더해, 자식 협박하는 가장 좋은 수단은 말할 것도 없이 그 부모를 쥐고 흔드는 거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내 어머니는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에 흔들리지 않을 자신은 있다.

그래도 나를 자식이라고 생각하며 여기까지 오려고 하잖아. 내가 괜찮은 거랑, 로델린이 작살나는 거는 별개의 일이다.

봉변을 당할 가능성이 있는데 그냥 알아서 오라고 방치해 두는 건 머리털 난 사람 새끼로서 할 만한 짓이 아니다.

“일정을 약간 조정한다면야, 네 어머니가 오가는 길을 동행할 수 있는데. 그걸로 달아놓은 빚을 처리할까?”

엘렌의 말에 나는 대답했다.

“협조해준다면 네가 허비해야 하는 시간이 자그마치 한 달 반이야. 단순히 남은 빚을 반제하기에는 내 요구가 좀 과한 편이지.”

이건 엘렌이 적자를 본다.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이번에는 네 머리 위에 빚이 올라가는 거네.”

“그렇게 되겠군.”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수 있다면 그렇게 했겠지만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쿠르스트 산맥을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고, 칠색 내각이라는 녀석들과 연관점이 없는 것으로 확신되는 사람은 엘렌이 유일하다.

“기왕이면 서둘러 두는 편이 좋을 거 같은데. 내일 아침 중으로 나는 레드우드 영지로 출발하고, 다른 마법사들은 먼저 왕궁으로 돌아가라고 해둘게.”

“그럴 수 있나?”

내 말에 엘렌이 하,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왕국에서 내 입지는 꽤 높아. 멋대로 한 달 정도 자리 비우는 거 가지고 꼬투리 잡을 사람들은 없어.”

한 달 넘게 자리를 비워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니, 그 정도면 거의 깡패 수준이잖아.

대화를 마치고 엘렌이 다시 자기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피터의 집무실로 향했다. 피터는 내 얼굴을 보고 반기는 한편, 다소 걱정되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에도 또 며칠 뒤에 갑자기 내가 이 일을 하게 되지는 않겠지?”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내가 노리고 일을 벌이는 게 아니라, 일이 나를 노리고 벌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라서 말이야.

* * *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서 있던 허수아비가 박살 나 저 멀리 날아간다. 중년은 휙, 하고 들고 있던 메이스를 던진 다음 얼굴을 구겼다.

“망할 놈의 레드우드.”

남자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바닥에 쓰러진 허수아비를 노려본다. 그 새파랗게 어린 자식에게 엿을 먹다니.

“…….”

그 와중에, 뭔가가 부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주변을 살피고, 문을 잠그고 짐을 뒤져 잔을 찾아내 손에 쥐었다. 텅 빈 잔에 피가 차오른다.

잔 너머에서 변조된 목소리가 들렸다.

― 다나 힐베른이 죽었다고 들었는데.

“……그래.”

남자의 말에 변조된 목소리가 작게 한숨을 쉰다.

― 왕국에서 진행해야 하는 일은 맡겨두라고 누군가 내게 큰소리를 쳤었어.

“계획은 완벽했다.”

― 빨강아. 세상에 완벽한 계획은 없어. 모든 일에는 변수가 존재하고, 그 변수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게 개인의 능력이지.

남자는 잔을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어금니를 꽉 물고 대답했다.

“그 멍청한 계집이 마틴 레드우드를 활용하겠다는 너절한 제안만 하지 않았어도…….”

― 그러면 안 되지. 판단을 내린 건 너야. 아랫것의 탓을 하다니.

“그럼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한다는 거냐.”

― 그런 건 스스로 생각해. 내가 뭘로 보여, 네 가정교사?

배 아래에서 끌어올린 것처럼 부글거리는 남자의 목소리에도, 잔에서 들리는 변조된 목소리는 평온했다.

“마틴 레드우드의 어미가 그 녀석을 보러 간다고 하더군.”

― 안 하는 게 좋을걸.

변조된 목소리의 말에 남자가 살짝 인상을 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그 젖비린내 나는 애새끼가 다시는 방해하지 못하도록 할 기회다.”

― 슬프게도, 그 젖비린내 나는 애새끼는 네 머리 위에서 놀고 있는 것 같은데.

“우연히 쿠르스트 산맥에서 내가 진행하던 일을 발견했을 뿐이고, 재수가 좋아서 다나 힐베른의 정체를 알았을 뿐이다.”

잔 너머에서 잠깐의 침묵이 감돌았다.

― 두 번의 우연이라. 어차피 네가 하겠다는 걸 내가 막을 생각은 없어. 나는 그저, 충고를 해주었을 뿐이야. 사실 네가 지금 취해야 할 행동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거든.

남자는 그 말에 잠깐 움찔하고는 어렵사리 말을 꺼낸다.

“취해야 할 행동이 있다면 말해다오.”

잔 너머에서 안타까운 것 같은 탄식이 들렸다.

― 맙소사, 그 작고 한심한 머리로 바라보는 세상이 어떨지 짐작도 가지 않는군.

어렵사리 꺼낸 부탁이 개무시당하다 못해, 자신의 자존심까지 짓밟는 대답이 돌아오자 남자의 입에서 뿌득, 하는 소리가 난다.

“말해주지 않을 거라면, 빈정거리지도 마라. 자색.”

― 내가 알아서 수습할 테니, 눈에 띄는 행동 하지 말고 꼬리 만 채 숨어있어. 덤으로, 다나 힐베른을 네 아래로 끌어들일 때 사용했던 아래 녀석들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관련 기록을 지워.

“설마, 그 애송이가 내 꼬리를 밟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리고 잠깐의 침묵. 잔 너머에서는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봐? 야!”

여전히 잔 너머에서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상대가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다는 것을 깨달은 남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사람을 무시해?! 거만한 새끼!”

남자는 잔을 확 집어던지고 벽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 거미줄 같은 금이 쩍쩍 갈라지고, 부서진 돌가루가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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