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화
로델린이 준비한 식재료는 나 혼자 먹어치우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아무리 많이 챙겨도 부족한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라지.
“여기까지 오는데 고생한 사람들이 많겠죠. 넓은 곳에 자리를 마련해서 식사는 함께 하도록 하죠.”
“그래, 멀리 돌아다녀 본 적이 없는 나 때문에 다들 많이 고생했을 테니까.”
사실, 뭐 밥 따위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식사 준비를 하도록 지시한 다음, 나와 로델린은 방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십자수를 그만두셨네요”
내 말에 로델린이 잠깐 움찔하고는 이내 웃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니.”
“그러게 말이에요.”
로델린의 옆에 앉은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수색대에 소속되었어요.”
내 말에 로델린이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들었다. 많이 위험한 일이라고 알고 있는데.”
“세간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큼 위험하지는 않아요. 게다가 그럭저럭 인정받고 있기도 하고.”
내 말에 로델린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인정을 조금 덜 받더라도 안전한 곳에 있었으면 좋겠지만, 내 뜻대로 되지는 않겠지.”
인정 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안전한 곳에 있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요. 아마, 여기에서 평생을 썩게 되겠죠.”
내 말에 로델린이 눈을 감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올 생각이란다. 굳이 위험을 감당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저는 영원히 여기에 갇히겠죠.”
말을 마친 나는 로델린을 바라봤다.
“어차피, 레드우드 가문에서 저를 생각해주는 사람은 어머니 말고 없어요.”
내 말에 로델린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렇지는 않단다. 네 아버지만 해도 너를 사랑하고 계시다.”
나는 그 말에 쓰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만큼 저를 사랑하고 계시겠죠.”
내 말에 로델린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얘야…….”
“아니요.”
나는 로델린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그리고 로델린을 바라봤다.
“레드우드 가문에 제가 있을 곳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그건…….”
나만의 문제는 아니다. 로델린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을 거다. 아니, 이제 더 이상 줄어들 곳이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레드우드 가문과, 그 영지에 있을 자리가 없다. 내가 설사 쿠르스트 산맥에서 엘렌의 도움을 받고, 공적을 세워 이 의무라는 이름의 족쇄에서 해방된다고 해도 변하지 않을 사실이다.
레온 백작의 자리와, 그 영지를 이어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데이먼이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시나요?”
내 말에 로델린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셨으면 해요, 어머니.”
내 말에 로델린이 대답했다.
“그 사람을 보며 가슴이 뛰었던 적도 있었지. 그것도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도 마찬가지겠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레드우드 가문의 적자다. 이 산맥에서 벗어나 영지로 돌아오게 되면, 언제나 너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을 거야.”
나는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니, 죄송해요. 하지만 방금 전 그 말씀은 저로서는 믿을려야 믿을 수가 없는 이야기네요.”
말을 마친 나는 고개를 돌려 로델린의 눈을 바라봤다.
“레드우드 백작가는 저를 환영하지 않아요. 그곳에 제가 있을 자리는 없지요.”
내 말에 로델린이 입술을 달싹거린다. 뭐라도 말을 해주고 싶은 모양이지만, 쉽사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다.
“쿠르스트 산맥을 나온다고 해도 저는 레드우드 백작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애초에 내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마틴, 너는 틀림없이 레드우드의 피를 받았다. 붉은 가지를 찾아낸 것도 바로 너야. 제아무리 레온이, 네 아버지가 인정하기 싫다고 해도…….”
어머니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작게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백작가라, 그래봤자 땅 몇 뙈기와 졸개로 부릴 아랫사람 몇 명을 두고 귀족 놀이하는 게 전부지요.”
내 말에 로델린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그런 거 필요 없습니다. 물려받지 못해 안달이 날 정도로 대단한 유산도 아니고.”
“마틴, 얘야.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뭔지 말해주지 않겠니.”
로델린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 있던 나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제가 없는 레드우드 백작가는 어머니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내 말에 로델린이 잠깐 천장을 응시했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지.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쿠르스트 산맥을 나와, 거처가 정해졌을 때 제가 어머니를 모셔도 괜찮겠네요.”
레드우드 백작가를 나와야 하지 않나? 라고 하는 생각은 계속해서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백작가를 나와서 로델린을 돌보는 일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로델린이 몇 번 크게 숨을 몰아쉰 다음 나를 바라봤다.
“내가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세월을 보내면서 많은 것을 깨닫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지혜 몇 조각은 건졌다.”
“듣고 있어요.”
로델린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말했다.
“수천의 황금을 가져오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믿을 수 없단다. 하지만, 수천의 황금을 수레에 담아 가져온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있지.”
말이 아니라 결과.
“알겠어요. 그때가 되면 어머니도 대답을 준비해 놓으셨으면 해요”
그 뒤로 잠깐 소소한 대화를 잠깐 이어가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머지 이야기는 식사 후에 마저 해요.”
지금은 엘렌을 만나러 가야 한다. 로델린의 방을 나온 나는 곧바로 엘렌의 방으로 향했다.
“뭐야, 빨리도 왔네. 나눌 이야기가 별로 없었던 거야?”
“아니, 해야 할 일을 먼저 끝내놓는 게 버릇이 돼서.”
“들어와.”
엘렌이 옆으로 비켜주고, 나는 그녀의 방 안에 자리 잡고 앉았다.
“중요한 이야기겠지?”
“아니라면 내가 굳이 여기까지 찾아올 이유가 없잖아.”
엘렌의 손에 박혀 있는 보석들이 빛나고, 빛무리가 벽에 엉겨 붙어 처음 보는 글자들을 띄워 올린다.
“자, 밖으로 이야기가 새어나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우리가 찾는 친구는 왕국 기사단장 중 하나야.”
내 말에 엘렌이 잠깐 멈칫하고는 나를 바라봤다.
“잠깐, 확신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국의 기사단장이라고?”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이전에 록밸리 마을에서 있었던 일과, 그 녀석 중 하나와 진중한 대화를 나눠서 얻게 된 정보를 공유해주었다.
“……기사단장들 중 하나라니.”
엘렌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범위가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짓는 게 쉽지는 않은데. 왕국 기사단은 15개잖아.”
15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데.
“수천 명이 될지도 몰랐던 후보가 열다섯으로 줄었으면 나쁘지 않은 성과네.”
최소한, 록밸리 마을에서 개고생하고 다시 수색대 본부로 기어 올라와 쏟아지는 졸음을 견디며 일했던 시간은 보상받은 기분이다.
“수도에 자리 잡은 기사단일 확률이 높아.”
엘렌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다나 힐베른은 왕궁 마법사였고, 수월하게 서로 접촉하기 위해서는 수도에 자리 잡은 기사단 중 하나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아닐 가능성도 있으니, 이전에 내가 말했던 조사는 빼먹지 말고 진행해야 할걸.”
내 말에 엘렌이 하,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네 쪽에서 어머니가 오는 길을 지켜봐달라고 하지 않았다면 벌써 착수했을 거야.”
“하지만, 네가 내 어머니를 보호해 준 덕분에 녀석들이 내 어머니를 노리는 대신 내 쪽으로 소포를 보낸 거야. 그리고 그 소포 덕분에 알아낸 것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엘렌이 작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인정. 그 소포가 아니었다면 네가 수상한 녀석들을 심문해서 조사 범위를 좁히는 것도 불가능했을 테니까.”
돌고 돌아서 엘렌이 내 어머니를 지킨 행동은 결국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녀석을 특정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나저나, 네가 그 칠색 의회인지 내각인지 하는 것들을 잡는 데 힘을 보태야 할 이유는 없는데.”
엘렌이 이 일에 이렇게까지 열정을 보일 이유가 있나? 내 말에 엘렌이 대답했다.
“멀쩡한 사람의 성대를 뽑고, 어린아이의 피를 뽑아내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녀석들이야. 거기에 더해서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왕국 군부에 녀석들의 중역 중 하나가 자리 잡고 있어. 내가 힘을 보태야 하는 이유가 없다고?”
아하, 정의감이 넘치는 아가씨였군. 엘렌은 자기 머리를 휙 한 번 쓸어넘겼다.
“그래도, 틈틈이 보고서를 써두었어. 네 어머니를 무사히 레드우드 백작가의 영지로 보내드리고 나면 그 길로 왕궁으로 향해서, 조사를 시작함과 동시에 네가 한 일에 대한 보상을 요청할 거야.”
“청구할 수 있는 보상 중에 쿠르스트 산맥 전역도 있나?”
내 말에 엘린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바로 나오는 건 힘들 거라고 생각하는데.”
솔직해서 좋네. 나도 같은 의견이었거든.
엘렌이 끄응, 하는 소리를 내고 잠깐 고민하다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뭐 하나 네가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나는 그 말에 엘렌을 바라봤다.
“지금? 어머니를 데려다준 빚의 반제는 내가 쿠르스트 산맥을 나온 다음이 될 줄 알았는데.”
내 말에 엘렌이 후우, 하는 소리를 내고 짐을 뒤적거리다가 종이를 몇 장 꺼내 들었다.
“뭐야 이건.”
“이전에 도움을 조금 받은 사람이 있어. 수도 치안대 소속인 사람인데…….”
수도 치안대라. 왕궁 마법사인 엘렌이 도움을 받을 정도라면 지위가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겠지. 서류를 받아들고 훑어본 나는 입을 열었다.
“사람이 죽었네.”
밤이 깊은 새벽, 5층 높이의 건물 옥상에서 사람이 하나 떨어져 죽은 모양이다. 쭉 내용을 훑어본 나는 서류를 다시 엘렌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타살이군.”
내 말에 엘렌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확신해?”
나는 그 말에 하, 하는 소리를 내고 그녀를 바라봤다.
“못 믿을 거면 보여주지를 말던가.”
“아니, 네 말은 납득 가능한 설명을 해달라는 거야.”
“왜, 치안대에서는 자살로 생각하나 보지?”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 이 서류를 보여준 사람을 제외하면. 밤 중에 옥상의 난간을 수리하다가 미끄러져 죽은 걸로 결론 내린 모양이던데.”
나는 그 말에 아하,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왕국 치안대에 일을 하는 사람이 있기는 한 모양이네. 스스로의 생각에 확신이 없는 걸 보니, 그냥 직감적으로 수상하다고 생각한 것뿐이겠지만. 타살 맞으니까 다시 조사하라고 해.”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하지만 다시 조사하기 위해서는 그럴듯한 이유가 필요한데.”
왜 타살이라고 확정 지었는지 말해달라는 거지?
“신발에 남은 흔적.”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갸웃했다.
“발이 미끄러져 생긴 흔적이잖아. 그렇게 이상해 보이지는 않는데.”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그럼 이런 식의 흔적이 생기지 않아.”
서류에 그려진 그림에 따르면, 죽은 사람의 신발에 생긴 흔적은 'lll' 모양이다. 난간에서 미끄러진 실족사로 꾸밀 생각이었던 모양인데. 난간에 매달려 있다 미끄러져서 생긴 흔적이라면 저렇지 않다.
“실족사했다면 신발에 생긴 흔적은 사선이어야 해.”
발을 디딜 곳이 좁다면, 사람은 게걸음 치는 자세를 취한 채 서게 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미끄러진다면 '///' 형태의 흔적이 남는 게 정상이다.
물론,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이 굉장히 좁다면 미끄러졌을 때 생긴 흔적의 각도가 더 커져서 '三' 형태 비슷하게 나올 때도 있지만.
‘lll' 형태의 흔적은 있을 수가 없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발이 제대로 자리 잡기에 충분한 공간이 있었다는 뜻이다, 미끄러질 이유는 거의 없지.
“누가 먼저 죽인 다음, 실족사로 꾸미기 위해 저런 흔적을 남겨놓은 거야. 그리고 옥상에서 떨어뜨렸겠지.”
내 말에 엘렌이 으음,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이렇게 빨리 답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빨리 답이 나올 만한 사안이었다.
“빚 갚았다고 하기는 내가 창피한 수준이니, 그냥 덤으로 받아둬.”
엘렌은 한 달을 넘게 시간을 투자했는데 그걸 갚는데 3초도 안 걸리면 조금 양심에 찔린다. 말을 마친 나는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