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화
내가 건네준 종이를 불태울 것처럼 노려보고 있던 카일이 내 쪽으로 시선을 들었다.
“그 말은 어디에서 들었나?”
“대리석 기둥을 옮기던 와중에 힘이 다해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하이랜더들이 저를 따라잡았죠.”
내 말에 그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그래서, 녀석들이 자네를 살려두면서 그 단어를 말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내 말에 녀석이 몸을 살짝 떨고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예외, 라는 뜻이네.”
“이번에는 살려두겠다는 뜻이라는 겁니까?”
내 말에 그가 턱을 잠깐 쓰다듬다가 대답했다.
“확실하지는 않아. 녀석들이 자네를 눈여겨보는 눈치였나?”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한 번씩 훑어보고 지나가더군요.”
“훌륭해.”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나를 바라봤다.
“그렇다면 앞으로, 먼저 검을 뽑아 들지 않으면 하이랜더들이 자네를 공격하는 일은 없을 걸세.”
“확실합니까?”
내 말에 카일이 대답했다.
“약 70년 전, 쿠르스트 산맥에서 커피콩을 채취하는 일로 목숨을 연명하던 소년이 있었네.”
커피콩을 채취하던 소년은 눈보라 때문에 길을 잃었고, 자기도 모르게 쿠르스트 산맥의 꽤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고 한다. 눈보라가 잦아들고 나서, 소년은 죽어가는 새끼 하이랜더를 발견했다고 한다.
소년은 챙겨온 약초 따위를 활용해 그 어린 하이랜더를 살렸던 모양이다. 그 사이 다른 하이랜더들이 새끼 하이랜더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그 둘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때 그 소년은 하이랜더의 공격을 받지 않았지. 마찬가지로 하이랜더들은 그 소년의 몸을 살핀 다음 오멘티오라는 말을 했고.”
“확실한 겁니까?”
내 말에 그가 대답했다.
“3년 전에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죽었어. 나는 운이 좋아서 그 사람이 죽기 전에 직접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록밸리 마을에서는 꽤 윤택한 삶을 살고 있더군.”
다른 사람들이 하이랜더가 무서워 들어가지 못하는 곳에 멋대로 들어가서 쿠르스트 산맥에 자생하는 온갖 것들을 채취할 수 있었으니,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윤택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비밀로 하고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런 건 남들이 알면 좋을 게 없다. 하이랜더에 대한 사람들의 이미지는 별로 좋지 않으니까. 새끼 하이랜더를 살려주고, 그 대가로 잘 먹고 잘산다는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면 분명히 난처한 상황에 처할 것이다.
내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에게 이야기를 듣기까지 대충 3개월 정도 걸렸네. 하루가 멀다고 찾아가서 애원했지. 그 사람이 죽기 전까지는 관련 내용을 논문에 쓰지 않기로 약속하고 겨우 내막을 들을 수 있었어.”
야, 너도 참 진상이다.
“어쨌든, 먼저 싸울 의사를 표명하기 전에는 하이랜더들이 자네를 공격할 일은 없을 거야.”
오멘티오라는 단어의 뜻도 알았고, 대리석 안에 들어있던 두루마리가 뭐 하는 물건인지도 알았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물어볼 만한 건 하나뿐이지.
“하이랜더의 무덤, 알고 있는 정보 같은 거 없으십니까?”
내 말에 카일이 응?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그런 건 단순한 전설일 뿐이라는 게 세간의 인식인데.”
“세간의 인식 따위 알게 뭡니까.”
제7수색대장인 도리안이 가봤고, 칠색 내각이라는 녀석들이 찾고 있는 장소다. 절대로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있는데 아직까지 못 찾았을 뿐이다.
로티샤 호수 아래에 잠겨 있던 붉은 가지의 위치까지 알고 있던 녀석들이다. 심지어 그 붉은 가지의 주인인 레드우드 가문에서도 위치를 모르고 있던 건데.
하이랜더의 무덤 또한 사람들이 전설로 취급하지만, 칠색 내각은 하이랜더의 무덤이 확실히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무덤에 있는 하이랜더의 시체를 일으켜 군대로 삼겠다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짜놓았을 리가 없지.
“하이랜더들이 무덤에 대해 언급한 기록이라고 해봤자…….”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잠깐 자기 관자놀이를 두들기다가 종이의 남은 공간에 뭔가를 적어 내려갔다.
이게 뭔데 망할 자식아. 종이에 적힌 내용을 보고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그게 다였다. 이걸로 뭘 알 수 있겠어.
“찬돌은 하이랜더들이 대리석을 일컫는 단어야.”
그래서, 내가 옮긴 대리석 기둥과 관련이 있다는 건가. 게다가 내가 건네준 종이를 보고 카일은 그 대리석 기둥 안에 적혀 있던 문자들이 죽은 하이랜더의 이름이라고 짐작했다. 말이 되기는 한다.
“눈구름은?”
“지독하게 거센 눈보라.”
도리안이 하이랜더의 무덤을 발견한 것은 눈보라 속에서 다 죽어가는 순간이었다. 마찬가지로 말은 되는데, 그걸로는 너무 부족하잖아. 애초에 이런 너절한 문장 몇 개로는 뭘 할 수가 없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식사가 준비된 모양이다. 저 멀리에서 주인이 다가오는 걸 보고 나는 종이를 대충 접어서 소매 안에 넣었다.
“자, 식사하시죠. 많이 시장하실 텐데.”
내 말에 그가 잠깐 나를 보다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네, 저기…… 그러시죠.”
뭐냐, 이제 정신 차린 거냐? 방금까지 흥분해서 잡아먹을 것 같은 눈을 하고 마구 반말을 던지던 사람 대신 눈치 보며 우물쭈물하는 소심한 친구가 갑자기 등판했네.
식사 자체는 간단하게 끝났다. 어차피 카일은 여기에 밥을 먹기 위해서 온 건 아닌 걸로 보였으니까. 30분 정도 뒤에 식사는 끝났고, 나는 다시 국경 사령부에 마련된 내 숙소로 돌아갔다.
“성과는 좀 있으셨나요?”
돌아오자마자 클로에가 내 코트를 받아 옷걸이에 걸며 질문을 던졌다.
“뭐, 대충 궁금했던 의문은 풀었지. 성과라고 할 만한 건 없었고.”
내 말에 클로에가 나를 바라봤다.
“별로 얻은 게 없나 봐요. 죄송해요. 꽤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 말에 고개를 휘휘 저었다.
“얻을 게 있을 거라 생각하고 간 건 아니야.”
그냥 대리석 기둥과 오멘티오라는 단어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을 풀고 싶었을 뿐이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음, 하는 소리를 냈다.
“몰라도 괜찮아.”
칠색 내각이라는 조직이 하이랜더의 무덤을 찾는 목적은 명확하다. 죽은 하이랜더의 시체를 죄다 살려내서 새벽의 저주를 한 편 찍고 싶다는 거다.
그 반면, 나는?
무덤 위치를 알아낸다고 해도 딱히 좋을 게 없다. 내가 그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로 뭘 하겠어. 정육점 차려서 고기라도 뜯어 팔까?
물론 하이랜더의 시신을 가지고 좋은 무기와 방어구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뭐. 내가 개인적으로 무장시킬 만한 병력이 있는 건 아니잖아.
게다가 이 나라는 모든 걸 국왕이 소유한 왕국이다. 내가 하이랜더의 무덤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 무덤의 시신들이 온전히 내 소유가 될 리는 절대로 없다. 나라에서 뺏어가겠지.
“고로, 내가 아득바득 찾아내려고 할 필요는 없지.”
내가 무슨 인디아나 존스나 라라 크로프트처럼 무덤 못 파서 뒤진 귀신이 붙은 건 아니잖아.
녀석들이 찾아내지만 못하게 방해하는 걸로 충분하다. 게다가, 지금 해야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혹시, 엘렌 리버플로우에게 온 편지는 없었나?”
내 말에 클로에가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엘렌 리버플로우가 보낸 편지다.
“안 그래도, 말씀을 드리려고 했어요.”
편지봉투의 입구를 봉인해둔 촛농에 뜯어진 흔적은 없다. 클로에가 열어보지는 않은 모양이다. 편지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나는 봉투를 열어 내용을 확인하고는 가볍게 혀를 찼다.
“일이 꼬이네.”
기사단장에 대한 조사가 늦어질 것 같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로델린을 레드우드 영지까지 배웅한 다음 왕도로 돌아오자마자 엘렌에게 바로 출장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엘렌이 향한 곳은 왕국 최남단에 위치한 그린모스 늪지대라는 곳이다.
지도로 그린모스 늪지대의 위치를 확인한 나는 왕도와의 거리를 확인한 다음 작게 한탄했다. 엘렌이 하다못해 기반 공사라도 미리 해줬으면 했는데. 이래서는 힘들겠는걸.
“혹시, 제가 읽어봐도 괜찮을까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그녀를 잠깐 바라봤다. 그녀도 알아두어서 나쁠 건 없다.
물론 알버트에게 이야기가 들어가기는 하겠지만, 엘렌 리버플로우가 우리 편이라는 사실을 알버트가 아는 게 문제 될 것 같지는 않으니까. 내가 편지를 넘겨주자, 클로에가 내용을 확인하고는 나를 바라봤다.
“이게 우연일까요?”
“어떻게 생각해?”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우연일 리가 없죠.”
“그렇게 확정한 이유는?”
내 말에 클로에가 잠깐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무 시기가 딱 떨어지잖아요. 편지 내용을 보면 마틴 님이 엘렌 리버플로우 님에게 기사단장에 대한 조사를 부탁했는데, 왕도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출장 지시를 내리다니.”
“그게 전부야?”
내 말에 클로에가 하려던 말을 멈췄다.
“설마,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나는 클로에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우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시기가 맞아 떨어졌다는 것만으로 사건의 인과관계를 확정시켜버리는 건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실수다.
“엘렌의 출장이 누군가의 의도라고 확정할 수 있을 만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어.”
물론 확률이 높은 건 사실이지만, 조사 없이 확정 지을 수는 없다.
“도리안 대장님이 수색대로 돌아갔는지 확인해주겠어?”
내 말에 클로에가 곧바로 대답했다.
“도리안 대장은 내일 오전 중으로 복귀할 예정이라고 들었어요. 거기에 더해서, 피터 부대장은 이미 복귀 중이에요.”
나는 그 말에 클로에를 바라봤다. 대답이 즉시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마틴 님이 쿠르스트 산맥 인근에 가지고 있는 인간관계는 협소한 편이잖아요? 아직은 상시 파악해 둘 수 있는 수준이거든요.”
그래, 곧 죽어도 첩보부 소속이다 그거지?
“도리안 대장에게 저녁 식사 함께하는 건 어떤지 한번 여쭈어보고 싶은데.”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도리안 제7수색대장의 의사를 확인하고, 허락한다면 자리를 마련해 놓겠습니다.”
“그래 줘. 아, 그리고 앞으로 한 달 남았다면 레드우드 영지에 들렀다가 신년 행사에 참석하도록 일정을 잡고 싶은데.”
대외적으로 나는 레드우드 가문의 장남이다. 나름의 전공을 세우고 나서 가문의 영지에 한 번도 들르지 않는다면 사람들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오르내릴 수 있다.
쓸데없는 구설수는 최대한 피하는 편이 좋다. 도리안과의 식사도 세간의 시선을 의식해서 자리를 마련하려고 하는 거다.
내 말에 클로에가 어…… 하는 소리를 내고 테이블 위에서 뭔가를 뒤적거리더니 대답했다.
“이후 일정을 다시 조정해야 하겠네요. 조금 바빠지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상관없어.”
내 말에 클로에가 백지 한 장을 꺼내서 뭔가를 써 내려가더니 내 쪽으로 내밀었다.
“이렇게 일정을 조정하면 될 것 같아요.”
나는 그 내용을 확인하고 클로에를 바라봤다.
“상당히 빡센데.”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괜찮다고 하셨잖아요.”
“일부러 이렇게 일정을 짠 건 아니겠지.”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설마요. 첩보부에서 지시받은 일은 제외한 모든 일은 마틴 님을 보좌하는 시종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을 뿐이에요.”
“첩보부에서 지시받은 명령 중, 유혹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은데.”
내 말에 클로에가 난처한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봤다.
“그럼 홀딱 벗고 일할까요?”
“극단적인 해결책이네. 집어치우고 지시한 일이나 해.”
대답을 들은 클로에가 곧바로 다시 테이블에 앉아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저무는 꽃 무리, 가는 길을 원망 마라.
저울 위에 추가 쌓여 해를 누르고 달을 올리면 스러진 살덩이, 품어 올려 눈구름을 덮어주고 한 가닥 굳은 넋, 감아올려 찬돌 속에 간직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