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화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
그리고 피터가 양손을 내 배 위에 올리고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보기에는 심히 정신이 심란해지는 풍경이다.
“뭐 하시는 겁니까?”
그 말에 눈을 감고 있던 피터가 팍 하고 눈을 뜬 다음 나를 바라봤다.
“새끼, 살았구나. 눈에 파묻혀있는 걸 겨우 찾아냈어. 인마.”
기억난다.
“부대장이 살아있는 걸 보니 무사히 끝난 모양입니다.”
내 말에 피터가 픽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또라이 새끼야.”
“또라이라니.”
내 말에 피터가 대답했다.
“대리석 기둥을 짊어지고 투석기로 날아갈 생각을 하는 정신병자가 세상에 몇 명이나 될 것 같냐.”
“한 명은 지금 보고 계십니다.”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뭔가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김이 올라오는 뜨거운 수프다.
“얼마나 지났습니까? 여긴 어디고.”
내 말에 피터가 대답했다.
“록밸리 마을이다. 하이랜더 대량 습격 사태가 일어난 지는 일주일 지났어.”
그렇군. 잠깐만.
“일주일?!”
내 말에 피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르밀로 지휘대장 스타니스는 지금 가둬져 있다. 그리고, 왕궁에서 사람들이 와 있어. 이번 사태에 다들 관심이 많은 모양이야.”
그렇겠지 씨발, 하이랜더가 수백 마리나 몰려와서 제3관문을 뚫고 록밸리 마을에 들이닥치기 직전까지 간 상황이었으니까.
거기에서 제3관문이 뚫리고, 내가 대리석 기둥을 찾아내는 데 실패했으면 그대로 수백의 하이랜더는 그 대리석 기둥을 찾기 위해서 온 왕국을 들쑤시고 다녔을 거다.
“그래서, 몸은 좀 어떠냐. 일어설 수는 있겠냐.”
피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죽을 것처럼 힘들었는데, 막상 정신을 차리고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니 꽤 수월하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회복력이 기가 막히군.”
전부 털어냈던 마력이 다시 내 몸으로 돌아와 있었으니까.
아마, 다시 내 몸으로 돌아온 붉은 가지의 마력이 내 몸 상태가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스스로 움직여 몸을 회복시킨 모양이다.
“쉬고 있으라고, 네가 일어나면 바로 보겠다고 하는 분이 있었으니.”
나는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왕궁에서 오신 분입니까?”
내 말에 피터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뭔가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네 검이다.”
“아, 감사합니다.”
내가 검을 받아들자, 피터가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이불 밑에 검을 숨겼다.
그리고 한 10분 정도 지나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겠네.”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다. 문이 열리고, 근사한 복장을 입은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누구십니까.”
나는 물어보면서 그를 훑어봤다. 오른손잡이, 검을 주로 사용하는 모양이지만 허리에 따로 검을 차고 오지는 않았다.
콧잔등의 눌린 자국을 보니 평상시에는 안경을 쓰는 모양이고, 비염이 약간 있다. 키는 181cm, 몸무게는 75kg. 코담배를 즐기는 것 같다.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좋아, 다행히도 머리를 다치지는 않은 것 같네. 나는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왕도 치안대 소속 제13경비대 부고문 알버트 블루베인이라고 하네.”
일단, 인사를 받은 나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마틴 레드우드입니다.”
나를 보고 있던 그가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몸은 좀 괜찮은지 모르겠군.”
“문제없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말에 그가 작게 좋아. 라고 말한 다음 희미하게 웃었다.
“아, 자네가 제7수색대에 있으면서 작성한 책을 우연히 볼 기회가 있었어.”
책이라. 아, 쿠르스트 산맥의 생태와 지리 관련된 자료들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까,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물건 때문에 눈을 어지럽혔을까 걱정입니다.”
내 말에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태도가 지나치게 공손하군, 이유가 뭔지 궁금한데.”
“그야, 저는 블루베인 경이 자신에 대해 소개한 말을 전혀 믿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믿겠냐? 피터가 말하길, 왕궁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꽤 있다고 했거든. 근데, 그 사람들 중에서 가장 먼저 찾아온 사람치고는 까놓고 말해서 직책이 형편없다.
윗사람들은 물을 마실 때도 자기보다 아랫사람이 먼저 마시려고 들면 불쾌해하기 마련인데. 방금 말한 직책이 전부라면, 이 알버트 블루베인이라는 사람은 참 무모한 친구다.
“이불 아래에 숨겨놓은 검도 나에 대한 경계심 때문인가?”
나는 그 말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블루베인 경이 지팡이에 검을 숨긴 것과 비슷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내 말에 그가 잠깐 자기 지팡이를 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젊은 친구가 의심이 심하군. 그거 병일세.”
의심이라. 알버트가 쥐고 있는 지팡이는 끝이 J 모양으로 휘어진 형태가 아니다. 일자형으로 곧고, 그 끝에 둥그런 장식이 붙어있는 형태다.
나는 이불 아래에 숨겨둔 검의 손잡이를 잡은 채 입을 열었다.
“사람이 그런 형태의 지팡이를 짚을 때는 머리 부분을 감싸듯 쥡니다.”
나는 턱짓으로 지팡이의 둥그런 장식 아래를 가리켰다.
“근데, 그 지팡이에 묻은 손때를 보면 지팡이를 참 이상하게 잡으시는 버릇이 있는 모양입니다.”
마치 끝의 둥그런 장식이 손잡이의 폼멜이고, 그 바로 아랫부분이 손잡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지. 그렇게 잡는 이유가 뭘까?
웃고 있던 알버트의 표정이 굳는다. 나도 웃음기와 예의를 지우고 침대에서 그를 올려본다.
“지적 고맙네. 앞으로는 지팡이에 좀 신경을 써야겠어.”
“뭘 감사까지야. 그래서, 진짜 누구신지?”
아직 공격을 하지 않는 걸 보면 나를 해칠 생각으로 온 건 아닌 모양이다.
“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니야. 치안대와 비슷한 일을 하지만, 조금 더 위험한 일에, 조금 더 더러운 방식을 쓰지.”
자세하게 말해 줄 생각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대충이나마 뭘 하는 친구인지는 짐작할 수 있다. CIA 비슷한 녀석들인 모양이다. 그는 내 쪽으로 뭔가를 내밀었다.
“이런 물건을 발견했던 모양이군.”
나는 녀석이 내민 편지를 보고 잠깐 흠칫했다. 이건, 내가 대리석 기둥을 찾아낸 다음, 근처에 숨어있던 녀석들의 멱을 따고 얻었던 편지다.
전형적인 코드북 암호였기에 당장 해독할 수 없어서 품에 넣어두었었는데, 이게 저 친구 손에 들어가 버린 모양이다.
“원래는 쿠르스트 국경수비대 두르밀로 지휘대장 스타니스의 비리가 밝혀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흥미를 느껴서 왔거든.”
말을 마친 알버트가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당연히, 거기에는 그 비리를 밝혀낸 친구에 대한 관심도 조금은 있었지. 스타니스의 비리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크게 문제 될 거 없다는 판단에 방치 중이었거든.”
일부러 그냥 둔 거였나. 나는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 친구 얼굴이 궁금하기도 하고 적당히 괜찮은 인재다 싶으면 간단하게 권유 정도나 해볼 생각이었지. 원래 이런 권유를 하기 전에는 직접 눈으로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거든. 근데, 와서 이것저것 살펴보다 보니 떡하니 이런 물건이 발견되었단 말이야.”
“편지 내용, 해독하신 모양이군요.”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꽤 이전부터 계속 꽁무니를 쫓고 있던 녀석들이 있었는데. 그놈들이 사용한 적이 있던 암호문이지.”
왕국이 칠색 내각에 대해 아예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다. 그냥, 제대로 모를 뿐이지 뭔가 수상한 느낌 정도는 감지했던 것 같다.
하긴, 곧 죽어도 국가라는 단위로 움직이는 단체인데, 자기 나라에서 뭔 일이 일어나는지 확실히 알지는 못하더라도 낌새 정도는 알기 마련이잖아. 그 정도도 못 하면 그게 나라냐.
“해석한 결과 꽤 재미있는 내용이 나와서 말이야.”
알버트는 내 쪽으로 뭔가를 또 건네주었다. 암호 해석본인가.
[마차를 노리고 누군가 찾아올 테니, 그 녀석의 숨통을 끊어라. 발현점에 도달한 실력자다. 실체가 있는 분신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목표물을 시선에 잡아두는 데 성공해도, 언제나 사각에 대한 경계를 잊지 않을 것.]
그 내용을 확인한 나는 으음, 하는 소리를 냈다. 역시 나를 노리고 있었군. 문제는 이걸 해독한 게 내가 아니라 지금 눈앞에 있는 판타지 CIA 국장이시라는 점이다.
“우리가 몇 년 동안 꽁무니만 쫓아다니던 그 조직이 마틴 레드우드, 자네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양이야.”
“그래 보이네요.”
안 그래도 그 암호문의 내용은 나와 관련된 내용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고 있었다.
“자네의 행적이 그들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 모양이더군.”
“그런가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내가 지금 컨디션이 그렇게 좋은 상태가 아니라서 그런데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는 건 어떨까.
“앞으로 자네에게 사람을 따로 붙여둘 생각이네.”
“저런.”
그건 좀 난감한데. 나도 알게 모르게 숨겨두고 있는 비밀도 많고, 남몰래 일 저지르는 걸 꽤 즐기는 성격이라서.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행동에 제약이 많이 생긴다. 당장, 은신만 해도 이전까지는 목격자가 없거나, 목격자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휙휙 사용했잖아.
근데 보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 그럴 수가 없다.
“마음에 들지 않나?”
나는 그 말에 내 몸을 이리저리 훑어보고 대답했다.
“한창 혈기가 왕성할 나이에 감시를 받다니. 무서워서 어디 딸딸이도 못 치겠군요.”
나름대로 완곡하게 싫다는 의사를 어필했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는 감시 대상이지만 무슨 특별한 혐의가 있어서 감시 중인 건 아니야.”
어쨌든 감시 중이라는 소리잖아. 나는 잠깐 그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알았으니, 협박은 그쯤에서 집어치우고 진짜 찾아온 이유를 말해주시는 편이 어떻습니까. 무슨 제안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까지 시간을 끄시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내 말에 알버트가 픽 웃었다.
“협박이라고 생각하나?”
“네, 저는 머리통에 털 나고 나서 미행을 하기 전에 미행 대상에게 찾아와서 '미행할 거야'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처음 보거든요.”
미행은 몰래 해야 의미가 있는 거다. 근데 찾아와서 말해주다니, 물건 훔치기 전에 경고장 보내는 거랑 뭐가 달라. 니가 무슨 천사소녀 네티냐?
“좀 티가 났나?”
나는 그 말에 다소 불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실 티가 나는 건 둘째치고, 자꾸 사람 간 보는 느낌이 더 마음에 들지 않네요.”
내 말에 그가 대답했다.
“성격이 좀 조심스러운 편이라서.”
“그런가요? 그럼 지금 내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첩보국장 알버트는 둘 중 하나겠군요. 변장을 해서 얼굴을 감췄거나, 아니면 진짜 첩보국장이 아니거나.”
내 말에 알버트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 나는 살짝 허리를 앞으로 내밀며 그를 보고 웃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전자였으면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알버트 블루베인 경이 시간을 질질 끌고 있어도 참은 건 다 이유가 있거든요.”
진짜 첩보국장도 아닌 짜가리랑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