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화
다시 돌아온 제2관문의 분위기는 초상집과 다르지 않았다. 수백의 하이랜더들이 제2관문을 향해 달려드는 데는 약 한 시간 정도 남았다.
“지원군이 더 필요합니다.”
회의실에 앉아있는 사람 중 누군가가 던진 말에 모두의 고개가 끄덕인다. 이 수성전에 수백의 하이랜더는 상정되지 않았으니까.
“계획도 다시 짜야 합니다. 제2관문의 방어 작전은 높은 확률로 실패할 겁니다. 지휘대가 자리잡은 제3관문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3관문 뒤에 기다리고 있는 건 락밸리 마을이다.
“능선 지휘대 쪽으로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만…… 제3관문에 지원 병력이 추가로 배치되기 위해선 우리가 여기에서 최소한 이틀은 버텨야 합니다.”
이틀, 시간으로는 48시간. 평상시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보냈을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지금은 우리의 발목을 여기에 묶어두는 무거운 족쇄가 되었다.
“최대한 버텨보죠.”
그 와중, 갑자기 관문에 종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무슨…… 벌써?”
회의실에 모여있던 간부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식사도 안 하고 몰려들었다니.”
제1관문 전사자들의 시체로 배를 채운 다음 다시 몰려올 것이라는 게 제2관문 지휘부의 판단이었다. 하이랜더들은 늘 그러곤 하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지휘실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녀석들이 관문의 관측대에서 볼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온 모양이다.
“전원, 전투 준비!”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정해진 자리에 위치한다. 발리스타 위에 거대한 작살이 장전된다.
관문의 성벽 위에 올라간 나는 저 멀리에서 밀려오는 하이랜더의 숫자를 보고는 순간적으로 입을 헤 벌렸다.
“여기가 지옥이구나.”
눈깔이 돌아간 하이랜더들이 고함을 지르며 거대한 무기를 꼬나쥐고 몰려오고 있다. 진격으로 인해 퍼져나가는 땅 울림이 발을 타고 올라와 머리를 때린다.
“화가 난 걸로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하이랜더들은 물론 헐크처럼 언제나 화가 나 있는 자식들이지만, 지금 몰려오는 하이랜더들은 평상시보다 더욱 화가 난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머리통을 뚫고 튀어나올 기세로 스팀이 바짝 오른 하이랜더들이 무작정 돌진하는 광경은 살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투석!”
그 말과 함께 둥, 둥 하고 북소리가 울린다. 관문에 설치되어 있던 투석기가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거대한 돌덩이를 날리기 시작한다.
“으아아아아아아아!”
고함과 함께 자신들을 향해 날아온 돌덩어리를 무슨 야구 선수가 공 쳐 내듯이 후려쳐 박살 낸다.
박살 난 돌덩이들이 녀석들이 몸을 때리지만, 별로 아파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일단 쏟아지는 돌덩어리를 쳐내고 막아내느라 돌격 속도는 약간 느려졌다.
“아파하는 시늉이라도 좀 해주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침을 삼켰다. 물론 관문의 성벽은 허투루 지은 것이 아니다. 내벽, 외벽으로 구분된 이중 구조. 외벽의 높이는 20미터에 달한다.
그 성벽에 설치된 발리스타와 투석기들. 하지만, 그 웅장한 모습도 저 멀리에서 밀려오는 하이랜더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볼링공에 맞기 직전의 볼링핀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발사!”
병사들이 화살을 쏴붙이기 시작한다. 사실, 저건 큰 의미가 없다. 진짜는 화살과 함께 발사된 발리스타의 5미터 길이 작살이다.
하이랜더 한번 잡아보겠다고 돈과 시간을 아낌없이 때려 박아 만들어낸 발리스타가 두웅, 하는 북 때리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크고 굵고 검은 작살을 쏘아낸다.
“크아어아어아!”
정말 다행히도, 그 작살 만큼은 효과가 있었다. 살벌한 소리를 내며 날아간 작살들이 하이랜더의 몸을 쑤시고 들어간다.
화살이 박힌 하이랜더가 잠깐 자기 몸을 살펴보더니 이내 다시 한번 괴성을 지르며 달려든다.
개 중에는 발리스타에 머리통이 박살 난 채로 달려드는 무시무시한 녀석들도 있었다.
“준비하자.”
도리안의 말에 나는 칼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유언 한마디 남기시렵니까?”
내 말에 도리안이 씨발,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부러운 새끼, 넌 그래도 죽기 전에 어머니 얼굴이라도 봐서 좋겠다.”
도리안의 말에 나는 하하, 하고 웃은 다음 검을 든 손을 휙휙 돌린 다음 대답했다.
“그 말, 나중에 묘비에 써드리겠습니다.”
굴러오던 볼링공이 마침내 제2관문이라는 이름의 볼링핀 코앞에 도착했다. 충돌까지 몇 초 안 남았다. 하나, 둘.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하이랜더들이 들고 있는 무기가 성문을 후려친다. 성문이 둔중한 비명과 함께 몸을 떨며 돌가루를 이리저리 흘린다.
“내가, 뒤져도 전역 조건은 꼭 맞춰놓는다.”
수백 마리 중에 설마하니 내가 오십 마리 멱을 못 따겠어.
“투창 준비!”
성문을 두들길 정도라면 투창이 가능하다. 병사들은 활을 내려놓고 투창기에 작은 작살을 끼우기 시작한다.
나도 마찬가지로 투창기에 작살을 끼웠다.
“투창!”
전력을 쏟아 넣어 집어 던진 작살이 쒜에엑, 하는 소리를 내며 성문을 후려치던 하이랜더의 목줄기에 박혔다.
그리고 녀석이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바닥에 떨어진 돌조각을 통째로 들어올린다.
“미친놈이.”
저렇게 큰 걸 나한테 던지겠다고? 돌덩이는 지독한 파공음과 함께 나를 덮쳤다.
“으아아아!”
나는 그런 소리를 내며 검을 들어 올려 쇄도하는 돌덩이를 향해 휘둘렀다. 쿠쿵, 하는 천둥 비슷한 소리와 함께 전신으로 둔탁한 진동이 퍼져나가며 돌덩어리가 박살 난다.
손에 들려 있는 검은 광택의 칼날은 부서지기는커녕 흠집 하나 없다. 입가를 슥 훔친 나는 검을 휙휙 돌린 다음 히죽 웃었다.
“나중에 지옥 떨어지면 헤로스한테 두루마리 휴지라도 한 아름 선물해줘야겠네.”
성문을 두들기는 하이랜더들이 있고, 성벽에 손을 박아넣고 기어오르는 하이랜더들이 있다. 성문은 다소 구겨지기는 했지만 아직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보인다.
지금은 기어오르는 녀석들이 문제다. 휙 하고 성벽의 난간을 뛰어넘은 나는 성벽을 기어오르던 하이랜더의 등줄기에 검을 박아넣었다.
살벌할 정도로 예리한 칼날은 하이랜더의 질긴 가죽을 능히 뚫을 수 있었다. 등줄기에 칼이 박힌 녀석은 몸에 힘이 풀려 바닥을 향해 추락한다.
허공에 만들어진 분신이 나를 향해 검집을 휘두른다. 나는 분신이 휘두른 검집을 발로 밟고 뛰어올라 다시 성벽 위로 돌아왔다.
“후우. 이 정도면 해볼 만한데?”
그때, 거의 열 마리가 넘어가는 하이랜더들이 일제히 성벽의 난간 위로 머리통을 들이미는 모습이 보인다.
“취소.”
나는 어떨지 몰라도, 다른 병사들은 하이랜더들에게 제대로 저항하기 힘든 모양이다.
“어쩌겠어.”
원래 이런 상황에서는 잘 싸우는 놈이 몸 고생을 하는 거다. 나는 성벽을 기어 올라온 하이랜더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세 놈!”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자신의 목을 부여잡은 채 그르륵, 하는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하이랜더를 발로 차, 성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뒤편에서 콰가가가, 하는 공기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려보니 도리안이 내 쪽으로 날아오는 중이었다.
“제3관문의 지휘대에서 연락이 돌아왔다!”
“그런 것치고는 표정이 영 좋지 않으십니다.”
꼭 췌장암 말기 선고받은 표정인데.
“적어도 5일은 버티라고 하던데.”
“지랄하고 자빠졌네.”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5일? 지금 이 상황에서 120시간을 버티라는 거냐.
“저한테 하루만 주신다면 내려가서 지휘대장의 머리를 따고 돌아오겠습니다.”
내 말에 도리안이 혀를 찼다.
“쓸데없는 소리. 어쨌든 우리가 비축한 물자와 인력으로는 절대 그 시간을 버틸 수 없어. 일단, 최대한 버텨보자고.”
도리안이 대답을 하고 나서 성벽을 기어오르는 하이랜더의 머리통에 발을 가져가더니 내려찍으며 바람을 쏟아낸다.
“왜 5일이 필요한 걸까요?”
두르밀로 지휘대의 간부들은 유능한 편이었다. 그들이 최소 이틀이 필요하다고 했으면 그 판단이 맞을 텐데. 3일도 아니고 5일은 좀 수상하다.
“내가 어떻게 알겠냐. 저기 하나 더 기어 올라온다!”
도리안이 가리킨 방향으로 달려간 나는 성곽을 붙잡은 하이랜더의 손가락을 칼로 썰어냈다.
“우리 피해는 어떻게 됩니까.”
“부상자가 이백삼십, 사망이 칠십오.”
얼마 시간이 지난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그만큼의 피해자가 나왔다. 전체 병사의 숫자를 생각한다면 적은 숫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평원에서 서로 치고받는 상황이 아니잖아.
수성전을 하는데 벌써 수성 측의 피해가 그 정도 규모라는 건 도저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래도 발리스타와 투석기 쪽의 피해는 아직 없어.”
도리안이나 나 같은 사람들을 제외하면 제대로 하이랜더를 위협할 수 있는 수단은 그 두 가지다. 그나마 그것들의 피해가 없다는 건 다행이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하겠지. 성문을 두들기고, 벽을 기어오르는 하이랜더들을 보는 와중, 도리안이 입을 열었다.
“리더 같은 게 있는 게 아니야.”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 녀석들은 그냥 무턱대고 달려들 뿐이다. 제대로 된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지시를 받아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가설은 틀렸다. 저 녀석들 사이에 갑자기 왕이 추대된 상황은 아니다.
“…….”
그럼 이유가 뭘까. 쉬지 않고 밀려드는 하이랜더들을 힘겹게 막아내면서도, 내 머리는 한쪽에서 계속 그 의문이 남는다.
해가 저물고, 밤이 깊고, 다시금 해가 떠오른다.
사상자의 단위는 마침내 백의 단위를 넘어 천에 도달했고, 발리스타와 투석기도 하나씩 망가지기 시작한다.
“후우…… 후우…….”
쓰러진 하이랜더의 위에 서서 검을 뽑아 든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상처 입은 성벽과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하이랜더의 고함. 쌓여있는 시체.
어느 것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다 마음에 쏙 들어서 환장할 것 같군. 진짜, 오늘 운세 한번 단단히 조졌네.
“젠장, 성문이!”
그리고, 마침내 그 두꺼운 강철로 만들어진 성문이 한계를 맞이하려 한다. 앞으로 1시간이나 더 버틸 수 있을까.
“후퇴한다.”
지휘대가 우리에게 명령한 시간은 5일이었다. 하지만 관문의 병력으로 버틸 수 있었던 시간은 하루 하고도 절반 정도가 한계였다. 병력을 수습하고, 부상자를 뒤로 보내며 병력은 후퇴할 준비를 서두른다.
“뭐해, 움직여!”
도리안의 외침에 나는 그를 보고 말했다.
“저는 이 근방에 숨어서 잠깐 살펴보다가 뒤따르겠습니다.”
내 말에 도리안이 나를 바라봤다.
“무슨 소리야.”
“이렇게 무턱대고 버틸 수는 없습니다. 저 녀석들이 안 하던 단체행동까지 하면서 성취하려고 하는 목적이 있을 겁니다. 저는 아무래도 그걸 알아야겠습니다.”
내 말에 도리안이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잠깐만 시간을 주시면, 이후 문제없이 제3관문으로 합류하겠습니다.”
내 말에 도리안이 젠장,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알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말해둘 테니, 뭔가를 찾아내면 바로 복귀하도록.”
말을 마친 도리안이 다른 곳으로 달려가고,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짐을 챙겼다.
병력의 후퇴는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관문에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남지 않게 되었다.
“좋아.”
구석에 숨어있던 나는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은신을 사용한 다음 구석에서 나왔다.
곧바로 눈에 보이는 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하이랜더들의 모습이었다. 후퇴할 때 미처 챙기지 못한 물자나, 사람들의 시체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녀석들은 제각기 독립적으로 움직이며, 무너진 잔해를 치우고 이리저리 살핀다.
“뭔가를 찾고 있어.”
녀석들의 행동은 딱 그거다. 찾는 물건이 있다. 그리고, 이 녀석들은 그 물건을 수비대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게 뭔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이 녀셕들의 행동 동기를 확인한 걸로 충분해.
나는 곧바로 제3관문으로 향했다. 하이랜더들은 여기를 다 뒤져본 다음에 찾는 물건이 없다는 확신이 생기면 곧바로 진격을 이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