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화
잠깐의 휴식 뒤 다시 시작된 회의는 약 30분간 더 이어졌다.
“좋아, 전장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변수가 많은 법이야. 계획이 잘 수립되었다고 해도 실제로 전장이 변동하면서 계획에 변경점이 있을 수도 있지. 특이사항이 발생하면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하게. 전쟁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야. 각자 자리에서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면 승리할 수 있지. 나는 지휘대 본부로 돌아가서 수립된 작전에 따른 진행 사항의 파악과 지휘에 집중할 테니. 다들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잊지 말도록.”
말은 근사하지만, 작전이 수립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라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까놓고 말해서 저 자식만 없었어도 조금 더 발전적인 대화가 오갈 수 있지 않았을까.
“아, 그리고 제5수색대장. 병사들 훈련 제대로 시켜둬. 군기가 엉망이야. 어떻게 된 녀석들이 지휘대장 얼굴도 모를 수 있냔 말이야.”
녀석은 슬프게도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약 30분 정도의 소위 훈시라고 말하는 잔소리가 이어진 다음에야 녀석은 만족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리고, 도리안이 나를 슬쩍 보고는 중얼거렸다.
“여전히 사람을 잘 보는군그래.”
그러게 말이다. 이런 건 좀 틀렸으면 좋겠는데.
이후, 침묵하고 있던 와중 도리안이 입을 열었다.
“절대로 팔십 마리의 하이랜더가 성문에 힘을 집중할 수 있도록 두면 안 될 겁니다. 관문이 무너지는데 30분도 안 걸릴 거예요. 다들 아시죠?”
도리안의 말에 다른 간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녀석들의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지요. 동의합니다. 안 그래도 수색대장님들의 의견을 물어보려고 했습니다. 괜찮은 생각 있으십니까?”
비로소 작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지휘관이 없어진 다음에야 제대로 돌아가는 군대라. 이건 또 좀처럼 보기 드문 귀한 광경이군.
“관문 안의 발리스타와 같은 장비는 원래 담당하던 수비대의 병사들이 가장 잘 다루겠죠. 인원 편성은 기존 관문 수비대 병력을 위주로 하겠습니다. 아, 발리스타에 사각은 없습니까?”
지도 위에 선이 그려지고, 어디로 부대를 보내고, 무슨 역할을 시킬지가 정해지기 시작한다. 약 40분 정도 의미 있는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하자, 적이 오면 관문을 끼고 막는다! 라는 얼탱이 나가는 한마디로 정리되는 작전 같지도 않던 작전이 마침내 제대로 된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제 보니, 우리도 하이랜더였습니다.”
내 작은 중얼거림에 도리안이 나를 바라봤다.
“뭔 개소리야?”
“머리가 제 역할을 못 하니, 척추가 대신 일을 하지 않습니까.”
내 말에 도리안이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틀린 말은 아니네.”
제5수색대는 피터 부대장과 함께 먼저 파견되었던 인원은 후방으로 빼 휴식을 취하게 하고, 나머지 인원은 관문에서 관문과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가 하이랜더를 발견하면 요격하기로 했다. 시선을 돌려, 성문으로 향하는 하이랜더의 숫자를 줄여야 하니까.
다른 병사들이 안락한 관문 안에서 제발 1관문이 무너지지 않게 해주세요! 라고 비는 와중에 우리는 이 서늘한 쿠르스트 산맥의 골짜기에 몸을 숨긴 채 시간을 죽여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성벽 근처에서 쉬고 있는 수색대의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제7수색대, 이동한다!”
우리는 성벽을 나와 지정된 장소에 은신한 채 저 멀리 1관문 쪽에서 피어오르는 봉화를 살피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갑자기 이리로 이렇게 몰려오는 이유가 뭘까.”
병사들의 은엄폐 상태를 확인하고 돌아오자마자 나를 향해 던진 도리안의 질문에 나는 음, 하는 소리를 냈다.
“날이 추워서는 아닐까요?”
내 말에 도리안이 하,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이 친구야. 너는 쿠르스트 산맥의 겨울이 처음이라서 잘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평범한 겨울이야.”
정말? 그럼 진짜 추운 겨울은 어떤데, 대기 중의 산소가 액화되서 바닥에 막 떨어지나? 이 정도만 해도 북극이랑 비벼 볼 만한 추위라고 생각했는데.
“…….”
나는 뭔가 이상한 시선을 느끼고 제2관문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이런 처망할.”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도 모르게 손등에 헤로스가 남긴 흉터를 쓰다듬었다. 관문의 하늘 위에 떠 있는, 머리에 불을 올린 거대한 피투성이 해골의 면상. 엘렌이 그런 말을 해줬었지.
헤로스와 맞서고 살아남은 자는 전장의 하늘에서 헤로스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어디에 떠 있느냐에 따라 누가 이기는지 알 수 있다.
저 해골 대가리가 제2관문의 하늘 위에 떠 있다는 건…… 우리가 진다는 거다.
“뭐야, 갑자기.”
도리안의 말에 나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왜 지는 거지? 물론 팔십 마리의 하이랜더는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다.
다섯 마리만 발견되어도 수색대에서는 자체 격멸을 포기하고 봉화를 올려 관문 수비대의 도움을 받아 막아내는데, 그런 것들이 팔십 마리나 오니까.
이유 없이 제1관문에서 기를 쓰고 피와 땀을 흘리며 시간을 벌어준 것이 아니다. 그들의 희생 덕분에 증원군이 늦지 않게 제2관문에 도착했다.
그리고, 제2관문에 모인 병력의 숫자는 적지 않다. 인근의 부대에서 끌어모은 병력을 모두 합치면 이 관문을 지키는 병사가 아마 수천은 될 것이다.
심지어 지휘관은 원균이지만 그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괜찮아서 작전도 그럭저럭 실현 가능하고, 성과를 거둘 수 있을 법한 물건으로 마련되었다.
오래 싸워야 할 때를 대비해서 보급도 아래의 관문을 통해서 계속 전달되는 중이다. 머릿수도 충분하고, 실행할 작전의 실현 가능성도 있고, 보급도 안 부족하다.
그런데 진다고? 왜?
“…… 혹시, 들어온 보고 중에 뭔가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까?”
내 말에 도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너도 봐서 알잖아.”
그래, 그냥 물어본 거다. 하이랜더 말고 다른 것에 대한 보고는 없었다. 모든 보고의 초점은 하이랜더에 맞춰져 있다. 그럴 수밖에 없지. 그야, 우리는 원래 하이랜더를 막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니까.
“도리안, 솔직히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몰려오는 하이랜더 팔십 마리, 우리가 절대로 못 막는 수준인데 억지로 버텨보려고 하는 겁니까?”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헬름 협곡을 낀 채 이를 악물고 버티는 로한처럼 말이야. 내 말에 도리안이 대답했다.
“전에 본 적 없는 규모기는 하지만…… 막을 수 있다. 절망적인 싸움은 아니야.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판단하고 있을 거다. 국경수비대 사령부가 가정한 최악의 상황에는 이것보다 더 심한 것도 있어.”
다들 몇 년이 넘도록 하이랜더와 치고받은 사람들이다. 판단이 잘못되었을 확률은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혹시 뭔가를 피해 도망이라도 가는 건가?
그런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럴 리는 없다.
하이랜더와 싸웠던 병사들 천 명을 모아놓고 물어봐도 하나의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하이랜더는 싸움을 피해 도망치지 않는다. 그런 생물이다.
뭐 전사로서의 긍지 이런 걸 떠난 문제다. 뱀이 생체학적으로 후진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거다. 원래 그 자식들은 원래 그렇게 태어난 거야.
“어쩌면 더 올 수도 있겠습니다.”
내 말에 도리안이 응?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더 온다니, 무슨 소리야.”
팔십의 하이랜더는 힘들겠지만 못 막을 숫자가 아니라고 도리안이 단언했다.
하지만 여전히 헤로스의 머리통은 우리의 진영 위에서 웃으며 우리의 패배를 예언한다.
그럼 결론은 뻔하지. 저 팔십 마리의 하이랜더가 끝이 아니라, 더 몰려온다는 뜻이다.
“확실하지 않다면 말하지 말게.”
꽤 확실한 가설이야 인마.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일단 도리안의 말에 동의했다.
“죄송합니다.”
문제는, 왜 그렇게까지 몰려오는지 이유를 도통 모른다는 점이다.
원인을 모르면 해결할 수 없다. 이래서는 환자 증상도 모르고 수술에 들어간 의사 꼴이다.
“도리안, 뭐 그런 전설은 없습니까?”
내 말에 도리안이 응? 하는 소리를 냈다.
“무슨 전설.”
“하이랜더들의 왕 같은 거 말입니다.”
있을 수도 있잖아. 하이랜더는 클랜이라는 단위로 구성된 4―5마리가 함께 몰려다니고, 다른 클랜과는 싸우면 싸우지 절대로 협력하지 않는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몰라서 물어본 거다. 내 말에 도리안이 푸후, 하는 소리를 내고 손을 저었다.
“전혀,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
도리안이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추고 나를 툭 쳤다.
“봉화 연기.”
나는 그 말에 시선을 돌려 저 멀리 제1관문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세 줄기의 봉화 연기를 확인했다. 벌써?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그래. 너무 빨라.”
우리 예상과는 다른데. 작전 회의에서는 적어도 하루 정도는 더 버텨 줄 거라고 생각했다.
관문이 뚫렸다는 뜻이다. 그럼, 제2관문 쪽으로 하이랜더들이 올 것이다. 나는 입에 피리를 물고 짧게 한 번 불었다.
얼어붙은 계곡을 타고 한 줄기 짤막한 피리 소리가 메아리치며 퍼진다. 이걸로 신호가 되었을 것이다.
“먼저 후퇴하는 병력들이 보일 거다.”
뒤따르는 하이랜더가 있으면 바로 달려들어 막아야 한다.
지치고 다친 병사는 휴식과 치료를 병행하면 어떻게든 다시 쓸 수 있지만, 죽은 병사는 다시 쓸 수 없으니까.
“팔십 마리라. 이 정도면 1년 동안 만날 하이랜더를 오늘 다 보는 거 아닙니까?”
내 말에 도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운 더럽게 나쁜 놈아.”
전역이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왔는데 운이 나쁘다니. 난 지금 계 탄 기분이야. 저 멀리에서 희미하게 하이랜더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씨파…….”
무슨 합창이라도 하는 것처럼 득실거리는 목소리의 숫자에 나는 순간적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눈을 감고 잠깐 기다리니, 저 멀리에서 쿵쿵거리는 걸음 소리도 들린다.
“부대장도 여기에서 같이 개고생해야 하는데.”
내 말에 도리안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농담은 그만해두고, 집중해라.”
점점 더 소리가 커진다. 나는 언제라도 뛰쳐나갈 수 있도록 심장에서 마력을 퍼내 몸으로 돌렸다.
“으아아아아아!”
후퇴가 아니라 패퇴라고 하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후퇴하는 병사들의 상태가 안 좋다. 모두가 눈처럼 하얗게 질린 표정을 하고 허겁지겁 제2관문으로의 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상한데.”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규모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그들은 후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서두르는 건 이해하지만 저렇게 공포에 질려서 앞뒤 돌아보지도 않고 도망치는 건 너무 이상하다.
“이봐! 보고는 하고 가야 할 거 아니야!”
도리안이 그 꼴을 보다 못해 은엄폐를 풀고 나와 외쳤다. 도망치던 사람 중 하나가 우연히 그 말을 들었는지, 비명과도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수백, 수백이다! 하이랜더 수백이 몰려오고 있어!”
그 말을 끝으로 다시금 녀석은 비명과 함께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하는 제2관문 위에 떠 있던 헤로스의 머리통이 의미하는 것을 깨달았다.
“후퇴한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여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하이랜더가 팔십이라면 일부의 시선을 돌려 붙잡아두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수백이나 되는 숫자를 상대로 시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정도로 숫자가 많다면, 우리는 10분도 버틸 자신이 없다.
도리안이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도리안의 말을 들은 나는 입에 피리를 물고 후퇴 신호를 날렸다. 곧바로, 수색대는 은엄폐를 풀고 다시 제2관문으로 돌아가는 걸음을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