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화
록밸리 마을로 들어가는 어귀에서도 한눈에 보일 정도로 거대한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마을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모두 짐을 싸서, 나와는 정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불안하겠지. 제3관문이 밀리는 순간 그 소문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하이랜더들이 록밸리 마을에 사는 선량한 시민들을 발로 짓밟은 감자칩처럼 으깨놓을 테니까.
“긍정적인 점은 아직 늦지 않았다는 거고.”
화염과 연기가 치솟는 위치는 록밸리 마을이 아니다. 마을이 아직 안전하다는 건 제3관문이 아직 안 뚫렸다는 뜻이다.
부정적인 점은…….
“피곤해 뒤질 것 같다는 거지.”
내 몸뚱어리가 말이 아니다. 말로 표현하자면 대리석 기둥을 지게에 짊어지고 수십 킬로미터를 달려왔다, 라는 간단한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지만, 그 문장이 실현되기 위해서 소모해야 했던 마력과 체력, 정신력은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었으니까.
“후우…….”
허리춤을 뒤적거려 물통을 꺼내든 나는 이내 인상을 팍 쓰고 물통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수통에 물도 없네. 씨팔. 텅 비었잖아. 이거 못해도 안에 1리터는 들어갈 텐데, 그 많은 물을 누가 다 처마신 거야.
록밸리 마을은 사람이 모두 도망쳐서 그런지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있을 텐데…….”
나는 비틀거리며 집주인이 버리고 떠난 오두막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있다.”
쿠르스트 산맥에서 채취되는 야생 커피 열매. 당연히 그냥 커피 열매는 아니다. 쿠르스트 산맥 특산품은 언제나 뭐가 달라도 다르거든.
씨앗의 카페인 말고, 과육에는 조금 더 특별한 성분이 함유되어있다. 아마, 그 특별한 성분만 따로 추출해서 고순도로 정제한다면 삼합회나 마피아들이 참 좋아할 만한 물건이 나올 것이다.
의사나 교회의 사제를 찾아갈 돈이 없는 서민들에게 있어서는 진통제 겸 상비약 같은 물건이라서, 어지간한 민가를 뒤져보면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고 피터에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피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씨앗째 열매를 한 줌 씹어먹은 나는 민가의 물동이에서 물을 좀 마시고, 수통을 채웠다.
“아, 약빨 온다.”
빠져나가려고 하던 혼을 쇠사슬 같은 걸로 꽁꽁 묶어서 억지로 머릿속에 구겨 넣고 가둬놓은 것 같은 기분이다.
어떻게든 정신줄을 붙들고는 있는데, 이게 건전한 방식으로 붙들어 놓은 건 절대로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푸후.”
고개를 휙휙 흔든 나는 양 뺨을 손바닥으로 한 번 쫙 하고 친 다음 다시 지게를 짊어지고 달렸다.
이제 거의 다 왔다. 록밸리 마을을 벗어난 나는 다시금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평야를 달릴 때 보다 훨씬 더 힘들지만, 퍼먹은 커피 열매가 피로로 인해 무너지는 육신을 억지로 붙들어 놓았다.
제3관문에 다가갈수록, 전장의 소리는 점점 더 커진다. 마침내 마주한 제 관문의 성벽. 나는 그 성벽 위에 펼쳐진 하늘을 보고 낮게 웃었다.
“좋아, 제대로 맞췄군.”
헤로스의 머리통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하이랜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하늘 위에 떠 있는 것도 아니다. 이기는 편도 없고, 지는 편도 없다.
그렇다는 말은 무승부. 침을 삼킨 나는 성벽을 향해 있는 힘껏 달리며, 성벽 아래에 분신을 만들었다. 분신은 양손으로 겹쳐 모은 채, 내 뜀틀 역할을 해줄 준비를 마쳤다.
“으아아아!”
그런 외침과 함께 분신의 손 위에 발을 올리고, 힘을 빡 주었다. 몸이 붕 떠오르고, 성벽 아래에 자리 잡은 분신이 흩어진다.
하지만, 성벽을 넘기에는 힘이 부족하다. 나는 손을 뻗으며 다시 한번 분신을 만들었다. 분신이 내 손을 잡고, 그대로 확 끌어 올린다.
“으그윽…….”
가까스로 성벽을 기어오른 나는 곧장 주변을 훑어 도리안을 찾기 시작했다.
“마틴?”
먼저 발견한 건 후방에서 부상자를 치유하던 피터였다.
“부대장님, 대장님은?”
피터가 내가 등에 짊어진 대리석 기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젓고 대답했다.
“성벽에서 교전 중이다. 등에 짊어진 그건 뭐야?”
뭐긴 뭐야. 나는 히죽 웃으며 손을 뻗어 지게에 얹어진 대리석 기둥을 툭 하고 쳤다.
“하이랜더들이 단체로 밀고 내려왔던 이유죠.”
말을 마친 나는 지게를 옆에 기대어 놓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 사이, 저 멀리 보이는 성문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래, 제2관문에서도 저 소리가 들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졌는데 말이지.
“서둘러야겠네. 부대장, 간만에 얼굴 봐서 반가웠습니다.”
인사를 마친 나는 지게를 짊어지고 하이랜더들이 두들기는 성벽을 향해 달렸다.
“마틴, 이 새끼.”
병력을 뒤로 물리라고 소리치던 도리안이 내 얼굴을 확인하고 히죽 웃었다. 그리고, 내가 등에 짊어진 기둥을 보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거였냐?”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도리안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이건?”
“스타니스가 마부에게 건네주었던 편지입니다. 아마, 이 돌기둥과 함께 배달할 생각이었던 모양입니다.”
내 말에 도리안이 하, 하는 소리를 내고는 편지를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이걸 건네주는 대신, 대가를 약속받았던 모양이군.”
“편지와, 이후 스타니스의 처분에 대해서는 맡겨두겠습니다. 저는 할 일이 있어서.”
내 말에 도리안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겠냐, 차라리 내가 갈 테니 너는 쉬어.”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이건 제가 하는 편이 좋습니다.”
도리안도 물론 이 대리석 기둥을 들고 두르밀로 산머리까지 향할 수는 있을 거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나는 은신을 사용해서 내 뒤를 쫓아오던 수백의 하이랜더들을 피해 도망칠 수 있다. 하지만 도리안은 그게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피터에게 최소한의 회복이라도 받아. 아직, 잠깐이라면 더 버틸 수 있어.”
“돌아와서 받죠.”
그리고 내가 봤을 때는 더 버티는 건 딱 봐도 무리야. 말을 마친 나는 지게를 짊어진 채 성벽 위로 기어 올라가 외쳤다.
“어이, 야만인들아!”
나는 그런 외침과 함께 등에 짊어진 지게를 자랑하듯이 보여주었다.
“이게 뭘까?”
그와 동시에, 성벽과 성문을 미친 듯이 두들기던 성난 하이랜더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 쪽으로 쏠렸다. 동시에 이어진, 소름끼치는 침묵.
“술래잡기라. 정말 하기 싫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린 다음, 군마를 먹이는 건초 더미를 한가득 들어 올려 대리석 기둥을 감쌌다.
“다음은…….”
성벽 위에 아직 작동하는 투석기 쪽으로 다가갔다.
막 장전을 마친 투석기를 확인한 나는 투석기에 장전된 돌을 치워버리고 그 위에 올라탔다.
“발사해, 친구. 최대한 멀리.”
내 말에 투석기를 조작하던 병사가 멍한 표정을 짓는다.
“쏘라고 새끼야. 귀가 먹었냐?!”
이 기둥을 들고 걸어서 하이랜더들 사이를 빠져나가는 건 말도 안 되는 계획이다.
내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병사가 어쩔 줄 몰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지시대로 이행해!”
도리안의 외침에 녀석이 움찔하더니 투석기의 각도를 조절한 다음, 눈을 질끈 감고 발사했다.
나는 거대한 돌기둥을 끌어안은 채, 하늘을 날았다. 쐐에에에엑, 하는 공기 가르는 소리.
시선을 아래로 돌리니, 하이랜더 수백 마리가 내가 날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좋아, 좋아…… 여기까지는 계획대로야.”
다음은, 속도를 줄여야 한다. 이 속도로 땅에 처박히면 양다리가 다 아작날 거다.
나는 분신을 만들어내서 내 쪽으로 마구 돌격시켰다. 분신이 내 몸에 부딪히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도합 15개의 분신이 순차적으로 내 착지 속도를 줄이기 위해 내 쪽으로 달려들었고…….
“크으으으으…….”
양다리를 타고 퍼지는 통증과 함께, 나는 어떻게든 양다리가 아작나지 않고 땅에 발을 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게는 박살 났다. 다행히, 건초 더미 때문에 대리석 기둥은 지게가 부서진 다음 바닥을 때렸지만 부서지지 않은 모양이다.
“망할, 세상 거지 같아서 못 해 먹겠네!”
나는 건초 더미를 헤치고 대리석 기둥을 들어 올려 어깨 위에 턱 하니 올리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마력을 아낄 수는 없다.
이제, 내 등 뒤에는 성난 헐크 수백 마리가 쫓아오고 있을 테니까. 마력을 아끼다가는 죽는다.
“조상님, 도와줘요.”
엄밀히 말하면 레드우드 가문의 선조들이 내 조상은 아니지만, 마음이 급해지니 내 조상이건 느그 조상이건 상관없이 일단 찾고 보게 된다.
내 뒤에서 하이랜더들의 고함과 함께 땅 울림이 전해진다. 하이랜더들이 전부 나를 향해 몰려오고 있다.
가자, 두르밀로 산머리까지. 아니, 두르밀로 산머리까지 못 가더라도 최대한 제1관문에서 멀어져야 한다.
경사진 길을 달려 올라가고, 이를 악물고 절벽을 기어오른다.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은 뜯어져 나가고, 손에 피가 맺힌다.
“후우, 크헤에엑.”
다행인 건, 미리 먹었던 커피 열매의 약빨이 아직은 돌아서 그렇게까지 통증이 심하지는 않다는 점. 입으로 침을 줄줄 흘리며, 나는 맺힌 땀을 닦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달렸다.
무너지고 박살 난 제2관문을 지나친다. 여전히 내 등 뒤에는 하이랜더의 질주와 고함이 들린다.
시야가 흔들리고, 둔탁한 통증이 양다리를 뒤흔든다. 누군가 내 뒷목을 잡아당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점점 호흡이 힘들어진다.
마침내, 나는 제1관문의 폐허에 도착했다. 바람과 함께 눈이 쏟아지는 중이다. 눈보라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눈보라를 직면한 것과 다를 게 없다.
잠깐 서서 몸을 비틀거리던 나는 수통을 집어 들고 물을 한 모금 마신 다음 입가를 훔쳤다.
“더 가야 해.”
몇 시간이 지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록밸리 마을에서 제7수색대 본부까지 전력 질주하면 한 6―7시간 정도 걸렸었으니까, 아마 비슷한 시간이 지난 상황이 아닐까. 어깨가 빠질 것 같다.
아니, 이 몸뚱어리는 지금 멀쩡한 곳이라고는 한구석도 없다. 이젠 마력도 거의 다 사용했다. 분신을 만든다면, 서너 개 정도 만들고 나면 이제 사용할 마력이 남아있지 않겠지.
관문을 넘어 1시간, 눈이 쏟아지는 비탈길을 손과 발로 기어 올라가던 나는 마침내 눈앞이 검게 변하는 것을 느끼고 그대로 퍽 하고 눈 위로 쓰러졌다.
“우……웨에에에엑.”
정신을 차리자마자 위장이 경련하며 마셨던 물과 씹어 넘겼던 커피 열매의 씨앗이나 과육 따위를 게워낸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머리 위에 쌓인 눈이 우수수 떨어진다.
“기절했었네.”
정신의 퓨즈가 나갔기에, 내 입장에서는 1초와 다를 바 없는 시간이 지나간 것 같은 기분이지만, 쓰러진 내 몸 위에 쌓인 눈은 내가 쓰러지고 나서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걸 알려준다.
흐릿한 시야의 초점이 서서히 돌아온다. 주변을 파악한 나는 작게 한탄했다.
“이런 씨팔.”
수백의 하이랜더가 나를 중심에 두고 빙 둘러 서 있다.
젠장, 이제 이걸 어떻게 벗어난다?
“…….”
하이랜더 중 하나가 다가와 별다른 말 없이 대리석 기둥을 집어 들었다. 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최대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마력이 거의 다 되었다. 은신을 사용할 수 있을까? 사용한다고 해도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까.
녀석이 주변의 다른 하이랜더를 훑어본다. 녀석들이 낮은 음성으로 뭐라고 지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한다.
“오멘티오!”
잠시 뒤, 하이랜더들이 단체로 크게 뭐라고 외쳤다. 오멘티오?
“무슨 뜻이야 그게. 산 채로 갈아 마시겠다는 뜻이냐?”
나는 억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버둥거리며 허리춤의 칼로 손을 가져갔다. 대리석 기둥을 집어 든 하이랜더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녀석의 시선이 내 손과 검에 멈춘다. 그리고 이내 후욱. 하고 하얀 콧김을 뿜어내고 멀어졌다.
“뭐야.”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 녀석뿐이 아니었다. 대여섯 마리씩 뭉친 하이랜더들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 다음 이내 외면하는 것처럼 각자 갈 길을 가기 시작한다.
마침내, 이 눈 쌓인 비탈길 위에는 나 말고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설마, 봐준 건가?”
왜? 다른 녀석들도 아니고 하이랜더잖아. 그런 질문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다음, 나는 다시 쏟아지는 눈 속에 파묻히듯 쓰러져 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