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화
락밸리 마을의 어두운 뒷골목에, 여자 한 명이 벽에 기대 수첩을 살피고 있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수첩을 살펴보고 있던 와중에 날아온 비둘기를 보고 여자가 얼굴을 구겼다.
“……또?”
날아온 비둘기의 발목에 묶인 쪽지를 확인한 여자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왜 이래야 하는 거야. 푸후, 하는 한숨을 내쉰 여자는 바닥에 가래침을 한 번 뱉고 신발 굽으로 비볐다.
“아가씨, 바뻐?’
그 와중에 뒷골목을 돌아다니던 남자 몇 명이 슬금슬금 여자에게 다가온다.
“아마도?”
여자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손에 들고 있던 쪽지를 입으로 밀어 넣고 씹었다. 한동안 씹어 축축하게 젖어 잉크가 번진 종이가, 다시금 여자의 입에서 뱉어져 바닥에 떨어진다.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다가오는 서너 명의 남자들을 보고 있던 여자는 잠깐 입맛을 다시다가 입을 열었다.
“오빠들, 지금 내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그냥 가던 길 가주면 서로 좋을 것 같은데.”
여자의 말에 남자 중 하나가 웃으면서 손을 뻗었다.
“저런,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래 이쁜이, 그날이야?”
여자는 하, 하는 소리를 내고 그 손을 잡아 그대로 힘을 주었다. 으직, 하는 소리와 함께 뻗어졌던 남자의 팔이 작살나고, 어두운 뒷골목에 남자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여자는 신발로 남자의 턱주가리를 차올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나름대로 내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있거든? 정말, 눈물 나게 열심히 노력했어. 그 결과 어디 가도 실력이 떨어진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고.”
말을 하는 와중에도 여자는 자신에게 다가왔던 남자들을 맨손으로 마구 후려 패고 있었다.
“근데, 씨팔! 왜 맨날!”
여자는 살벌한 표정으로 남자의 배에 주먹을 박아넣었다. 배에 박힌 주먹에 남자의 몸이 살짝 들어 올려졌다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남자는 무릎을 꿇고 토악질을 하다가 허겁지겁 바닥을 기어 여자로부터 도망가기 시작한다. 그런 녀석들을 보고 있던 여자는 우울한 표정으로 벽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뱉어진 젖은 쪽지를 바라본다.
“이런 일만 시키는 거냐고…… 나도 실력 있는데.”
“지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지?”
목소리를 들은 여자가 잠깐 흠칫하고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국장님.”
딱, 딱 하는 지팡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뒷골목에 알버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첩보국에서는 보유한 자원을 가장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사용할 뿐이야. 그건 인적 자원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지, 클로에 레인필드.”
알버트의 말에 여자는 침을 삼키고 나서 대답했다.
“국장님의 방침에 불만을 품은 건 아닙니다.”
“그래, 나도 알고 있다네.”
알버트는 잠깐 헛기침을 하고 나서 클로에를 바라봤다.
“이번 임무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된 사안은 세 가지야. 실력이 뛰어날 것, 여성일 것, 그리고 용모가 단정할 것.”
클로에는 그 말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용모 단정이라.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알버트가 그 말에 태연하게 대답했다.
“원한다면야. 남자가 따먹고 싶다고 생각할 만한 외모라는 표현은 어떤가?”
클로에가 그 말에 왼손을 들어 자기 얼굴을 벅벅 비비며 대답했다.
“차라리 그 표현이 솔직해서 좋습니다.”
“임무의 특성상 인선 과정에서 고려된 사항이니까, 너무 나쁘게 듣지는 말고.”
클로에는 잠깐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대답했다.
“마틴 레드우드, 소문이 별로 좋지는 않은 남자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번에 해낸 일을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알버트가 클로에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 원래 소문이라는 게 좀…… 왜곡되고 그러는 편이 없지 않아 있지 않겠나.”
클로에가 그 말에 시선을 알버트 쪽으로 던졌다.
“국장님께서는 달리 보고 계시는 모양입니다.”
“그래. 지독한 녀석이야.”
그 말에 클로에가 아하, 하는 소리를 냈다.
“받아 본 쪽지에는 구체적인 임무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클로에의 말에 알버트가 자기 지팡이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했다.
“대상에게 가해지는 위협의 배제, 그리고 유혹.”
“두 사안 중에 뭐가 더 중요합니까?”
“둘 다.”
알버트의 말을 들은 클로에가 물을 한 모금 마신 다음 수통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유혹은 목적이 뭔지 알 수 있겠습니까?”
클로에의 질문에 알버트가 음, 하는 소리를 낸 다음 대답했다.
“가능하다면 첩보국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
“알겠습니다.”
결국, 알버트가 원하는 목표는 간단하다. 마틴 레드우드를 보호하면서, 클로에에게 빠지도록 해 최종적으로는 첩보국 소속으로 만드는 것. 대충 말뜻을 이해한 클로에가 알버트를 바라봤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럴 일이 아니었다면 여기에서 국장과 접선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 주게. 고생하고. 아, 검은 나에게 건네주고 가게. 마틴에게는 단순한 연락책일 뿐이라고 말해두었으니까.”
클로에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자신의 레이피어를 알버트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건, 갈아입을 옷과 필요한 물건들이야. 고생하도록.”
알버트는 말을 마치고 나서 다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향해 정자세를 취하고 있던 클로에는 알버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 그가 건네준 옷가지를 살펴봤다.
굉장히 짧은 치마, 그리고 살이 비쳐 보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얇은 셔츠 한 장이 보인다. 거기에 더해 묘한 향기를 담고 있는 향수병을 포함한 화장품까지.
알버트가 클로에게 바라는 역할에 걸맞은 야한 복장이다.
“……차라리 그냥 알몸으로 찾아가라고 하지.”
클로에는 그 옷을 확인한 다음 썩은 얼굴로 바닥을 향해 힘껏 주먹을 내리쳤다. 뻐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금이 쩍 간다.
“후우.”
금이 간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클로에가 자리에서 일어나 콧잔등을 꾹꾹 눌렀다. 이런 일을 하려고 여기에 온 건 아니다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필요하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목적을 성취해야 하니까. 다만, 개인이 선호하는 방법이라는 것 정도는 있기 마련이다.
알버트가 여태 동안 클로에에게 지시한 역할은 사실, 그녀가 선호하는 방법은 아니었다.
“별수 없잖아.”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있는 건 동심으로 가득 찬 어린이들의 특권이고, 하기 싫은 일이라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은 어른의 의무다.
게다가, 클로에는 알버트에게 빚이 있다. 어린 시절, 저잣거리에서 구걸하고, 쓰레기통을 뒤지던 고아에게 기회를 준 것은 알버트다.
그가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미인계 같은 것보다 더 질 낮은 일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오래 살지 못하고 굶어 죽었겠지.
* * *
다음 날, 나는 쿠르스트 국경수비대 사령부에서 진행하는 전승 기념 행사에 참석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렇게 어려울 것이 없었다.
거대한 국경수비대 사령부의 연병장에 모인 병사들 앞에 나와 선서를 읽고, 국경수비대의 대표로서 왕이 내린 친서를 수령한 다음, 감사 인사를 하는 정도였다.
“그대들은 들으라.”
왕의 친서는 왕이 직접 입을 열어서 한 말과 같은 급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들고 있는 은쟁반 안에는 그 대단하신 분이 직접 써 내려간 글귀가 들어있다. 눈앞에 서 있는 남자가 지금 이 자리에서 맡고 있는 역할은 단 하나다.
고귀하고 존귀하신 왕의 말씀이 담긴 이 은쟁반을 무사히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옮기는 것이다.
마침내 은쟁반을 들고 있던 자가 그 쟁반을 열고, 왕의 말이 담긴 두루마리를 펴고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연습한 모양인지, 남자의 목소리는 우렁차게 거대한 연병장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쿠르스트 산맥의 험준함과, 그 험준한 자연 속에 숨어있는 위협은 과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과인은 왕국의 장병들이 잘 훈련되어 있고, 병기고의 병장기가 날카롭게 벼려져 있음을 의심한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장막 속에 큰 위협이 숨어있음을 알기에 걱정을 멈출 수 없었다. 허나, 오늘로 과인의 믿음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으니 마침내 과인이 가벼운 마음으로 침상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실로 그대들의 공이 크다 할 것이다. 나라의 기반은 만백성들의 땀이 빚어낸 결실이지만, 그 결실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것은 실로 지금 이 시간에도 불철주야 땀과 피에 젖은 장병들의 노고 때문이다.”
그렇게, 왕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안 그래도 쿠르스트 산맥의 하이랜더들은 눈엣가시처럼 왕의 성격을 박박 긁고 있었는데, 이번에 흠씬 조져놓는 데 성공해서 참 다행이다.
뭐 이런 이야기였다.
두루마리의 이야기를 다 읽은 남자는 조심스럽게 쟁반 위에 두루마리를 다시 돌려놓고, 쟁반에 담아 나에게 건네주었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대답을 마친 나는 그 쟁반을 공손히 받아 들었다. 그리고, 또다시 은쟁반 하나가 방금까지 낭랑하게 두루마리의 내용을 읽던 남자에게 들렸다.
“레드우드 백작가의 마틴은 들으라.”
이건 아예 나를 위해 따로 내려진 국왕의 친서다.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원래 행사라는 게 하기 전에 미리 예행연습을 하기 마련이잖아. 나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번에 쿠르스트 산맥에서 일어난 소란을 잠재우는 데 있어, 그대의 공이 큰 것을 알고 있다. 무수한 백성들이 흘려야 했을 피를 그대가 흘린 땀으로 갈음할 수 있었으니, 과인은 네 정성과 노력을 참으로 갸륵히 여긴다. 이번 사태에서 네가 세운 공은 짐으로 하여금 너에게 많은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과인은 네가 과인의 기대에 부응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라를 떠받칠 기둥은 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다 하였으니…….”
그렇게 쭉쭉 이어지는 이야기는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었다.
고생했어. 인마.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저 긴 연설의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여, 과인은 군역의 의무에서 그대를 해방한다. 또한,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알 수 없는 사실들이 많고, 과인은 네가 경험한 것들을 네 입을 통해 듣기를 원한다. 마침 왕국의 큰 행사인 신년 행사가 머지않으니. 과인은 그대가 신년 행사에 참석할 것을 명한다.”
좋아, 이걸로 끝이다. 나는 미리 예행연습에서 외워두었던 대사를 읊었다.
“레드우드의 마틴이 폐하의 명을 삼가 받듭니다.”
그 뒤로, 전장에서 죽은 병사들에 대한 국왕의 친서가 다시 읊어지고, 묵념과 경례와 같은 절차가 끝나고 나서 전승 기념 행사는 공식적으로 끝났다.
다음으로 이어진 것은 내가 이룬 공에 대한 보상 절차였다.
왕국에서 국왕의 말은 법보다 강하다. 그런 국왕의 말이 담긴 친서를 통해 군역의 의무를 면제받았으니, 그건 어떻게 해도 변하지 않을 사실일 것이다.
거기에 더불어 꽤 많은 양의 포상금이 주어졌다.
하지만, 포상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