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화
제3관문에 도착한 나는 신분을 확인받고, 안으로 들어섰다.
“뭔가 찾았나?”
가장 먼저 내 쪽으로 찾아온 건 도리안이었다.
“하이랜더들은 뭔가를 찾고 있습니다.”
도둑맞거나, 빼앗겼거나. 둘 중 하나다. 하이랜더에게서 뭔가를 강탈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니까…… 도둑질당한 거라고 생각한다.
내 이야기를 들은 도리안이 턱을 쓰다듬었다.
“뭔가를 찾고 있다니.”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녀석들이 찾고 있는 물건을 발견한다면, 몰려오는 하이랜더들을 뒤로 물릴 수 있습니다.”
누군가 그 물건을 챙겨서 냅다 두르밀로 산머리까지 달리면 될 것이다. 하이랜더들이 그 뒤를 따라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그걸로 관문은 다시 안전해진다.
“설사 녀석들이 찾는 물건을 알아낸다고 해도, 그 뒤에 그런 미친 일을 누가 하겠나? 분노한 하이랜더 수백이 한 명을 뒤쫓을 거야.”
“하겠다는 사람이 없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그리고 씨팔, 이 지긋지긋한 쿠르스트 산맥에서 전역할 거다.
“하이랜더 수백으로부터 관문을 지켜낸 공적이라고 하면 전역 조건은 충족할 것 같습니다만.”
내 말에 도리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잠깐 나를 바라보다가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이 산맥을 나가고 싶나?”
쿠르스트 산맥에서 나갈 수 있는 몸이 된다고 해서 바로 뛰쳐나가야 하는 건 아니다. 사실, 이 세상에 지금 내가 믿을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리고, 그 많지 않은 사람들 중 대부분은 쿠르스트 산맥의 제7수색대 소속 인원들이다.
“나가고 싶은 게 아니라,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몸이 되고 싶은 겁니다.”
내 말을 들은 도리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물건을 찾는 게 우선이야.”
걱정할 필요 없어. 그건 또 내가 전문이거든.
“스타니스 지휘관은 어디에 있습니까?”
내 말에 도리안이 나를 바라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지휘대장을 의심하는 거냐?”
“하이랜더의 물건입니다. 저 지랄을 하는 걸 봐서는 꽤 애지중지하고 있던 물건이 뻔합니다. 그걸 그냥 어중이떠중이 병사 하나가 몰래 훔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입을 열었다.
“게다가, 조금 부족한 면은 있지만 제3관문은 이미 전투 준비를 마쳤습니다.”
제2관문에서 간부들이 예상했던 것처럼 우리가 어떻게든 이틀을 버티는 데 성공했다면, 제3관문은 전투 준비를 완전히 끝냈을 것이다.
“그래, 다소 부족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하이랜더들을 막아낼 준비는 하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스타니스 지휘관은 5일의 시간을 불렀습니다.”
이유가 뭘까.
“……빼돌릴 생각이라는 거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가능성은 제일 높습니다. 몰래 살펴보겠습니다.”
내 말에 도리안이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상관을 의심하는 건 군대에서는 금기시되는 행위다. 알고 있을 텐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리안 대장은 지금 저에게 화를 내고 있지 않으십니다.”
내 말에 도리안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누가 이 일에 대해 문제 삼거든, 내가 시켰다고 말해라. 책임은 내가 진다.”
또 저런다. 내가 저지른 일의 책임을 왜 네가 지는데? 내가 져야지. 어쨌든 허락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나에게 말했다는 건, 부탁할 일이 있다는 뜻이겠지.”
“제 생각이 맞다면, 스타니스의 지휘실이나 숙소에서 흔적을 찾아낼 수는 있겠지만…… 찾는 물건을 확보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이랜더들을 저렇게 미쳐 날뛰게 하는 물건은 이미 마차 같은 걸 시켜서 뒤로 빼돌렸을 것이다. 그게 완전히 안전한 장소까지 도달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5일이었겠지. 그래서 스타니스는 우리에게 5일을 버티라고 했을 테고.
내 이야기를 들은 도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찾으러 가야겠군.”
“네. 그러기 위해서 저는 전장을 이탈해야 합니다.”
멋대로 전장을 이탈하면 탈영이다. 하지만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이탈한다면 탈영이 아니지.
내 말에 도리안이 입맛을 다셨다.
“그걸 어떻게든 해달라는 거군. 알았다. 지휘대장의 거처를 비롯한 장소를 살펴본 다음 다시 찾아와. 그 사이 나는 문서를 꾸며 놓을 테니.”
“감사합니다.”
“감사는 개뿔. 하이랜더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고마워할 이유는 없어. 그나저나, 지휘대장의 거처에 들어갈 자신은 있나? 몰래 들어가는 건 힘들 텐데.”
아, 그 정도는 일도 아니지.
“나름대로 생각해 둔 게 있습니다.”
대화를 마친 다음 나는 곧장 스타니스가 머무르는 거처로 향했다.
“무슨 용무십니까?”
“지휘대장과 긴히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가 내 말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지휘대장님께서는 지금 휴식 중이십니다.”
“그래, 씨발 휴식이 필요하겠지! 우리는 지금 하루 종일 잠도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으면서 개고생을 했지만 겁나 쌩쌩하거든! 하지만 우리 위대한 지휘대장께서는 제3관문에서 뭘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개같이 피곤하실 거야. 그렇지?!”
내 외침에 지휘대장의 숙소를 지키던 병사가 당황한 표정을 짓고 문 쪽을 바라본다. 분명히 내 말은 안에서 쉬고 있을 스타니스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밖에서 말하는 새끼 누구야.”
문 너머에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마틴 레드우드입니다.”
그 말에 함께 문이 벌컥 열리고 스타니스가 튀어나왔다.
“스타니스 지휘대장님,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내 말에 녀석이 내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말한다.
“독대를 원한다면 쿠르스트 산맥에서 5년은 더 의무를 수행하도록. 한낱 수색대 소속 간부 녀석이.”
그러시던가. 문이 열렸으면 나는 그걸로 만족한다. 내 시선은 스타니스를 바라보는 대신 아래로 향했다.
문 앞에 끌린 자국이 있다. 무거운 물건이다. 둥근 물건이군. 지름은 35cm 정도. 그 정도 크기인데 바닥에 끌린 자국이 남을 정도라면 아마 옮긴 물건의 높이가 제법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끌린 자국과 함께 남아있는 가루를 보면 재질은 대리석이다.
가벼웠다면 그냥 들고 옮겼겠지. 이렇게 끌어서 옮겼을 리 없다. 사람을 많이 썼다면 물론 들어서 옮길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의 손을 빌리지 않고 몰래 옮겼다는 거다.
살펴보던 와중 쫙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머리가 옆으로 확 돌아갔다. 뺨이 욱신거린다. 거참, 열 받게 싸대기를 때리네.
“자네의 상관 모독에 대한 처벌은 현 상황 종료 후 내가 직접 하지. 이후, 쿠르스트 산맥에서 몸 편히 있을 생각은 포기하도록.”
그 말을 끝으로 문은 닫혔다. 상관없다. 궁금한 것들은 전부 확인이 끝났으니까.
나는 얻어맞은 뺨을 슬슬 쓰다듬으며 앞을 지키는 병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휘대장님의 방은 보통 언제 치우지?”
내 말에 병사가 잠깐 멈칫한다. 나에게 대답을 해도 괜찮은지 고민하는 거다. 이내 청소 정도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는지 병사가 순순히 대답했다.
“매일 저녁에 한 번씩 청소합니다.”
좋아, 방금 문 근처에 돌가루가 남아있었다는 건 최소한 어제저녁 이후 시점에 옮겼다는 뜻이다. 아마 밤이 아닐까 싶은데.
“고맙다. 고생해라.”
말을 마친 나는 곧바로 도리안에게로 향했다.
“너 인마, 뺨이 왜 그래.”
“안을 조사하는 대가로 한 대 맞아줬습니다.”
내가 알아낸 것을 도리안에게 말해주자, 그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 눈썰미라면 신뢰할 수 있지. 마차가 관문을 오간 기록이 남아 있을 거야.”
“바로 찾아보겠습니다. 제가 부탁한 건……?”
내 말에 도리안이 곧바로 서류를 넘겨주었다.
“아, 스타니스 지휘대장의 거처를 살피기 위해서 한 일이 있는데.”
스타니스가 문을 열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한 일을 말하자 도리안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인마, 만약에 스타니스 지휘대장의 방에서 수상한 점을 찾아내지 못했으면 어쩌려고 했냐.”
내가 생각 없이 일을 벌이지는 않아.
“제가 죽인 하이랜더의 공적을 스타니스 지휘대장에게 드리고 싶다는 식으로 무마하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따로 찾아가서 이야기를 드리고 싶어도 방법이 없기에, 어쩔 수 없이 폭언을 한 걸 부디 용서해달라고 빌면서.”
원래 그런 친구들이 공적 쌓는 데는 욕심이 하늘을 뚫는 법이거든. 장담하는데 그 정도 폭언은 그냥 넘어가 줬을걸. 오히려 나를 좋게 봤을 가능성도 있고.
어쨌든 내가 물어보고 싶은 건 따로 있다.
“스타니스가 제가 전장을 이탈하는 걸 막지 않을까요?”
눈 밖에 난 녀석이잖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내 말에 도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에스칼 지휘대 소속이지, 두르밀로 지휘대 소속이 아니야. 스타니스 지휘대장이 내가 필요에 따라 수색대 소속 병력에게 내린 명령을 취소시킬 권한은 없어. 물론, 나도 스타니스의 눈 밖에 나긴 하겠지만”
어차피 녀석의 저지른 일이 이번 사태를 초래했다면 스타니스는 끝장이다. 어차피 망할 놈 눈 밖에 나는 건 아무렇지 않다.
“추적할 수는 있겠나?”
“스타니스의 거처 주변에 왔었던 마차는 한 대밖에 없어요. 그 마차 자국을 쫓으면 됩니다.”
계속되는 싸움에 몸도 피곤하고, 마력도 많이 사용했지만…… 어떻게든 마차보다는 빨리 달릴 자신이 있다.
“타고 갈 말 한 필을 준비해 놨다. 탈 줄 알지?”
이전 세상에서 몽골을 갈 일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배운 기억이 있다. 이전에 하던 일이 남들이 돈 주지 않는 이상 해보기 힘든 경험을 공짜로 하는 일이 많았거든.
물론, 몸에 마력을 돌리기 시작하면 달리는 말 정도의 속도는 낼 수 있지만, 쉬지 않고 싸우느라 마력이 많이 빠져나갔다. 사용한 마력이 다시 돌아오는 걸 기다리기 위해서라도 말을 타는 편이 좋다.
“감사합니다. 다녀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밖으로 나와 말을 타고 흔적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질주하는 말 위에서, 몇 시간 동안 내 시선은 바닥에 남아있는 마차의 흔적에 고정되어 있었다.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 마차는 그냥 말을 타고 달리는 것보다 속도가 느리니까.
“…….”
마차는 길을 타고 내려와 록밸리 마을을 지나쳤다. 쿠르스트 산맥의 살벌했던 추위는 록밸리 마을을 넘어서면서 많이 누그러졌다.
“워어.”
몇 시간이나 달렸을까. 군용으로 잘 키워진 말도 마침내 기력이 다해서 입에 게거품을 물고 숨을 헐떡이고 있다.
“꽤 많이 따라잡은 것 같은데.”
남아있는 흔적들이 선명하고, 신선하다. 말의 상태를 살펴본 나는 혀를 차고 녀석을 버렸다. 몇 시간 사이, 내가 소모했던 마력들은 다시 원래 주인을 찾아 몸으로 돌아왔다.
지금부터는 그냥 달려도 괜찮을 것 같다.
“고생했다, 전역해.”
나는 말의 엉덩이를 한 번 툭 친 다음 흔적을 따라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