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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42화 (42/275)

042화

소포 암살 사건 후 얼마나 지났을까. 언제나처럼 아침에 눈을 뜬 나는 천장에 달려 있는 거대한 고드름을 보고 활짝 웃었다.

저게 떨어졌으면 바로 내 미간에 박혔을 거다.

“씨발, 신경 사나워서 잠도 제대로 못 자겠다.”

말을 하는 동안에도 확 하고 입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허연 입김.

쿠르스트 산맥은 원래 추운 곳이지만, 본격적으로 겨울이 깊어지기 시작하자 이곳에서의 하루하루는 매일 매일 눈을 뜰 때마다 살아있다는 감동과 함께 삶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이야.”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창밖에 걸려있는 온도계를 확인하고는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은 채 눈을 비볐다.

“영하 43도?”

어떻게 기온이 이렇게까지 떨어질 수 있는 거지. 구차하게 목숨 구걸 하기 싫으니 그냥 죽여라. 망할 대자연, 무슨 시베리아도 아니고.

“아랫동네는 좀 따뜻하려나 모르겠네.”

내가 락밸리 마을에서 배달부 아내와 아이를 구한 지 대충 한 달이 지났다. 오늘 중으로 로델린이 도착할 예정이라는 보고도 받았다.

“기절하지 않을까 모르겠네.”

레드우드 백작가의 영지가 겨울에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어도 골수까지 시려오는 쿠르스트 산맥의 추위와는 비교할 만한 물건이 아니겠지.

“로델린도 로델린이지만.”

사실 로델린은 어머니 된 입장에서 여기까지 찾아와 준다는 게 고마운 거고, 영양가 있는 이야기는 엘렌 리버플로우와 나누게 될 거다.

“좋은 아침.”

밖으로 나오자 피터가 코를 한 번 슥 훔치고 입고 있는 방한복을 다시 여민다.

“입어도 똑같지 않습니까?”

내 말에 도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방한복의 매력이지. 입어도 추워서 별로 쓸모없어 보이는데, 막상 안 입으면 추운 게 아니라 뒤져.”

틀린 말은 아니네.

“부대장은 어제 도착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5수색대와, 그 아래의 관문을 담당하는 수비대는 계속해서 발견되는 하이랜더를 상대하다 못해 결국 국경수비대 사령부에 애원을 했다.

결국 그 애원은 공문의 형태가 되어 주변 다른 수색대와 수비대에게 하달되었다.

미리 준비해둔 명단에 따라 피터는 수색대원들을 이끌고 제5수색대로 파견되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나도 없고 피터도 없으면 도리안 혼자 수색대의 간부 역할을 전부 해야 한다.

“그래봤자 이틀 정도고, 록밸리 마을도 아니고 관문 수비대 막사에서 머무르는 거잖아.”

록밸리 마을에서 만날 수는 없다. 온몸의 마력을 다 돌려서 달려도 록밸리 마을에서 다시 수색대 본부까지 도착하는 데에는 시간이 한참 걸리니까.

즉, 로델린은 지금 쿠르스트 산맥을 오르는 중이다.

“기왕이면 록밸리에서 만나는 편이 당연히 좋겠지만, 네가 이해해라.”

“이해하고 자시고 할 게 있습니까.”

사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해준 도리안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지.

“감사합니다.”

내 말에 도리안이 하, 하는 소리를 내고는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그래도 시킨 일은 다 끝내고 가라.”

“이미 끝냈습니다.”

대답을 들은 도리안이 후욱, 하고 입김을 뿜어낸 다음 내 등을 탁 친다.

“그럼 여기서 밍기적거리며 자리 차지하지 말고 내려가. 어차피 여기에 있어봤자 언제 내려갈지 모르는 사람한테 뭘 시킬 수도 없으니.”

“알겠습니다. 고생하십쇼.”

인사를 마친 나는 방으로 돌아가서 옷을 더 껴입고, 만약을 대비해 필요한 장비를 챙긴 다음 수색대 본부에서 관문 쪽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느긋하게 간다고 해도 점심은 수비대에서 얻어먹을 수 있겠군.

목적으로 정한 관문 수비대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 망할 산골짜기가 따뜻해지지는 않았다.

“면회 건 때문에 찾아온 거겠지. 마틴 레드우드.”

“그렇습니다, 수색대 입장에서는 락밸리까지 간부를 내려보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염치 불고하고 신세를 좀 지겠습니다.”

수비대장은 별로 내켜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잠깐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제5수색대 건을 말하는 거지? 그쪽 작전구역으로 증원 병력을 보낸 건 자네들만이 아니야.”

안 그래도 증원 병력을 보내는 바람에 인력이 딸리는데 수색대 사람 하나 면회 오겠다고 백작가 귀부인이 덜컥 찾아오니 마중 준비를 해야 하는 수비대장 입장에서는 썩 달가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곱게 받아주지는 못할 것 같다.

그래도 대놓고 뭐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아야지.

“부족한 인력에도 불구하고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됐네, 식사는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전달받아서 따로 마련하지는 않고, 백작 부인이 머무를 방을 마련하는 데 집중했네.

그래, 그 정도면 충분하다.

대충 그렇게 인사를 마친 나는 준비했다고 하는 장소로 향했다. 머무를 방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고, 침대보나 이불도 깨끗하게 빨아져 있었다.

말로는 구시렁거려도, 실제로 장소 마련에는 꽤 노력을 기울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방 이외에도 로델린이 동행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마련한 방들도 상당히 깔끔한 편이었다.

그때, 근처에서 병사가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다가가니, 병사가 곧바로 인사를 하고 입을 열었다.

“레드우드 씨, 도착했습니다.”

빨리 왔네, 조금 더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거기에는 한기로 인해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로델린이 두꺼운 옷을 뒤집어쓴 채 엘렌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과 함께 서 있었다.

“…….”

안 본 사이 몸무게가 많이 줄었다. 한 5kg 정도는 빠진 것 같은데. 손을 보아하니 십자수는 그만둔 모양이다.

락밸리 마을에서 여기까지는 말을 타고 올 수가 없으니 걸어왔을 것이다. 이 여자는 오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렇게, 한동안 로델린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막상 얼굴을 보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 마틴, 내 아들.”

로델린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잠깐 몸을 떨었다. 추워서 떠는 건 아닌 것 같다. 로델린이 다가와 내 뺨에 손을 가져간다. 차갑게 식은 손이 뺨에 닿는다.

“잘 지내고 있었니? 많이 수척해진 것 같은데.”

아니, 수척해진 건 내가 아니라 로델린 같은데. 말을 마치고 한동안 내 얼굴을 쓰다듬고 있던 로델린이 시선을 내 옆으로 돌렸다. 거기에는 관문의 수비대장이 서 있었다.

“처음 뵙겠어요, 레드우드 백작가의 로델린이에요.”

수비대장이 로델린의 말에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다음 대답했다.

“환영합니다, 레드우드 부인. 머무르시기 좋은 곳은 아니지만 최선을 다해 준비했습니다. 혹여, 모자라거나 미흡한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로델린이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제 요청이 쿠르스트 산맥을 지키는 수비대에게 얼마나 무리한 요청이었는지는 잘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배려를 해주서서 마음속 깊이 감사하고 있답니다.”

말을 마친 로델린이 뭔가를 꺼내 수비대장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여기까지 물자를 옮기기에 수월치 않아, 어쩔 수 없이 인근의 마을에 감사 선물을 남겨두고 몸만 왔답니다.”

일종의 계약서 비슷한 물건이었다. 로델린은 서류를 건네준 다음 말을 이었다.

“머무르면서 이야기를 살펴보니, 쿠르스트 산맥의 수비대 병력들도 자주는 아니지만, 마을에 내려와서 쉬는 모양이더군요. 마을의 관리에게는 미리 이야기를 해두었습니다.”

록밸리 마을로 내려올 일이 있으면, 로델린이 치른 값이 다 되기 전까지는 록밸리 안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짜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해둔 모양이다.

“오늘을 기점으로 한 달간, 관문의 수비대분들이 록밸리 마을에 내려와서 사용하는 돈은 추후 제가 따로 지불할 예정입니다.”

공짜 술과 음식. 수비대장이 음, 하는 소리를 낸 다음 고개를 숙여 로델린에게 인사를 했다.

“마땅히 해야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따로 감사 인사를 준비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병사들도 좋아할 겁니다.”

“그래야 할 텐데요. 사실, 쿠르스트 산맥의 국경수비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적어, 제가 준비한 선물이 적절한지 어떤지 계속 걱정했답니다.”

수비대장과의 이야기를 마친 로델린은 안내를 받아 내가 미리 확인했었던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걸터앉은 로델린이 작게 한숨을 쉬고 나를 바라봤다.

“다리 아파 죽겠구나. 너는 하루가 멀하고 이런 산길을 다니는 거니?”

로델린의 말에 나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설마 그렇겠어요? 이 일대가 제일 험해요. 이후로는 꽤 경사가 완만해서, 그냥 산책하는 거랑 다를 바 없어요.”

엘렌이 로델린 몰래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뭘 그러고 있어. 어쩔 수 없잖아. 그럼 아들 걱정하는 엄마한테 '여기는 지옥이에요, 살려주세요. 나가고 싶어요!' 같은 소리나 하며 질질 짤까?

그런다고 나갈 수 있는 곳이라면 똥오줌도 질질 싸면서 바닥을 구를 자신이 있지만, 여긴 그런다고 나갈 수 있는 곳도 아니다.

내 표정을 보던 로델린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니 다행이다.”

로델린은 내 말이 거짓부렁이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속아 넘어가는 척해주는 거겠지.

“수색대에 들어갔다고 들었다. 많이 위험할 텐데.”

“다들 그렇게 말하지만, 그냥저냥 있을 만해요. 오히려 임무가 힘들어 사람을 가려 뽑다 보니, 괜찮은 사람들만 모여있어요.”

내 말에 로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틀림없이 내가 배 아파서 낳은 레드우드 백작가의 장남이지만 이곳에서는 왕국의 구성원으로서 국경을 지키는 군인이다. 네가 원해서 온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 점을 잊지 마렴.”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렌이 한마디를 거든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백작부인. 아드님께서 수색대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견식할 기회가 있었는데, 누가 보더라도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요.”

로델린이 시선을 옆으로 돌리고 웃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조금 놓이네요, 리버플로우 양.”

잠깐 나와 로델린을 번갈아 보던 엘렌이 음, 하는 소리를 냈다.

“그 뭐냐. 저는 일단 돌아가 있도록 할게요.”

“잠깐.”

나는 그 말을 듣고 곧바로 엘렌을 멈춰 세웠다. 문으로 다가가던 엘렌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응?”

“있다가 잠깐 나 좀 보지.”

말하면서,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잔을 검지로 툭 하고 쳤다.

“알았어.”

엘렌이 대충 말뜻을 눈치를 챈 모양이다. 흔쾌하게 수락하고 나서 문을 나갔다. 그리고, 나와 로델린은 방 안에 둘이 남았다.

“밥은 먹었니?”

로델린의 말에 나는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어머니는 식사하셨나요?”

내 말에 로델린이 고개를 저었다.

“밥이 뭐가 중요하겠니. 네 얼굴을 보고 나니 이제야 밥이 넘어갈 것 같구나. 사람들을 시켜서 식재료를 좀 가져왔다.”

치킨을 배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예 자식 먹일 식자재를 챙겨 들고 온 모양이다.

“……이건 좀 많지 않아요?”

꺼내놓은 온갖 식재료를 보던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냥 아주, 부엌을 통째로 가져온 수준인데. 그리고, 거대한 무언가가 턱 하니 식탁 위에 올려졌다.

이건 뭐야. 고기? 나 태어나서 화장실 매트만 한 크기의 고깃덩어리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너무 적게 준비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하하. 적게 준비했을까 봐 걱정? 멍하니 그 거대한 고깃덩어리를 보던 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이거 먹다가 죽으면 산재처리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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