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화
엘렌과의 대화를 끝내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식사가 준비되었다. 로델린이 여기까지 가져온 보람이 있게, 식사는 굉장히 맛있었다.
보기 드물 정도로 신선한 야채와 로즈마리 같은 향신료와 꿀, 발사믹 식초 따위로 맛을 낸 돼지고기 요리. 거기에 곁들여서 먹을 음료까지.
니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했다는 게 바로 이런 뜻이구나.
더럽게 추운 쿠르스트 산맥의 수비대 막사, 그중에서 우리가 자리 잡고 식사하고 있는 이 장소만큼은 잠깐이나마 겨울 대신 가을이 찾아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 조금 더 먹으렴.”
로델린이 내 쪽으로 음식을 더 덜어주려고 하자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너무 많이 먹어서…….”
더 먹으려면 목에 깔대기를 박아넣고 음식을 들이부어야 할걸.
“오실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는데, 와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해요.”
내 말에 로델린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런 말 하지 말거라. 자식이 험한 곳에 있는데 가보고 싶지 않은 부모가 세상 어디에 있겠니.”
글쎄, 멀리에서 찾아볼 필요도 없이 내 아빠 되시는 레온 백작은 어때. 그렇게 대꾸하고 싶었지만 괜히 말짱한 분위기를 망치는 한 마디가 될 것이 뻔하기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올 때는 그렇게 시간이 안 가더니.”
로델린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잠깐 한동안 내 손을 쓰다듬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네 부대 이야기를 하나도 못 들었구나.”
나는 그 말에 아, 하는 소리를 내고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에스칼 지휘대 소속 제7수색대에요.”
지휘대 아래에는 3―4개 정도의 관문 수비대와 하나의 수색대가 소속된다. 그리고 쿠르스트 산맥 국경수비대 사령부가 모든 지휘대를 통솔한다. 대충 그런 식으로 짜여 있다.
“네가 소속된 부대의 대장을 한번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욕심이겠지.”
평범한 상황이라면야 못 할 것도 없긴 한데,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도리안이 자리를 비울 틈이 없을 거다.
“좋은 사람이니, 걱정하시지 않아도 될 거예요.”
혹시 뭐 따로 촌지를 넣거나 그럴 생각이었던 건 아니지? 여기까지 찾아와 준 건 분명히 따뜻한 모성애지만, 거기까지 가면 모성애가 너무 뜨겁잖아. 화상 입겠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와중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수비대장이 들어왔다. 수비대장은 무장한 상태였고, 함께 동행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거, 분위기 이상한데.
“레드우드 백작부인, 죄송하지만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봉화입니까?”
내 말에 수비대장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로델린 쪽으로 돌렸다.
“어머니, 아무래도…… 돌아가셔야 할 것 같아요.”
나는 시선을 돌려 엘렌을 바라봤다.
“잘 부탁한다.”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델린은 잠깐 나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쿠르스트 산맥에서 백작부인의 신상에 문제가 생기는 건 여러 가지로 말이 나올 테니까.
“일이 이렇게 되어버리는구나. 신들도 잔혹하지.”
로델린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나를 한 번 꽉 껴안았다.
“잘 지내렴, 건강하고…… 밥 잘 챙겨 먹고. 사랑한다.”
“어머니야말로 밥 잘 챙겨 드시고, 건강하세요.”
그 대화를 끝으로 로델린은 엘렌과 함께 록밸리 마을로 돌아갈 채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나는 숙소로 돌아가 훌쩍 건물을 뛰어넘어 창문으로 들어간 다음, 필요한 장비를 챙겼다.
“수색대에서는 별말 없습니까?”
이 상황에서 나는 누구 지시를 받아서 움직여야 하는가, 그게 중요하다. 제7수색대로 빠르게 복귀해야 하나?
아니면 여기에서 관문 수비대에서 보내는 증원군과 함께 이동해야 하나.
“바로 복귀하라는 연락이 왔어.”
좋아, 그럼 복귀군.
“알겠습니다. 고생하십시오.”
인사를 마친 나는 곧바로 산맥을 오르기 시작했다. 록밸리 마을에서 어머니와 만났으면 큰일 날 뻔했네. 하긴, 분위기가 면회 같은 거 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긴 했지.
마력을 몸에 돌리며 달리기 시작하자 지독하게 시린 바람이 몸을 타고 돈다.
“왔냐!”
이미 수색대의 다른 대원들은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다. 물론, 나도 짐을 챙겨서 관문으로 내려갔었기 때문에 따로 여기에서 짐을 싸야 할 이유는 없다.
“다 가는 겁니까?”
내 말에 도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수색대 인원 중 꼭 필요한 소수만 남기고.”
그게 다 가는 거잖아. 나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다음 바로 도리안과 함께 이동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랍니까?”
내 말에 도리안이 곧바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팔십 마리란다.”
팔십? 이런 십팔. 나는 그 말에 순간적으로 발을 헛디딜 뻔했다.
“원래 소수 정예로 움직이는 녀석들 아니었습니까?”
하이랜더들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80마리씩이나 뭉쳐 다니는 거야. 뭐 함께 교회라도 다니면서 친해진 건가.
“이유는 모르지. 문제는 그 정도 되는 숫자가 몰려왔다는 거다. 국경수비대 사령부에 비상이 걸렸어.”
그래, 녀석들도 지금 난리가 났을 거다. 산을 타고 움직이면서, 나는 도리안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제5수색대의 작전구역은 포기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우리는 바로 그쪽의 관문으로 향하는 거다. 정확히는 제2관문이야. 제1관문은 일단 시간을 버는 데 집중하고, 우리는 그사이 적절한 대응 방안을 마련해 제2관문에서 하이랜더를 막을 거다.”
80마리나 되는 숫자의 하이랜더를 벽 하나 없는 산에서 막을 수는 없다. 이번에는 바로 수성전으로 나설 생각인 모양이다. 수색대의 전문 분야는 아닌 것 같은데.
“접근하는 부대, 소속을 밝혀주시오!”
성문 위에서 무장한 남자가 우리를 내려다보며 크게 외쳤다.
“제7수색대장 도리안을 비롯한 지원 병력이다!”
신분을 밝히고, 확인이 끝나자 서리가 엉겨 붙은 관문의 성벽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중년 남자 한 명이 도리안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군, 두르밀로 능선 지휘대의 스타니스다.”
깔끔하게 다듬은 턱수염이 인상적인 혈색 좋은 중년이다.
“에스칼 지휘대 예하 제7수색대장 도리안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옆에 서 있는 자는?”
나는 그 말에 인사를 햇다.
“제7수색대 소속 마틴 레드우드입니다.”
내 말에 그가 아하, 하는 소리를 냈다.
“레드우드 백작은 잘 지내나? 그 친구 얼굴 본 지도 꽤 지났군그래.”
옆에서 도리안이 부수적인 설명을 한다.
“소속된 간부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전역하며 새로 받은 녀석입니다.”
도리안의 말에 스타니스는 오호,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한 번 훑어봤다.
“그 나이에 간부라. 훌륭하군, 제 아비를 닮았어.”
레온 레드우드? 별로 닮고 싶은 친구는 아닌데. 어쨌든 저 말은 간단한 인사말 같은 거고, 도리안 대장보다도 높은 지위에 있는 친구니 딴지는 걸지 않는 편이 좋겠지.
그는 곧바로 다시 시선을 도리안에게 돌리며 말했다.
“회의가 있을 예정이니 병력을 대기시키고, 마련된 지휘실로 오게.”
나는 그 말을 듣고 입을 열었다.
“이미 제7수색대에서 파견한 인원은 어떻게 되었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내 말에 스타니스가 잠깐 나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글쎄. 복귀 명령을 내렸으니 곧 돌아오겠지.”
“감사합니다.”
지휘대장 스타니스는 곧바로 돌아갔고, 나와 도리안은 병력들에게 쉬도록 한 다음에 짐을 풀었다.
“그 스타니스라는 지휘대장, 어때 보였냐?”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갑옷 아래에 받쳐입은 고급 산양털 셔츠와 손가락의 반지를 보니 제법 뇌물을 받아먹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손잡이와 몸을 보니 검은 안 잡아본 지 시간이 꽤 지난 것 같더군요.”
“그래?”
“네, 별로 좋은 지휘관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뭐, 뇌물을 받아먹어도 일단 지휘관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면 지금 당장 뭐라고 할 만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단 막아내는 게 중요하니까.
“우린 바로 가자고.”
“저도 갑니까?’
내 말에 도리안이 하,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럼, 간부인 주제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여기에서 있다가 시키는 대로 칼 들고 달려나가서 싸우다 죽으려고 그랬냐?”
“다른 건 다 맞는 말씀이신데, 죽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내 말에 도리안이 쯔, 하고 혀를 차고는 나와 함께 지휘실로 향했다.
지휘실은 꽤 거대했다. 안에는 지도가 몇 개나 놓여있었다. 그중 하나는 스타니스의 자리 바로 옆에 세워져 있다. 보기 편하라는 건가.
그리고 저 구석에 놓여있는 화로 위에는 찻주전자에서 물이 끓고 있다. 스타니스는 자리에 없었고, 다른 사람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있다.
그 와중에, 앉아있던 간부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스타니스의 자리 옆에 놓인 지도로 다가가서 뭔가를 이리저리 옮기기 시작한다.
살펴보니, 지도에 박혀 있는 단대호의 모양이 약간 삐뚤어진 걸 고치는 중이다.
뭐 하자는 거야.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일단 얌전히 앉아서 스타니스가 오는 걸 기다리기 시작했다.
“아, 그래 다들 자리에 왔군.”
문이 열리고 스타니스가 들어오자, 사람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스타니스가 자리에 앉고, 다른 사람들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작전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래, 제4관문 수비대장, 잘 지냈나? 오랜만에 얼굴 보는군그래. 요즘 통 돌아다닐 일이 없어서 말이야.”
정말? 하필 지금 이 상황에 저걸 먼저 물어보는 거야?
“예, 덕분에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넌 또 저딴 질문에 대답하고 있어?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식으로 한 시간 동안 이어진 회의는, 내용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수립된 작전 자체는 간단했다. 성문 걸어 잠그고, 싸운다. 이딴 걸 작전이랍시고 해놓은 걸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자자, 잠시 쉬었다가 하지. 급할수록 돌아가야 하는 법이야. 그나저나, 날씨 한 번 더럽게 춥군그래.”
급할수록 돌아가긴 개뿔, 니 집에 불 나도 그런 개소리를 씨부릴 수 있나 한번 보자.
스타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가고, 나는 도리안을 보고 말했다.
“지금 하이랜더 80마리가 발견된 상황 맞습니까? 혹시 여덟 마리가 잘못 보고된 거 아닙니까?”
내 말에 도리안이 음, 하는 소리를 내고 잠깐 뺨을 긁다가 말했다.
“두르밀로 능선 지휘대 예하 병력들이 고생을 좀 했겠군.”
나는 그 말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간부 중 한 명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있으면 후방에서 지휘에 전념하신다면서 돌아가실 겁니다. 자세한 작전 수립은 그 이후 진행하도록 하죠.”
그래서 뭐, 그럴 거면 여기에 왜 왔는데. 사람들은 왜 다 여기에 모아놓은 건데.
필요 없는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한 글자로 짐이라고 표현한다.
나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밖으로 나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이순신까지는 바라지 않아.”
근데 원균은 너무하지 않냐, 원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