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화
다음 날 아침, 클로에는 내가 말한 시간에 정확히 도착했다. 더 빨리 오지도 않았고, 늦지도 않았다. 물론, 복장은 어제와 같이 오늘도 도발적이었다.
“차 한잔 드시겠어요?”
어제 있었던 일에도 불구하고 클로에는 다시금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한 다음 차를 타주겠다고 한다.
“아니.”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지금 차 마실 때가 아니다. 나는 손을 들어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편지가 많네요.”
테이블 위에는 편지가 꽤 많이 놓여있었다. 내가 기절해 있는 동안 보관 중이던 편지였는데, 오늘 아침에 배달부가 전부 두고 갔다.
“그렇지? 니가 다 정리해야 될 것들이야. 답장이 필요한 편지들은 적절한 내용을 작성해.”
“그러겠습니다.”
말을 마친 클로에가 책상 앞에 앉아서 쌓여있는 편지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내 몫으로 빼놓은 편지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마, 오늘 오전에는 내내 이것만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은데.
“저기, 이 편지는 한번 확인해주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무슨 편지인데. 클로에가 내민 편지를 받아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다. 그렇다고 이 주변에 영지를 가지고 있거나, 나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닌 것 같다.
“아는 사람들은 다 하는 학자예요. 다소 괴짜로 유명하죠.”
학자라. 그걸로는 설명이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편지에서 시선을 떼고 클로에를 바라보자 그녀가 곧바로 입을 연다.
“최근에는 하이랜더에 관한 논문을 냈는데, 꽤 평가가 좋아요.”
나는 그 말에 아하, 하는 소리를 내고 편지의 이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방금 내가 한 말은 첩보국에서 파악해두고 있는 정보 같은데. 함부로 나에게 말해줘도 괜찮은 건가?”
나는 엄연히 조직 밖의 사람이잖아. 보스 허락받지 않고 멋대로 공유해도 되는 정보인 것 같지는 않은데.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국장님의 지시를 미루어 고려해 봤을 때, 제가 파악하고 있는 정보라면 마틴 님께 말씀드려도 괜찮다고 판단했어요.”
클로에는 말을 마치고 나서 나에게 건네주었던 편지를 가리켰다.
“아마, 마틴 님이 옮겼던 대리석 기둥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아서요. 그 기둥의 용도에 대해서 궁금한 건 마틴 님도 마찬가지 아닐까 생각했어요.”
틀린 말은 아니네. 안 그래도 그 기둥이 뭐 하는 물건인지는 꽤 궁금했었거든.
카일 블랙메도우라. 편지에 적힌 이름을 다시 한번 확인해둔 나는 입을 열었다.
“점심 식사는 그 친구와 하고 싶은데.”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클로에의 대답이 돌아온다.
“연락을 취해 두고, 식사 자리를 마련할게요. 식사에 필요한 경비는 국경 사령부에 요청할까요? 아니면 지급된 상여금을 사용할까요?”
국경 사령부에 요청하는 건 조금 양아치 같은 행위다. 거기에 더해서, 괜히 국경 사령부에서 이 카일 블랙메도우라는 녀석에게 관심을 가지게 할 필요도 없다.
“상여금으로 처리하자.”
공짜로 먹는 밥은 맛있지만, 내 돈 주고 사 먹는 밥은 마음이 편하다. 지금은 맛있는 식사가 아니라 마음이 편한 식사를 해야 하는 순간이다. 클로에는 편지 정리를 중단하고 바로 코트를 챙겨 입었다.
“메뉴는 제가 알아서 정해도 괜찮을까요?”
“그래, 네가 먹고 싶은 걸로 정하지 말고.”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먹는 것도 아닌데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말을 마친 클로에가 문을 나서고, 다시금 나는 혼자 방에 남아 편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약 한 시간 정도가 지난 다음 클로에가 다시 돌아왔다.
“오후 1시 30분, 사령부 인근의 로칼슨 펍이라는 곳에 자리를 마련했어요.”
“펍?”
만나서 나누게 될 이야기는, 일단 다른 사람들 귀에 들어가도록 하고 싶지 않은데. 펍은 너무 개방된 공간 아닌가.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 2시간 동안 손님을 받지 않기로 로칼슨 펍의 주인과 합의를 봐두었어요. 나누는 이야기가 밖으로 나갈 일은 없을 겁니다.”
“돈이 이만저만 깨지는 게 아니겠군.”
내 말에 클로에가 음,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마틴 님의 이름을 팔았더니, 의외로 저렴한 가격으로 해주던데요.”
클로에가 내 쪽으로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사용한 비용이 적혀 있었다.
“그러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저렴하게 일 처리가 끝났다.
“손에 들려 있는 그건 뭐야.”
내 말에 클로에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바구니를 툭 하고 쳤다.
“제 점심이죠. 잘 먹겠습니다.”
“니 돈주고 사서 먹는 거잖아.”
내 말에 클로에가 약간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경비로 처리했는걸요?”
“얼씨구, 잘한다.”
내 돈으로 사 먹는 거였냐. 그래 뭐, 피고용인의 식비 정도는 고용주 주머니에서 나갈 수도 있지.
나는 혀를 한 번 차고는 별다른 지적 없이 계속 편지를 살피다가 이내 종이 한 장을 꺼내 들고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보자…….”
대리석 기둥 안에 들어있던 얇은 가죽. 내가 기억해내려고 하는 건 그 가죽 위에 쓰여 있던 문자들이다. 벌써 시간이 꽤 지났다. 의미도 모르고, 외울 생각도 없었던 글자.
“과연 내가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눈을 감고 있다가 종이 위에 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 나는 종이 위에 그려져 있는 문자들을 보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대충 40% 정도인 것 같은데.”
나쁘지 않네. 이런 건 정확도가 중요하다. 확실하지 않은 내용을 적어버리면, 점심 식사를 하며 만나게 될 학자가 나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다.
따라서, 긴가민가한 것들은 아예 까먹었다고 전제하고 종이 위에 적지도 않았다.
“지금 준비해서 출발하시면 만나기로 예정된 시간에 도착할 것 같아요.”
클로에가 내 코트를 챙겨 내밀었다. 나는 코트를 챙겨 입으며 말했다.
“오후 3시쯤 돌아올 거야. 그 전에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양해를 구하고, 누가 찾아왔었는지 기록을 남겨놔. 찾아온 이유도 알아두면 좋고.”
“그럴게요.”
대답을 들은 나는 문을 나서 클로에가 예약해 둔 장소로 향했다.
“카일 블랙메도우 씨?”
펍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자, 텅 빈 펍 안의 한쪽 구석에 남자가 한 명 앉아있다. 부스스한 머리와 더러운 옷을 보니 청결한 삶을 즐기는 성격은 아닌 모양이다.
“아.”
남자는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내가 손을 내밀자 그가 양손으로 내 손을 꽉 잡고 몇 번 흔들었다. 중지 둘째 마디의 굳은살. 이건 무기를 휘둘러서 생긴 게 아니라 펜을 많이 놀려서 생긴 굳은살이다. 식사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닌지 몸이 굉장히 마른 편이다. 이 정도면 영양실조까지 몇 걸음 남지도 않은 수준인데.
햇볕을 많이 쬐지 않아 창백한 피부, 거기에 더해 충혈된 눈은 피로에 절어 있다. 덤으로 거북목 증후군까지. 책상 앞에 앉으면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눈이 돌아가 뭔가에 몰두하는 거라는 인상이 확 온다.
“그러니까, 저기. 아…… 처음 뵙겠습니다.”
“네, 편지 잘 받아봤습니다. 앉아서 이야기 나누실까요.”
내 말에 그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주춤주춤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 앉았다.
“여기.”
나는 곧바로 녀석에게 대리석 기둥 안에 적혀 있던 문자들을 적은 종이를 건네주었다. 이런 사람들은 만나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걸 좋아한다. 한 가지에 몰두하면 다른 건 보이지도 않는 성격이니까.
“이건……?”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제가 옮겼던 대리석 기둥 안에는 얇은 가죽이 두루마리처럼 말려 있더군요. 우연히 내용을 보게 되었는데, 제가 기억하고 있는 부분을 적은 겁니다.”
내 말에 곧바로 녀석의 충혈된 눈에서 섬광 같은 번득임이 스쳐 지나갔다.
“…….”
그는 별다른 말도 하지 않고 곧바로 내가 적은 종이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사이, 나는 다가온 펍 주인을 향해 식사를 주문한 다음 그가 무슨 말을 해주길 기다리기 시작했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그가 나를 보고 말했다.
“달리는 번개, 큰 울음, 독수리 깃털…….”
혼자서 쉬지 않고 중얼거리던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이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인마. 내가 그걸 물어보고 싶어서 너를 여기에 부른 거잖아. 니가 되물어보면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은 거냐.
“이건 명단입니다. 그래, 하이랜더의 명단이야. 무슨 명단이지? 왜 이런 내용이 대리석 기둥 안에 들어있었던 거지.”
혼자 중얼거리는 녀석을 보던 나는 이내 아, 하는 소리를 내고 그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제가 두루마리 안의 내용을 확인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글자가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내 말에 그가 그렇지! 라고 말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덕분에,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물잔이 엎질러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 친구는 그런 건 전혀 신경 쓸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곧바로 내 쪽으로 얼굴을 들이민 카일 블랙메도우는 다소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
“죽은 하이랜더들이군!”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내가 건네주었던 종이를 살펴보다가 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주변을 살피더니 갑자기 스테이크용 나이프고 자기 검지를 그어 피를 낸다. 뭐 하는 거지, 흥분에 미쳐버린 건가. 그리고, 녀석은 검지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가지고 종이 위에 뭔가를 마구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하이랜더들이 단체로 미쳐서 발광한 이유도 말이 되지. 그럼, 그렇고말고.”
녀석은 혼자 흥분해서 손가락에서 흘러내리는 피로 계속해서 뭔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하다가 갑자기 확 동작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하이랜더들은 전장에서의 죽음을 명예롭게 생각하지. 알고 있나?”
이제는 아주 그냥 대놓고 반말이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대답했다.
“전혀 몰랐습니다.”
“멍청하긴!”
멍청? 좋아. 계속해봐. 어차피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내가 멍청하냐 그렇지않느냐 따위가 아니니까.
“하이랜더는 전투를 앞두고 물러서지 않아. 싸우다 죽는 것을 영광이라 생각하니까. 그냥 짐승이 아니란 말일세. 나름의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지성체들이야. 지성이 있다면 죽은 동포를 기리는 것은 당연하지. 그래, 녀석들에게는 장례 문화가 없는 게 아니었어. 그럴 리가 없지.”
그는 쉬지 않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하이랜더들의 습격 원인은…….”
내 말에 그가 시선을 내 쪽으로 확 들어 올렸다.
“명백하지 않나. 그 대리석 기둥은 죽고 나면 시체가 사라져버리는 하이랜더들에게 있어서 선조의 무덤과도 같은 거야. 그 스타니스라고 하는 머저리 지휘관은 쿠르스트 산맥의 모든 하이랜더들이 공유하는 단 하나의 무덤을 빼돌린 거고. 당연히 모든 하이랜더들이 눈깔이 돌아가서 달려들 수밖에!”
조선으로 치면 왜구가 종묘를 통째로 들고 튀어버린 거랑 비슷한가. 물론, 종묘는 들고 튈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긴 하지만. 예를 들자면 그런 거지. 좋아, 그럼 다음 질문.
“오멘티오, 라는 단어의 뜻은 알고 있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