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48화 (48/275)

048화

타고 달리던 말과 헤어진 다음 약 두 시간 정도 흔적을 따라 더 달리자,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왔다.

그리고, 마차의 흔적은 나를 활엽수림으로 인도했다.

어두운 활엽수림에 만들어진 너절한 도로를 얼마나 더 뒤쫓았을까. 저 멀리에 피어오른 연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몸을 숲속에 숨기고 잠깐 숨을 몰아쉬었다. 흔적의 선명함을 생각해보면,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에 목적한 마차가 있을 확률이 높다.

“오늘은 여기에서 쉴 모양이군.”

팔자 한번 편하다. 누구는 죽을 고생을 하며 싸우다가 잠도 못 자고 이 녀석들을 뒤쫓았는데, 이 자식들은 편하게 퍼질러 쉬고 있어? 괘씸하기 짝이 없네.

“좀 살펴볼까.”

불까지 피운 이상 바로 출발하지는 않을 것이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녀석들은 오늘 여기에서 야숙을 할 생각이겠지. 그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주변을 살펴볼 시간이 충분하다.

숨과 발소리를 죽인 나는 몸을 낮추고 조심스럽게 연기가 피어오르는 장소로 향했다.

“…….”

이동하던 와중 이상한 흔적을 발견한 나는 잠깐 몸을 움찔했다. 자작나무의 하얀 껍데기 위에 남아있는 발자국.

이 나무 위에 누군가 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다. 그건 이 나무 위에 있는 녀석도 마찬가지겠지. 이 위에 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변 경계를 서는 게 아니다.

이건 매복이다. 몰래 숨어서 누군가 마차로 접근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다. 예를 들면 나 같은 녀석 말이지. 내가 마차를 덮치려 들면, 이 녀석을 포함해 숲속에 숨어있던 녀석들이 행동을 개시할 거다.

이 주변에 몇 명이나 더 숨어있는지 알아내야겠다.

그리고, 약 다섯 시간에 걸친 조사가 시작되었다.

“열 명이라.”

숲속에 숨어있는 녀석들은 열 명이다.

새벽이 깊어지고, 마차 근처에서 타오르던 모닥불은 잔불이 되어 희미한 연기 줄기만을 피워올린다. 마차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잠든 모양이다.

안전한 장소로 이동한 나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주변을 정리하는 게 우선이겠지.”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숨어있는 녀석들을 정리하다가 들키면 그 즉시 타임 어택으로 넘어간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들킨다면 숨어있던 녀석들이 내 쪽으로 달려들겠지. 그 사이 마차는 다시 움직일 거다.

은신을 사용하는 건 큰 의미가 없다. 어차피 심야의 숲은 은신을 쓰지 않아도 눈에 뵈는 게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다. 중요한 건 소리를 내지 않는 거다.

물론 나는 소리를 내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어둠 속에, 어렴풋이 상대의 위치만 짐작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도하는 암습은 까딱 잘못하면 불필요한 소음을 발생시킬 수 있다.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다. 지금 즈음이면 제3관문에서는 밀어닥친 하이랜더들과 싸우느라 난리도 아니겠지.

“한번 해보자고. 이것보다 더 개 같은 상황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생각해보면 이런 뒷치기는 오히려 내가 몇 년이나 해 먹었던 일이잖아? 그냥 막싸움보다 훨씬 더 잘할 자신 있다.

잘 갈아놓은 단검을 한 자루 꺼내든 나는 한 번 심호흡을 크게 한 다음 움직였다.

* * *

벌써 몇 시간이나 나무 위에서 이러고 있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언제 오는 거지.

내려진 지시는 간단했다.

[마차를 노리고 누군가 찾아올 테니, 그 녀석의 숨통을 끊어라. 발현점에 도달한 실력자다. 실체가 있는 분신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목표물을 시선에 잡아두는 데 성공해도, 언제나 사각에 대한 경계를 잊지 않을 것.]

남자는 나무 위에 자리 잡은 채 피가 제대로 통하지 않는 다리의 발가락을 천천히 꿈지럭거렸다.

내려진 지시에 따르면 예상 습격 시점은 마차가 숲속에서 야숙을 막 시작했을 때였다. 하지만, 벌써 그 시점으로부터 몇 시간이나 지난 상황이다. 어쩌면, 이번에는 내려진 지시의 예측이 틀렸던 게 아닐까?

남자가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 근처에서 부스럭, 하는 소리가 들렸다.

왔나? 나무 위에 숨어있던 남자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봤다.

……하지만, 밤의 숲은 지나치게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금 들린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신경이 곤두선다. 짐승인가, 아니면 우리의 목표가 마침내 도착한 건가.

머리 위에서,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이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인가?

“……?!”

하지만, 바람이 불었다면 머리 위에서만 소리가 나면 안 되는데. 곧바로 놀라서 남자는 시선을 급하게 돌렸다.

어둠 속에서, 거꾸로 매달린 형체가 보인다. 입이 막히고, 목줄기를 따라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진다.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은 한 가지였다.

어떻게? 지시에 따르면 녀석은 실력 있는 기사라고 말했다. 하지만, 암습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는데.

심장에 구심점을 박아넣은 다음, 2년간 은엄폐와 암습을 훈련받은 자신이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하고 당하다니?

머리 속을 떠돌던 질문은 의식이 멀어지며 덩달아 흐려진다. 그리고, 남은 건 나무 위에 아슬아슬하게 균형이 잡힌 채 걸려있는 시체 한 구뿐이었다.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천천히, 아무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마차를 둘러싸고 시체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 * *

마지막.

나는 덤불 속에 숨어있던 녀석을 위에서 아래로 덮쳐 내리며 관자놀이에 단검을 쑤셔 박고, 한 번 휘저었다. 이 녀석이 마지막이다. 끄으……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눈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쉬이, 하는 소리를 냈다.

“아빠가 일찍 자라고 말 안 하든?”

단검을 뽑아내 휙 털자, 피가 바닥에 뿌려진다. 시체의 옷에 단검을 문질러 남은 피를 닦아낸 나는 다시 허리춤에 단검을 끼워 넣었다.

“1시간 30분이라.”

너무 조심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서두르다가 일을 그르치는 것보다는 느려도 확실한 편이 좋지. 이 녀석을 끝으로 더는 없다. 나는 시체의 몸을 뒤져보았다.

시체의 상의 안주머니에서 편지 한 통이 발견되었다.

“이건 나중에 읽어봐야겠군.”

편지를 주머니에 구겨 넣은 나는 마차로 다가갔다. 사람들을 깨울 필요는 없다. 나는 마차의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이건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원통 모양의 돌덩이였다. 높이는 1.5미터 정도다.

손을 내밀어 한번 쓸어보니, 표면에 뭔가가 잔뜩 새겨져 있다. 뭐지, 비석 같은 건가. 무슨 용도지. 만져도 별다른 일이 없는 걸 보니 무슨 마법적인 처리를 해놓은 물건은 아닌 것 같다.

“후읍…… 음?”

들어 올려본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무거웠지만, 크기를 고려해본다면 이상할 정도로 가볍다. 지름 30cm에 높이 1.5미터짜리 통짜 대리석 기둥이라면 이것보다는 훨씬 더 무거울 것 같았는데.

대리석 기둥을 살펴보던 나는 기둥의 머리 부분에 뭔가 걸리는 감촉을 느꼈다.

꽉 잡아 돌리자 둔중한 소리와 함께 원통형 기둥의 머리가 들어 올려진다. 뚜껑 같은 건가. 뚜껑을 딴 원통 안에는, 양피지와 비슷한 수준으로 얇게 펴진 가죽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이래서 크기에 비해 가벼웠군.”

나는 다시 원통의 뚜껑을 닫은 다음, 돌렸다. 돌덩이가 서로 단단하게 맞물려 잠긴다. 때려 부수지 않는 한 뚜껑이 분리될 일은 없어 보인다. 잠깐 그 대리석 기둥을 보던 나는 작게 신음했다.

“이걸 짊어지고 달려야 한다니.”

끔찍하군. 물론 마부를 깨워 마차를 통해 옮긴다면 내가 힘을 쓸 이유는 전혀 없지만, 마차는 마력을 활용해 달리는 나보다 느릴 것이다.

숲을 나가서 한 30분 정도 더 달리면 민가가 몇 채 모여있었던 기억이 있다. 그 집들 중 하나에 지게가 기대어져 있었지.

일단은 거기까지 그냥 통으로 옮기고, 거기부터는 지게를 써야겠다. 물론 민가에 사는 사람들은 내 아이디어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소유주의 동의 같은 걸 받을 상황이 아니다.

“해보자고.”

인생 참 거지 같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문제의 대리석 기둥을 들어 올려 어깨 위에 올렸다.

“크흐. 죽여주네.”

이 일 끝나고 나면 도리안이나 피터가 뭐라고 하건 상관없다. 며칠 드러누워서 아무것도 안 할 거다.

오른쪽 어깨로 대리석 기둥을 받친 다음, 팔로 단단히 고정시킨 나는 조심스럽게 마부를 비롯해,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배낭에서 촛농으로 봉인된 편지를 한 통 찾을 수 있었다. 촛농에는 선명하게 두르밀로 지휘대장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기둥뿐 아니라 이 편지도 배달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편지를 안주머니에 넣은 나는 잠들어 있는 마부를 보며 웃었다.

“잘 자고 있으렴.”

이걸로 끝이다. 어지간한 여자만 한 크기의 대리석 원통을 들어 올린 나는 마력을 쏟아 넣으며 숲속을 벗어났다.

“허억…… 허억…….”

더럽게 무겁네 진짜! 해가 희미하게 밝아오는 새벽녘, 민가 앞에 도착한 나는 옆에 원기둥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민가 옆에 기대어져 있는 지게 위에 원기둥을 올리고, 밧줄로 단단히 묶었다.

“당신 뭐 하는 거야?!”

그 소리를 듣고 튀어나온 남자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좋아, 협상의 시간인가. 나는 검을 뽑아 들고 그를 바라봤다.

“지게랑 목숨을 함께 내놓을래, 아니면 지게만 내놓을래?”

내 말에 그가 어물거리다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난다.

협상 종료. 남자는 지게만 주고 목숨은 보존하는 편이 현명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지게에 고정한 원통을 이리저리 움직여 본 나는 단단하게 고정된 것을 확인하고 지게를 짊어졌다.

아, 훨씬 편하네. 이거면 어떻게든 제3관문까지 달릴 수 있을 것 같다. 역시, 지게는 위대한 발명품이야.

이제부터는 진짜 아무 생각 없이 달리는 일만 남았다. 지게를 짊어진 나는 미친 듯이 달리며 한탄했다.

“훗날, 사람들이 이 위대한 노가다를 기려는 의미로 스포츠를 하나 만들어 줄지도 몰라.”

마라톤 비슷한 걸로다가 말이야. 그런 쓸데없는 생각과 함께 지게를 짊어지고 달리면서, 나는 숲속에 숨어있던 시체에서 건진 편지를 열어 내용을 확인한 다음 얼굴을 구겼다.

“암호문?”

일 참 잘되어가네. 하긴, 나름대로 지령서 같은 물건인데 거기에 대놓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글줄을 써 놓으면 안 되긴 하지. 숫자가 한가득 적혀져 있는 내용을 훑어본 나는 혀를 한 번 찼다.

“딱 봐도 코드북 암호잖아. 이러면 그냥은 못 풀어내지.”

암호를 주고받는 사람들이 미리 사용하기로 정해둔 코드북이 없으면 해독할 수 없는 물건이다. 지금 나에게는 그냥 쓸모없는 숫자 덩어리가 적힌 종이 쪼가리일 뿐이다.

“하지만 녀석들의 몸을 뒤졌을 때 코드북 비슷한 게 튀어나오지는 않았는데.”

고로, 코드북은 따로 만들어 놓은 책자가 있는 게 아니라 세상에 굴러다니는 무수한 책들 중 한 권이라는 뜻이다.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책이어야 할 테고.”

뭐 초판으로 딱 10권 나온 귀한 책 따위를 코드북으로 쓴다면야 들킬 염려는 거의 없겠지만, 암호문을 받았을 때 해독하기가 난감하다. 책이 귀하다는 건 보내진 암호문을 해독할 길이 요원하다는 뜻이니까.

“성경 같은 게 역시 제일 가능성이 높을 텐데.”

진짜 성경을 말하는 건 아니고, 이 세상에도 대중적으로 흥하는 종교 같은 건 있을 거 아니야.

당연히 그런 종교의 말씀을 담은 책이라면 어지간한 규모의 마을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있겠지. 다른 말로는, 이 세상에서 가장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책이라는 뜻이다.

“일단, 가서 생각하자고.”

지금 그거 말고도 당장 해결해야 하는 일이 산더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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