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화
그날 저녁, 나는 도리안과 함께 테이블에 앉았다.
“어디 보자, 내가 존댓말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나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난 도리안이 히죽 웃으며 인사 대신 던진 말이었다. 나는 그 말에 픽 웃고는 대답했다.
“그러시겠습니까? 나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자식이.”
도리안은 그렇게 말하고 내서 내 어깨를 몇 번 툭툭 쳤다.
“회복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바로 찾아갈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전쟁은 하고 있을 때도 바쁘지만, 끝난 다음에 할 일도 만만치 않게 많으니까. 화재랑 비슷하다. 불이 났을 때도 할 일이 많지만, 불이 꺼진 다음에 타오른 잔해를 정리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도리안이 쉽게 시간을 낼 만한 상황이 나오지는 않았겠지.
“뒷정리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내 말에 도리안이 잔에 담긴 맥주를 들이켠 다음 푸후, 하는 소리를 냈다.
“두르밀로 지휘대 예하 부대는 집에 불이 난 상황이지. 세 개의 관문 중 2개가 작살나고, 하나는 반파되었어.”
다시 보수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과 자재가 필요하다.
“인원 부족도 있겠죠.”
내 말에 도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도 문제가 심각하지.”
한둘이 죽은 게 아니다. 관문 두 개가 작살나면서 그동안 유지되고 있던 병력의 숫자도 팍 줄었다.
“일단 반파되었던 제3관문을 우선적으로 보수하고, 부족한 병력은 인근 지휘대에서 보충한다고 하더군.”
“얼마나 예상하십니까?”
내 말에 도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모르겠다. 이런 사태는 처음이었으니까. 다들 몇 년 단위를 예상하던데.”
성벽을 재건하는데 들어가는 자재의 양, 동원해야 하는 사람의 숫자 등을 고려하면 년 단위의 계획이 필요한 일이라는 건 틀림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쿠르스트 산맥 인근의 영주님들이 꽤 열정적이라는 점이지. 자재는 물론이고, 공사 인력도 지원해 줄 예정이라고 하더군.”
당연하지, 쿠르스트 산맥에 구멍이 뚫리면 그다음으로 불바다가 활짝 열리는 건 자신들의 영지가 될 테니까. 녀석들의 적극적인 지원은 그렇게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문제는 밥이야.”
밥이라. 나는 그 말에 턱을 쓰다듬었다.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다. 자동차는 기름으로 굴러가고, 소와 말은 건초로 굴러간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밥을 먹어야 일을 할 수 있다. 자재와 인력을 지원해주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와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먹일 식량이 없으면 안 된다.
“식량은 지원해주지 않는 모양입니다?”
내 말에 도리안이 대답했다.
“쿠르스트 산맥 인근 영지의 농작물 산출량은 좋은 편이 아니거든. 게다가, 올해 여름에 급습한 찬바람 때문에 농작물이 냉해를 입었어. 아무래도 식량 지원은 버거운 모양이야.”
“다른 지역의 지원은 없습니까?”
내 말에 도리안이 대답했다.
“국경 사령부에서는 지원을 요청하고 있기는 한데. 쿠르스트 산맥 인근의 영주들과는 아무래도 사정이 다르니까.”
영 시원찮은 대답만 돌아오는 모양이다.
“사령부에서 보내는 공문으로는 부족해.”
뭔지 알 것 같다.
“칙령?”
내 말에 도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칙령이라면 지금처럼 미지근한 대답을 돌려줄 수는 없지. 사령부에서는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고민 중이야.”
“신전에서는?”
내 말에 그가 대답했다.
“사제님들은 부상자의 회복에 전념하고 있어. 뭔가를 더 요청하기는 곤란한 상황이지.”
애초에 쿠르스트 산맥 일대의 영지가 냉해를 입어 작물 산출량이 형편없다면 사제들이라고 여유가 넘칠 리가 없다.
천상, 식량 공급은 다른 지역에 의존하는 방법 말고는 없는데 정작 그 다른 지역들이 쿠르스트 산맥에 식량을 지원하는 일에는 반응이 영 싱거운 모양이다.
잠깐 맥주잔을 흘긋거리던 도리안이 약간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말이다.”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국경 사령부에서 여기로 사람이 올 예정입니까?”
내 말에 도리안이 잠깐 나를 바라보다가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새끼, 눈치 하나는 진짜 귀신이라니까.”
이 정도는 눈치가 좋아야 알아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도리안이 아쉬운 소리를 한다. 다른 지역의 식량 지원을 위해서는 사령부에서 보내는 협조 요청문이 아니라 국왕의 칙령이 필요하다.
근데 참 신기하게도 나는 신년 행사에 초대받아서 왕도로 향할 예정이다. 국왕과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도 하겠지.
이 상황에서, 쿠르스트 국경 사령부가 국왕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나 말고 누가 있을까?
“사령관님이 직접 오고 계시다.”
나는 그 말에 저런, 하는 소리를 냈다.
“많이 급한 모양입니다.”
그래도 사령관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잠깐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나는 이내 의문을 가졌다.
쿠르스트 산맥 일대의 영지들이 냉해를 입은 사실을 국왕이 알고 있다면, 사령부에서 요청했을 때 국왕이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있나?
근데 왜 사령부에서는 당당하게 요청하지 않고 어물거리며 나한테 총대를 넘기는 거지.
고민을 계속하며 잠깐 도리안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문이 열리고 병사 한 명이 들어와서 가게 주인에게 뭐라고 말하는 게 들렸다.
잠시 뒤, 주인은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양해를 구하기 시작한다. 이내, 가게에는 나와 도리안 둘만이 남았다.
“사령관님.”
문이 다시금 열렸다. 도리안이 문 너머의 상대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한다.
나도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했다. 기념 행사에서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얼굴은 익숙하다.
“도리안 수색대장.”
사령관은 도리안의 경례를 받아주고 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두르밀로 방어전의 영웅 마틴 레드우드. 이렇게 금방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조금 오글거리는데. 그냥 이름만 불러주면 안 될까.
“도리안 대장에게 두르밀로 지휘대의 현 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폐하의 칙령이 필요하시다고…….”
내 말에 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이미 국경 사령부를 위해 많은 일을 해주었는데 또 이런 부탁을 해서 미안하군.”
자리에 앉은 그가 내 쪽으로 술병을 내밀었다. 나는 양손을 잔을 들고 그가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하지만,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자네 말고는 없어. 신년 행사에 참석해서, 국왕 폐하에게 꼭 좀 국경수비대의 현 상황에 대해 말을 해줬으면 하네.”
“저도 그러고 싶지만…….”
내 말에 사령관이 내 눈을 바라봤다.
“뭔가, 어려운 점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어려운 점이라기보다는, 저도 상황의 전말을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말에 사령관이 흠, 하는 소리를 내고는 잔에 담긴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나를 바라봤다.
“듣고 있네, 한번 말해보게나.”
“국경 사령부에서 직접 폐하께 청하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내 말에 사령관이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이미 쿠르스트 산맥 인근의 영지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약속받은 상황이야. 그 이상을 요청하는 건 아무래도…….”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식량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쿠르스트 국경수비대가 폐하께 청을 올려도 흠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저로 하여금 폐하께 간청하도록 하는 이유가 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말해주지 않는다면, 당연히 나는 국경수비대의 청을 무시할 거다. 정황도 모르고 요청을 전달하고 대답을 전달하는 배달부가 될 생각은 없다.
“…….”
사령관이 내 표정을 보고 난처한 표정을 지은 채 도리안을 바라봤다.
“제가 듣기 곤란한 이야기라면 잠시 자리를 비키겠습니다.”
도리안의 말에 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리안이 문을 나서고, 마침내 사령관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쿠르스트 산맥 일대의 영주들이 올해 수확량을 속인 모양이야.”
나는 그 말에 얼굴을 구겼다. 무슨 소리야. 수확량을 속이다니.
“……폐하께서는 쿠르스트 산맥 일대의 영지가 냉해로 피해 입었다는 사실을 모르신다는 뜻이야.”
그 말을 들은 나는 입을 쩍 벌렸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수확량을 속였다고? 심지어 풍작을 거두었는데 평작이라고 속인 것도 아니고, 흉작을 평작으로 속였다는 거야?
도대체 뭐하러. 풍작을 평작으로 속였다면 탈세가 목적이었구나 납득이라도 하지!
국왕이 냉해로 피해 입은 사실을 모른다. 솔직히 이것도 말이 되는 소리가 아닌 것 같기는 하지만 그것까지는 내가 어떻게든 납득을 해볼 수는 있다.
이 세상에 전자 정부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쿠르스트 산맥은 엄연히 이 왕국에서도 굉장히 구석진 곳에 처박혀 있는 땅이니까.
오죽하면 내가 여기로 유배를 왔겠어? 하지만 흉작을 평작으로 속였다는 건 도무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잖아.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올해 가을 세자 전하의 성인식이 있었어.”
아니, 전혀 모르는데? 애초에 그 세자라는 인간의 성인식이 있을 때 나는 이 세상에 있지도 않았을걸?
“그게 무슨 관련이…….”
말을 하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나라 차기 왕의 성인식이다. 당연히 각 지역에서는 축하 선물이랍시고 뭘 잔뜩 보냈겠지.
당연히, 외진 곳이라고는 하나 쿠르스트 산맥 일대의 영주들도 뭔가를 보내야 했을 것이다.
“영주들이 무리한 겁니까?”
내 말에 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흉작이라는 사실을 알리면 성인식에 보낼 선물의 규모를 줄일 수 있었겠지만.”
이 나라 차기 주인 눈 밖에 나는 게 걱정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산출량을 속여가면서 무리하게 성인식 축하 선물이랍시고 뭘 바리바리 보냈던 모양이지.
“세자 전하께서 상황을 아신다면 이해해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내 말에 사령관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마, 그러시지는 않았을 거야. 많이 섭섭해하셨겠지.”
대놓고 세자가 탐욕이 많은 녀석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사령관이 돌려 말한 거다.
세자는 흉년이라고 자기한테 보내는 선물의 양을 줄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탐욕스럽고 속 좁은 놈이라고.
“영주들의 입장도 생각해줘야 하네. 폐하께서는 올해로 일흔셋이 되셨어.”
저런, 이런 시대에 그 정도 나이라면 마차에 치여 죽어도 자연사라고 할 만하지. 더 심한 표현으로는 워킹 데드 정도가 있겠네.
“폐하가 흉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강제로라도 쿠르스트 지역에서 보내오는 선물을 제한하셨겠지요?”
“그래, 때문에 흉년이라는 사실을 속일 수밖에 없었지.”
내 말에 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들어보니 이 나라의 지금 왕은 그래도 생각을 하고 사는 친구인 모양이다.
문제는 그 뒤를 이을 친구가 영 별로인 모양이다. 뭐, 멀쩡한 왕 다음에 또라이 같은 왕이 튀어나오는 게 역사상 그렇게까지 드문 일은 아니니까.
머리가 조금 복잡해진다. 이전까지는 쿠르스트 산맥에서 굴러야 하는 내 코가 석 자인 입장이라, 이 나라 굴러가는 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대충 정리하자면, 이 나라의 국왕은 노쇠해서 레임덕이 왔다. 왕국의 영주와 신하들은 여전히 왕의 눈치를 보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세자의 눈치도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세자는 정상이 아닌 모양이다. 아마 왕국의 대신들도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 쿠르스트 산맥 인근 영주들이 수확량을 속인 걸 그냥 넘어갔을 거다.
“이제 와서 짜잔, 사실 우리는 흉년이었습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겁니까. 대충 이해했습니다.”
대놓고 이 나라의 최고 존엄인 국왕 폐하한테 지들이 구라쳤다고 말하는 거잖아.
왕이 깜짝파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고 해도 이건 절대 웃으면서 넘어가 주지 않을걸.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을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