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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57화 (57/275)

057화

좋아, 대충 이 친구들이 처한 상황은 이해했다. 하지만, 내가 사령관의 요청을 수락하기 위해서는 아직 한 단계가 더 남았다.

“알고 계시겠지만, 사령관님의 요청을 들어주다가 잘못하면 저도 곤란한 입장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해주면 니들은 나한테 뭘 줄 건데? 그게 확정되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쿠르스트 국경 사령관의 요청을 들어줄 이유가 조금도 없다.

“이해하네. 혹시, 도움을 준다면 잊지 않고 있겠다고 하는 걸로는 힘들겠나.”

아, 빚으로 달아두라고? 나는 그 말에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죄송합니다.”

그럴 생각 없어.

이건 빚으로 달아놓을 만한 사안이 아니다. 어음으로 때울 수 있는 정도의 요청은 나와 엘렌 리버플로우 사이에 주고받았던 사소한 거래 정도다. 이렇게 큰 걸 빚으로 달아놓을 생각은 없다.

“레드우드 가문의 사정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네. 아마 내가 도움을 좀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만.”

나는 그 말에 코웃음이 나올 뻔한 걸 참았다. 아하, 후계 문제 말이군. 이 친구도 나름대로 거래에 사용해 봄직한 물건을 챙겨오기는 한 모양이다. 날로 먹으려는 양아치가 아니라는 점은 기특하지만…….

하지만 나에게는 그닥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저 제안이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흥미로울 수 있겠지.

“죄송하지만, 레드우드 가문의 뒤는 제 이복형제인 데이먼이 이을 겁니다. 제 아버지 레온 백작의 결정에는 불만이 없습니다.”

내 말에 사령관이 으음, 하는 애매한 소리를 내고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속이 타겠지. 나름대로 먹힐 만한 카드라고 생각해서 챙겨왔는데 내 쪽에서 시큰둥하니까.

“하지만, 엄연히 말해서 레드우드 가문의 후계자 순위는 자네가 더 위로 알고 있네만.”

틀린 말은 아니다. 첫째 아내 로델린의 배에서 나온 자식이니까.

이전의 양아치 마틴 레드우드라면 몰라도, 지금의 내가 국경수비대 사령관의 도움을 등에 업고 상속 권리를 주장한다면 레드우드 영지를 상속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후계 순위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중요한 건 아버지께서 내린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답을 마치고 나서, 나는 표정을 약간 바꾸고 사령관을 바라봤다.

“게다가, 국왕 폐하를 보필해 나라를 빛내는 일이 꼭 영주가 되는 길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내 말을 들은 사령관이 잠깐 나를 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고말고. 하고자 하는 말은 이해했네. 역시, 큰일을 하고 싶은 사람은 왕도로 향해야 하는 법이지. 암!”

대충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가닥을 잡은 모양이다. 쿠르스트 산맥으로 식량 지원을 해달라는 이야기를 전달할 테니, 너는 내가 왕도에서 내가 원하는 감투를 얻도록 도와라.

“뭐, 따로 생각하고 있는 일이라도 있나?”

“글쎄요, 감사청 정도가 어떨까 합니다.”

알버트는 나에게 별다른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겠지만,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첩보국은 그 콧대 높은 왕국 감사청에서도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니까. 어디 가서 푸대접받지는 않을 거야.’

저 말을 반대로 하자면, 왕국의 감사청이라는 조직이 까다로워하는 상대는 이 왕국에 첩보국 말고는 없다는 뜻이 된다. 내 말에 사령관이 잠깐 신음을 냈다.

“그건…….”

나는 그 말에 곧바로 대답했다.

“국왕 폐하께 청은 제가 직접 드리겠습니다. 사령관께서는 사적으로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 적당히 뒷심만 붙여주시면 됩니다. 최선을 다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감사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뭐,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내 말에 사령관이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 정도라면 불가능한 청은 아닌 것 같군. 내가 시도해 봄직한 일이야.”

“그걸로 충분합니다.”

내 말에 사령관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리 알고 있지. 다만, 좋은 소식을 가져와야 할 게야. 얻어낸 성과가 없다면 내 쪽에서도 힘을 써줄 수 없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사령관은 이 대화를 끝으로 다시 돌아갔다. 잠시 밖에 나가 있던 도리안이 다시 돌아와 내 건너편에 앉았다.

“거, 이야기 한번 길게 하더군.”

나는 도리안의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사령관님께서 많이 적적하셨던 모양입니다. 아들 생각이 난다고 하시더군요.”

내 말에 도리안이 코웃음을 한 번 치고 나를 바라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국경 사령관님께서? 그럴 리가 있나.”

너무 개소리였나? 나도 사실 그렇게 생각해. 말을 마친 도리안이 다시금 술잔을 들고 이리저리 흔들다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건 왕국에 도움이 되고, 나아가 너한테도 도움이 되는 일이겠지. 따로 물어보지는 않으마.”

왕국에 도움이 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건 확실하다. 그래도 물어보지 않겠다고 해주니 마음은 좀 편하네.

수색대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정이 붙어서 거절하면 마음이 조금은 불편했을 테니까.

“거 참, 아쉽네. 수색대로 뽑아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녀석이 품을 떠나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엄연히, 나는 더 이상 제7수색대의 소속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그 사실이 도리안 입장에서는 약간 섭섭한 모양이다. 도리안의 말에 나는 빈 잔을 내밀며 말했다.

“뭐, 잘 돼서 떠나가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입 삐죽이지 말고 가는 길에 덕담이라도 해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내 말에 도리안이 얼씨구, 하는 소리를 내고는 나를 바라봤다.

“그래, 가기 전에 퍼마시고 죽어버리자.”

무슨 말을 또 그렇게 살벌하게 하냐. 먹고 죽자니. 그리고 너 지금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저는 술 못 먹습니다.”

내 말에 도리안이 응? 하는 소리를 내고 내 잔을 바라봤다. 안에 담겨있는 건 음료수다. 나 미성년자야.

물론 이전의 마틴이라면 그런 거 상관없이 마구 퍼먹었겠지만, 이 나이에 술 퍼먹으면 머리 나빠진다고.

“망할 새끼. 집어치워라. 나 혼자라도 마실란다.”

도리안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자기 잔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벌컥벌컥 비우고는 독한 술을 한 병 시켰다. 도리안은 그렇게 혼자서 독주 세 병 정도를 더 마신 다음, 내 부축을 받아 숙소로 돌아갔다.

“거참, 무겁긴.”

도리안을 숙소 안에 밀어 넣은 나는 후우, 하는 소리를 내고 목을 이리저리 돌린 다음 내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로 돌아온 나는 문 너머의 풍경을 보고 한마디 했다.

“뭔데 아직 있어.”

이 시간까지 클로에가 남아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상사가 고향을 찾아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일정을 다시 조정해야 했거든요.”

“저런, 나쁜 상사네.”

대답을 마친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입을 열었다.

“세자 전하에 대해서 아는 거 좀 있어?”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내용을 순화시킬까요? 아니면 가감 없이 말할까요?”

“가감 없이.”

“무시당하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고, 권력욕도 강하시다고 알고 있어요.”

이야기를 들은 나는 턱을 쓰다듬다가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로 심각한데?”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세자 전하께서 왕위에 이미 오르신 상황이었다면, 마틴 님이 쿠르스트 산맥에서 이룬 성과를 썩 좋게 생각하지는 않으셨을지도 몰라요.”

뭐, 선조가 이순신 장군님 보고 열폭한 것처럼? 그거참 까다로운 성격일세.

“근데 그런 이야기 막 해줘도 되는 거야?”

내 말에 클로에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봤다.

“싸대기를 때려놓고 뺨 때려도 괜찮냐고 물어보면 저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죠?”

“그건 그렇지.”

내 말에 클로에가 잠깐 자기 머리카락을 검지로 감아올리다가 대답했다.

“꽤 많은 귀족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딱히 비밀은 아니에요.”

즉, 첩보국만 파악하고 있는 정보는 아니라는 거지. 그럴 것 같긴 했다.

쿠르스트 산맥 일대의 영주들이 수확량을 속여가면서까지 세자의 성인식을 챙겨주려 했다는 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 세자의 성질머리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뜻이니까.

“좋네. 아, 레드우드 영지로 가는 일정을 최대한 앞당겼으면 좋겠는데. 가능하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출발할 생각이야.”

내 말에 클로에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쿠르스트 국경 사령부 사령관이 만나보자고 하는 편지를 넣었어요. 다른 건 몰라도 그 청을 무시하고 바로 레드우드 영지로 향하는 건…….”

나는 그 말에 픽 웃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이미 만나고 오는 길이야.”

내 대답을 들은 클로에가 멈칫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어요?”

“그걸 내가 말해주겠냐.”

내 행적은 이미 클로에를 통해 알버트의 귀로 들어가고 있다고 봐도 좋다. 이 여자 앞에서는 해도 괜찮은 말과 하면 안 되는 말이 있다.

“여기에서 제가 윗도리를 벗어도?”

말하면서 대뜸 셔츠의 몇 개 남지도 않은 단추를 부여잡는 모습에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홀딱 벗고 침대에 누워서 함께 뒹굴겠다고 해도.”

“저런,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는데요.”

저런, 외모로 홀릴 생각이었다면 그 정도는 각오를 했어야지.

잠깐 나를 바라보던 클로에가 한숨을 한 번 푹 쉰 다음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 더 저를 믿어주시는 건 어때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보필할 생각인데.”

어지간히 궁금한 모양이다. 클로에가 궁금해한다는 건, 지금 여기에서 내가 입을 열면 그 내용이 싹 다 첩보국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내 시종으로 일한 지 하루 정도 지났나? 키울 생각으로 데려온 강아지도 하루 만에 그 정도로 정 붙이기는 힘들겠다.”

클로에는 내 사람이 아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지금은 믿을 수 없다. 내 대답을 들은 클로에가 삐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시선을 피한다.

삐진 미녀라.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저 모습을 보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도 있을 법하지만…….

“그런 걸로 넘어갈 거였다면 이미 첫 만남에 홀렸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슬프게도 나 새끼는 그런 수작질에 넘어갈 정도로 인생을 막살지 않아서 말이야. 내 말에 클로에는 여전히 시선을 돌린 채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시던가. 나는 하품을 한 번 하고 침대로 가며 말했다.

“일 다 했으면 알아서 돌아가라. 돌아갈 때 불 끄고.”

말을 마친 나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일을 마친 클로에가 문을 나서고, 나는 누운 채 심장으로 마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많이 모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안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애초에, 이렇게 조금씩 모아놓지 않았다면 대리석 기둥을 짊어지고 달리는 마라톤은 실패했을 것이다. 진짜 한 끗 차이였으니까.

인생의 승부처는 큰 도박에서 결정 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고작 이 정도 차이가 변화를 만들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미약한 차이에서 발생하는 경우도 굉장히 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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