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화
당장 내일이라도 레드우드 영지로 출발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계획이 아름다운 이유가 또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어차피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피 레드우드 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마차를 타고 며칠에 걸쳐 이동해야 한다. 비행기가 있는 세상이 아니니까. 당연히 며칠에 걸친 마차 여행을 준비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 사이 나는 만나야 하는 사람들을 만나며 시간을 보냈다.
“레드우드 영지에서 마차를 보냈어요. 아마 3일 뒤에는 도착할 것 같아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응? 하는 소리를 내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건 의외인데.”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이신 레온 백작님과는 사이가 썩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요. 혹시나 해서 의사를 전달했더니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어요.”
첩보부에서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내용인 모양이다. 클로에의 말에 나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이 내 가정사를 알고 있다는 게 썩 유쾌하지는 않은 일이니까.
“연락은 어떻게 주고받은 거야.”
여기에서 레드우드 영지 사이의 거리는 제법 된다. 사람을 보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면 레온 백작이 마차를 보냈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에 내가 먼저 레드우드 영지를 향해 출발했을 거다.
“첩보부 사람을 시종으로 두면 좋은 이유예요. 사람을 보내는 것보다 몇 배는 빠르죠.”
“연락망을 시종 업무하는 데 사용해도 되는 거야?”
딱 봐도 첩보부에서 구축한 연락망을 사용해서 의사를 타진한 모양인데. 이런 용도로 쓰려고 만들어 놓은 연락망은 아니었을 거 아냐.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어요. 아, 혹시 첩보부 연락망을 사용해서 불편하신 건 아니죠?”
“별로.”
나는 클로에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사용하지 않았어도 어차피 첩보부에는 내가 레드우드 영지로 향한다는 소식이 전달되었을 것이다.
전달되지 않을 수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어차피 이쪽의 정보가 흘러 들어갈 수밖에 없다면 그쪽에서 구축해 놓은 연락망을 활용하는 게 조금이라도 손해를 덜 보는 길이다.
“아마, 영지로 돌아가면 아버님의 태도가 조금은 부드러워져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겠지.”
레온 백작 입장에서는 나를 다시 보게 되었을 거다. 버리는 카드라고 생각하고 유배를 보냈던 놈이 유배지에서 막대한 공을 세웠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도 딱히 정이 가는 사람은 아니다. 애초에 내가 여기로 끌려온 이유 그 자체니까.
“아마, 레온 백작도 영지의 상속 문제를 다시금 생각할지도 몰라요. 최소한, 지금 보여준 행동은 그래 보이잖아요? 기쁘시겠네요.”
“별로.”
레드우드 영지는 준다고 해도 먹을 생각이 없다. 오히려, 지금은 다른 길을 마련해 놓은 상황이니 거기에 집중할 생각이다.
영지로 향하는 이유는 처음에는 그냥 체면치레였을 뿐이다. 물론 사령관과 이야기를 나눈 다음에는 거기에서 해야 할 일이 생겼다. 내가 레드우드 영지로 향하는 건 영지 상속에 대한 욕심 때문이 아니다.
“그치만, 영주라고 한다면 영지 안에서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잖아요?”
클로에의 말대로, 영주라고 한다면 자기 영지 안에서는 왕 부럽지 않은 권한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결국 그것뿐이다.
자기 영지를 벗어나게 된다면 그 권한이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 지금이 무슨 춘추전국시대 같은 상황이라서 영주가 다른 영주를 상대로 땅따먹기를 하고, 스스로 왕을 칭할 수 있다면 모를까.
지금 이 나라의 왕권은 굉장히 안정되어 있다. 오죽하면 영주들이 왕도 아니고, 앞으로 왕이 될 예정인 세자의 눈치를 보며 수확량을 속여 더 많은 공물을 보내기까지 하겠어.
이렇게 왕권이 안정된 나라에서는 영주 같은 것보다, 왕이 내려준 감투를 쓴 중앙 관리가 깡패다.
이미 쿠르스트 국경수비대 사령관과 거래를 마친 내 입장에서는 레드우드 영지를 탐낼 이유가 없다. 이런 시대, 이런 상황에서는 영주보다는 왕명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는 신하의 힘이 더 강하다.
“영지에서 보내는 사람들의 규모는?”
내 말에 클로에가 바로 서류를 내밀었다.
마차 다섯 대, 말을 탄 호위 병력 오십과 하인 열다섯이라. 절로 코웃음이 나온다.
“이곳으로 끌려 올 때와는 꽤 차이가 나는 대접이네.”
올 때는 마치 한 대로 왔는데, 돌아갈 때는 마차 다섯에 호위 병력까지 거느리게 되었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 고작 이런 걸 가지고 레온 백작의 인간성에 대해서 어쩌고저쩌고하는 건 웃긴 일이다.
“어쨌든, 레드우드 영지에서 마차를 보낸 이상 레드우드 영지로 향할 준비는 더 이상 진행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그래, 모시러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어차피 3일이다. 클로에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드우드 영지에서 이렇게 흔쾌하게 사람을 보낼 줄 알았으면 따로 준비하지 않았을 텐데.”
“사람이 살다 보면 쓸데없는 일도 하고 그러는 거지. 이번에는 운이 좋았을 뿐이야.”
레온 백작이 마차까지 보낼 줄 누가 알았겠어. 그 사람 아들놈인 나도 예상하지 못했는데.
일할 때 극한까지 효율을 추구하면 자기도 모르게 운에 의존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시간을 조금 낭비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어쩔 수 없다.
“아, 그리고. 뭐 좀 물어보지.”
내 말에 클로에가 나를 바라봤다.
“말씀해주세요.”
“돈은 얼마나 받았으면 좋겠나?”
내 말에 클로에가 애매한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봤다.
“돈이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시종으로 두고 부려먹는데, 공짜로 일을 시킬 수는 없잖아.”
내 말에 클로에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필요한 자금은 첩보부에서 받고 있어요. 지금 시종으로 일하는 것도 첩보부에서 지시한 일의 일환인걸요. 따로 마틴 님께서 제 주머니를 채워주시지는 않아도 괜찮아요. 마음만 받을게요.”
그렇겠지,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쌈박질 실력은 아직 본 거라고는 레이피어로 동전 꿰는 것밖에 없어서 함부로 평가하기 힘들지만…….
최소한 내 스케줄을 관리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리는 일의 처리 방식은 나쁘지 않았으니까. 완전히 아래로 둔다면 꽤 괜찮은 비서 역할을 해줄 것이다.
사람을 아래에 두고 부리고 싶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마음만 받지 말고 돈도 받아둬. 지갑이 가벼워서 억울한 사람은 많지만, 무거워서 억울한 사람은 없어.”
내 말에 클로에가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정말로 괜찮은데.”
“그럼 첩보부에 청구하는 돈을 줄이든가. 나는 사람 공짜로 부리고는 득 봤다고 생각하는 놈이 아니야.”
인건비의 지불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사람을 아래에 두고 일을 시켰으면 돈이든 밥이든 일해준 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럼, 그렇게 할게요. 매해 수확 철마다 이백 론도 정도면 어떨까요?”
론도 한 닢의 표준 교환 비율이 대충 겉보리 80kg이었나. 그럼 200론도면 겉보리 16톤이네.
겉보리로 바꾸면 갑자기 많아 보이지만, 이 동네는 입을 만한 튜닉 한 장에 5론도를 부르는 동네다. 로델린 같은 귀족이 평상시에 입는 드레스로 넘어가면 가격이 정신줄을 놓고 치솟는다. 150론도 정도였나.
이런 거 저런 거 다 고려해서, 굳이 기를 쓰고 론도를 한국 돈으로 바꾼다면 1론도에 8만 원 정도의 비율로 교환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 연봉으로 1600만 원을 부른 건가. 어차피 첩보부에서도 수입이 들어오니 이 정도가 적절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럼 그렇게 하지.”
“이야,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데 돈까지 받아가며 일하게 될 줄이야. 앞으로는 더 열심히 일해야겠네요.”
“그러면 좋고.”
클로에는 다시금 테이블 앞에 앉아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편지를 분류하던 클로에가 뭔가를 내밀었다.
“엘렌 리버플로우 양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네요.”
왕국 남쪽에 위치한 그린모스 늪지대로 향했다고 했었지. 나는 편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그린모스 늪지대에서 무슨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관련 연구 때문에 천상 왕국 신년 행사 전까지는 꼼짝없이 거기에 묶여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대뜸 그린모스 늪지대라는 곳으로 가게 된 것이 나름대로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편지의 내용을 읽은 나는 클로에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린모스 늪지대에 대해서는 뭐 아는 거 없어?”
내 말에 클로에가 잠깐 고민하다 싶더니 이내 대답을 돌려주었다.
“지독할 정도로 고온다습한 정글이에요. 모기를 비롯한 온갖 해충이 득실거리고, 독을 품지 않은 동식물을 찾아보는 게 더 힘든 곳이죠. 지역 특산물이라면 언데드가 유명하고.”
“언데드? 걸어 다니는 시체 말하는 거야?”
막 그어어어 같은 소리 내며 배회하는 녀석들.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늪에 빠져 죽은 시체들은 재수가 좋으면 수백 년 동안 썩지 않는 경우도 있거든요.”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정글에 그냥 방치된 시체는 거의 썩으라고 기도하는 수준으로 부패가 빠르지만, 늪에 빠진 시체는 거의 썩지 않는다.
“그렇게 보존 상태가 좋은 시체는 원혼이 깃들기 좋다나 봐요. 아, 늪지대 자체는 마법사들이 가끔 연구를 위해 가는 외곽을 제외하면 사람의 손을 거의 타지 않았어요.”
저 말을 해석하면, 늪지대 외곽은 마법사들이 종종 찾아간다는 뜻이다. 이유가 뭘까.
“언데드 연구라도 하는 건가?”
“비슷해요. 그린모스 늪지대 외곽에서 가끔 굉장히 오래된 유물이 발견되거든요. 늪지대에 언데드가 출몰하는 이유가 그 유물들에 담긴 마력과 관련이 있다고 하던데요.”
정글과 언데드라. 부두교에 심취하고 싶은 기분이네.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도 엘렌이 신년 행사에는 참석한다고 하니 다행이군.”
행사가 며칠이나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행사 기간에는 엘렌의 협조를 기대할 수 있을 테니까. 정글에 되살아난 시체가 싸돌아다니는 건 사실 내 알 바는 아니다.
클로에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린모스 늪지대의 언데드 같은 경우는 쿠르스트 산맥의 하이랜더와는 달리 왕국에 큰 위협이 되지 않는 모양이고.
나는 마법에 대해서 완전히 문외한이기 때문에 별로 흥미가 동하지도 않는다. 나름대로 궁금한 점을 해소한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할 일 끝났으면 돌아가서 쉬어. 아 참, 알버트에게 연락이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엘렌이 왕도에 없다면, 내가 왕도에 도착하기 전까지 정보를 의존할 수 있는 건 첩보국장 알버트 뿐이다.
이미 왕국 기사단장 중 하나가 칠색 내각의 적색이라는 점을 알려주었으니, 지금쯤 되었으면 뭐라도 연락이 와야 정상이다.
“국장님께 연락을 취해 볼게요.”
“그래.”
대화를 마친 다음 클로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아마, 쉬러 가는 길에 알버트에게 연락을 넣겠지.
“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나는 손을 흔들어 인사를 대신했다. 클로에가 돌아간 다음, 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이후 일정을 확인했다. 별다른 일정은 없었다. 중요해 보이는 사람을 만날 약속도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부터 3일 정도 푹 쉰 다음 바로 레드우드 영지로 출발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