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51화 (51/275)

051화

알버트가 잠깐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나서 어깨를 으쓱했다.

“면상을 보면 아직 사타구니에 털도 제대로 나지 않은 애송이로 보이는데, 머리 쓰는 꼴은 300년은 굴러먹은 노인네 같군.”

무슨 소리야. 나야 할 곳에 털은 다 났어. 인마.

알버트가 자기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가 내렸다. 그리고, 거기에는 방금까지 보고 있던 알버트의 얼굴 대신 내 아버지, 레온 레드우드의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야, 까먹을 뻔했던 얼굴을 다시 보니 참 여러 가지 감정이 드는군요.”

“혹시 아버지 얼굴을 그리워할까 싶어서.”

별로 그리운 얼굴은 아니었다. 다시금 알버트가 자기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가 내리자 다시 아까 보던 그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첩보국장이 맞네.”

물론 알버트 블루베인이라는 이름은 일종의 가명이겠지.

“얼굴 바꾸는 묘기는 신기했지만, 그걸로 첩보국장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좀 그렇습니다.”

그렇게 치면 중국에서 변검하는 녀석들은 죄다 CIA 요원이게. 내 말에 그가 희미하게 웃음을 흘리며 나를 바라보다가 소매에서 뭔가를 꺼내서 내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사형 선고문이네. 이름은 공란이지.”

그리고는 그가 테이블 위에 놓인 깃펜을 가리켰다.

“여기에 지휘대장 스타니스의 이름을 적고…….”

말을 마친 그가 다시금 주머니에서 작은 보관함을 꺼냈다. 안에는 작은 도장이 하나 들어있었다.

“이 도장을 찍으면 공식적으로 폐하에게 사형 선고를 받은 효력을 가지지. 왕가에서 사용하는 옥새와 완벽하게 똑같은 물건이거든.”

나는 그 말에 아하, 하는 소리를 냈다. 일종의 옥새 복사품 같은 건가. 그는 서류에 도장을 찍고, 다시 보관함을 닫은 다음 나를 바라봤다.

“정 궁금하다면 이후에 일어나게 될 일을 보면 알 거야.”

첩보국장이라고 믿을 만한 증거다. 저런 걸 아무한테나 던져주지는 않을 테니까. 이 이상으로 의심하는 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확실하게 믿을 만한 증거를 보여줬다면, 거기에 걸맞은 신용을 보여줘야지.

“제가 쿠르스트 산맥으로 오기 한 달 전쯤에 로티샤 호수에서 있었던 일을 알고 계십니까?”

내 말에 알버트가 아하,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 레드우드 가문에서 오랫동안 찾지 못하던 붉은 가지를 다시 찾아냈다고 호들갑이었지. 자네가 찾아냈다고 들었는데.”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그때부터 알버트 블루베인 경이 찾고 있는 조직이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있죠.”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

“글쎄요…….”

지금 당장 더 말하기는 곤란하다. 이 사람이 첩보국장이라는 건 어느 정도 확신을 하고 있지만, 이 친구가 정말로 칠색 내각과 연관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모르니까. 내 말을 들은 알버트가 살짝 인상을 쓰더니 나를 바라봤다.

“마틴 레드우드, 최근 쿠르스트 산맥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어.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수도에 주둔하고 있던 왕국 기사단들이 쿠르스트 산맥에서 발생한 사태를 처리하기 위해 무장과 보급을 마치고 출정하는 중이었다고.”

나는 그 말에 잠깐 멈칫하고는 이내 웃음을 흘리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기가 막히군.”

머릿속이 쫀쫀해지는 느낌이다. 왕국 기사단장 중 한 명은 칠색 내각의 구성원이다. 그것도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일곱 가지 색깔로 구분되는 지도층 중 적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누군가.

쿠르스트 산맥에서 하이랜더들이 단체로 습격해 제3관문이 위기에 처했다. 왕국 기사단을 파병하기에는 충분한 사유다. 당연히, 그 출정한 기사단장 중 하나는 칠색 내각의 적색이겠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가.”

“쉬이.”

잠깐 있어 봐. 생각 좀 끝내고.

기사단이 여기에 오게 되면 한 2―3주 정도의 교전을 이어가고, 몰래 빼돌려 놓았던 하이랜더들의 대리석 기둥을 살짝 쿠르스트 산맥 안으로 돌려놓으면 된다.

하이랜더들은 자연스럽게 그 기둥을 찾으러 다시 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는 여기로 온 왕국 기사단이 뭘 할까. 다시 돌아갈까?

아니, 그 상황까지 되었다면 쿠르스트 산맥의 국경수비대는 지금의 피해보다 훨씬 더 큰 피해를 입었을 테니까, 복구에 막대한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동안 기사단은 복구 전까지의 안정을 빌미로 여기에 눌러앉아 임시로 지휘권을 행사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나는 이내 작게 탄식했다. 내가 대리석 기둥을 찾아내 두르밀로 산머리 인근까지 달려가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잖아.”

쿠르스트 산맥 국경수비대는 부여받은 임무 수행에 실패한 게 된다. 당연히, 거기에 대한 질책이 오갔을 것이다. 당연히, 그 회초리를 잡는 건 파견된 기사단의 보스였겠지. 다른 말로는 칠색 내각의 적색.

그 징벌의 회오리 속에서 내가 안전할 수 있었을까?

그럴 리가. 그 상황에서 지원 파견 명목으로 온 기사단장인 칠색 내각의 적색이라는 놈이 약간만 손을 쓰면 나를 감방에 보내는 건 일도 아니었을 거다. 그리고 나는 감방에서 죽었겠지.

그리도 도리안도 마찬가지로 감방에서 몇 년 썩게 할 수 있다. 당연히, 도리안을 감방에서 고문해 하이랜더의 무덤에 대한 힌트를 얻어내는 것도 가능하겠지.

그리고, 국가적인 위기가 될 수도 있었던 하이랜더의 습격을 막아낸 기사단장은 입지가 강화되고, 발언력이 올라간다.

대리석 기둥 하나로 세 가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계획이었다.

“뭐 하는 새끼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대리석 기둥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또는 눈치채고 나서도 바로 행동하지 않았다면 이후에 일어날 상황에서 내가 벗어날 길은 없었다.

게다가, 파견된 기사단도 하나가 아닌 모양이니, 결국 계획이 실패한 지금도 기사단장 중 누가 칠색 내각의 적색인지는 바로 알아낼 수 없다.

물론 저 계획이 잘 먹혔다면 결국 쿠르스트 산맥에 도착했을 때 주도적으로 싸우고, 공을 세운 기사단의 단장이 칠색 내각의 적색이라고 특정할 수 있었겠지.

그럼 뭐해? 그 상황까지 갔다면 이미 내가 손을 쓸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을 텐데.

“아.”

생각을 마치고 나서 시선을 위로 올리자, 알버트의 얼굴이 보인다.

“끝났나?”

순간적으로 약간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큼, 죄송합니다.”

내 말에 알버트는 잠깐 나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길게 했는지 궁금하군.”

“별거 아닙니다.”

“저녁 메뉴 고민하는 표정은 아니던데.”

“토마토소스를 곁들인 미트볼이 좋을 것 같군요.”

대충 대답을 돌려주고 나서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한 나는 그를 바라봤다. 이 친구를 신용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최대한 빨리 답을 얻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결정을 내린 나는 알버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왕국 첩보국에서 찾고 있는 조직의 이름은 칠색 내각입니다. 현재 칠색 내각의 구성원 중 적색이라고 불리는 최고위 간부 중 하나가 왕국 기사단장 중 하나지요.”

내 말에 알버트가 눈을 빛냈다.

“확실한가?”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쿠르스트 산맥에 경보 마법 설치를 위해 파견되었던 마법사 중 다나 힐베른이 그 적색의 아래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찾아내서 제거하는 과정에서 알아낸 사실입니다.”

내 말에 알버트가 하, 하는 소리를 냈다.

“다나 힐베른이라. 금지된 마법을 사용했다고 알고 있어. 왕궁 마법사 엘렌 리버플로우 양과 자네가 함께 쿠르스트 산맥에서 잡았다고 들었는데.”

그래, 그 여자.

“순순히 다 털어놓던가?”

나는 으음, 하는 소리를 냈다.

“뭐, 그냥저냥.”

“그런 조직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입이 무거울 거라 생각하는데.”

알버트의 말에 나는 잔기침을 한 번 하고 입을 열었다.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입이 무겁고 강철같은 정신을 지닌 사람을 묶어놓고, 저에게 일주일만 줘 보시죠.”

남들 앞에서 자랑하기보다는 차라리 부끄러워하는 게 정상인 재주지만, 필요하다면 그 친구가 알몸으로 노래를 부르게 해줄 수 있어.

“그래서, 이 말을 해주는 이유는? 갑자기 마음을 선회한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믿기 위해서는 주고받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알버트가 필요로 할지 모르는 정보를 건네주었다. 당연히, 알버트가 정말로 칠색 내각이라는 녀석들을 왕국에서 솎아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정보를 가지고 뭔가 성과를 내야 할 거다.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면 둘 중 하나겠지. 왕국 첩보국은 의외로 이름만 거창하지 별 볼 일 없는 너절한 놈들 한 줌이 모인 가여운 조직이거나.

아니면 사실은 칠색 내각을 왕국에서 솎아내고 싶지 않아 하는 조직이거나.

“의도는 알겠군.”

알버트는 턱을 쓰다듬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첩보국에서 일해 볼 생각은 없나? 자네 정도 되는 인재라면 분명히 왕국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칠색 내각에 대한 정보를 계속 캐냈던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 녀석들이 자꾸 제 인생에 어깃장을 놓고 싶어 하기 때문이죠.”

첩보국 같은 소리 하네. 안 해. 인마.

“……자네의 생각은 잘 알겠네. 뭐, 본인이 싫다고 하면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지.”

“정말로 강요할 수 없는 겁니까?”

내 말에 알버트가 미소를 지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키는 건 현명한 생각이 아니지. 다른 생각을 품기 쉽거든. 다른 생각을 품은 아랫사람은 신뢰할 수 없고, 첩보국의 모든 임무는 신뢰 없이는 맡길 수 없으니까.”

갑자기 이중간첩 같은 게 튀어나오는 상황을 바라는 사람은 없을 거다.

“말씀은 잘 알아들었습니다.”

“다행이군. 아, 혹시 들었는지는 모르겠네만…… 내일 오후 2시에 승전 기념식 및 전사자 추모 행사가 있을 예정이야. 자네의 업적에 대한 포상도 거기에서 공표되겠지.”

“그렇습니까?”

나는 심드렁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별로 놀라지 않은 모양이군.”

“전쟁이 끝난 다음 살아있는 사람들을 칭찬하고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는 건 흔히 있는 일 아닙니까.”

왕국 기사단까지 출동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을 극복했는데 아무 행사도 없이 평시 업무로 바로 돌아갈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네에게 주어질 포상에 대해서는 미리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공유해주시면 좋겠네요.”

그럴 생각이 없었다면 아예 말을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내 말에 알버트가 곧바로 대답을 돌려줬다.

“전역 축하하네. 곁에 둘 시종은 가능하면 후보 중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로 하게.”

나는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아름다운 아가씨라, 저 녀석이 그냥 심심풀이로 던진 말은 아닐 거다.

“첩보국 사람인 모양이죠?”

“나와 연락할 수단 하나 정도는 있어서 나쁠 거 없지 않나.”

“동의합니다.”

언제까지 이어질 관계일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나와 알버트의 이해관계는 서로 일치한다. 동맹이라는 뜻이다.

내 대답을 들은 알버트가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그럼, 왕도에서 보지. 아, 그리고 내 제안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걸 추천하네. 첩보국은 그 콧대 높은 왕국 감사청에서도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니까. 어디 가서 푸대접받지는 않을 거야.”

인사말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전승 기념 행사가 끝나고 나면 왕도로 끌려갈 예정인 모양이다.

그걸로 나와 알버트의 만남은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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