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60화 (60/275)

060화

그 뒤로도 30분 정도 싸움이 이어졌다.

확실한 건, 이 여자랑 힘겨루기를 하려고 들면 좋은 꼴 못 본다는 거다. 내가 뿜어낸 힘과 그녀가 뿜어낸 힘이 그대로 그녀의 몸 안에 쌓여서, 다음 번 공격에 활용될 것이다. 게다가, 그냥 무식하게 충격파만 뿜어내는 게 아니다.

노련하다. 검을 제대로 휘두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노련한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해 클로에를 상대하려고 해도 어느 순간 싸움은 클로에의 흐름에 맞춰 판이 짜이고 있었다.

뭔가 좀 될 것 같으면 클로에의 칼끝이 갑자기 내 공격을 방해하고, 나는 공격을 수비로 전환한다.

그러다가 다시금 틈을 잡아 공세를 시작해도, 다시 귀신처럼 정신을 차리면 수비에 집중하게 된다.

수십 개의 수류탄이 터진 것처럼, 우리가 싸우던 공터가 개작살 나고 난 다음, 마침내 클로에의 칼끝이 내 목덜미에 닿아있었다.

“후우…… 후우…….”

클로에는 레이피어 끝으로 내 목젖을 겨눈 채 숨을 크게 몇 번 몰아쉰 다음 입을 열었다.

“제 실력에 대한 평가를 듣고 싶은데요.”

평가라, 이 여자에 대한 평가는 딱 한 마디로 축약할 수 있겠네.

“살려주세요.”

내 평가를 들은 클로에가 잠깐 웃음을 터뜨린 다음 레이피어를 거두었다.

“내 패배의 원인이 뭐라고 생각해?”

내 말에 클로에가 곧바로 시원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마틴 님의 패배는 단순한 실전 부족 때문이에요.”

저 말은 납득하기 힘든데.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루가 멀다고 하이랜더부터 시작해서 쿠르스트 산맥의 짐승들까지, 온갖 것들이랑 싸웠는데.”

심지어 내 스파링 상대 중에는 거대한 숯덩이를 검처럼 휘두르는 해골 악마도 있었다고.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그중, 사람은 없었잖아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그 이상 대꾸할 수 없었다. 확실히, 클로에의 말은 사실이긴 하다. 나는 사람이랑 싸울 기회가 거의 없었다.

“짐승이나 괴물을 상대하는 것과, 사람을 상대하는 건 달라요. 마틴 님의 검은, 사람을 상대로 쓰기에는 힘을 너무 과하게 써요. 그러다 보니 동작이 커지죠. 따라서, 저는 그 큰 동작 사이 사이를 노리고 검을 내밀어 마틴 님의 공세를 끊는 걸로 충분했죠.”

말을 마친 나는 몸에 엉겨 붙은 흙먼지를 털어내고 클로에를 바라봤다. 그 사이, 클로에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 그래도 제 능력의 한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분신을 사용한 건 인상 깊었어요. 조금만 더 섬세하게 갈고 닦으면 상대는 좀 더 까다로운 선택이 필요하게 될 거예요. 실제로, 허상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활용한 실력 있는 검사에 대한 이야기도 제법 들었거든요.”

심리전이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줬으면 하는데.”

내 말에 클로에가 으음, 하는 소리를 내고 잠깐 턱을 괸 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상대가 공격할 때, 막는 시늉을 하는 허상을 만들고 옆으로 도는 식이죠. 상대 입장에서는 뭐가 허상인지 구분할 수 없으니, 두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할 테고…… 그러면 운신의 폭이 확 좁아질 거예요.”

이야기를 들은 나는 이내 결론을 내렸다.

“좋아, 나 칼 쓰는 법 좀 가르쳐주라.”

내 말에 클로에가 눈을 껌벅이며 나를 바라봤다.

“네? 마틴 님, 저는 시종으로서 당신을 수행하라는 지시를 받았어요. 검술의 교육은 시종이라는 신분으로 담당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닌걸요.”

“겸업해.”

게롯은 나에게 검술의 기초를 알려주었다. 쿠르스트 산맥에서 한 경험은 나름대로 내 실력 향상에 기여했지만, 엄연히 말하면 제대로 배운 검술은 게롯에게 배운 기초적인 것들이 전부다.

그걸로는 부족하다. 아무래도, 클로에가 나의 부족함 점을 채워 줄 수 있을 것 같다.

“시종으로서의 신분이 걸리적거린다면 말해. 레드우드 영주성 홀에 드러누워서 울면서 데굴데굴 굴러서라도 바꿔줄 테니. 뭐, 기사 서임 같은 거라도 받으면 되는 거냐? 내가 뭘 하면 되는데.”

“저는 첩보국 소속이니까…….”

“첩보국장에게 말하면 되는 건가? 알았어.”

내 말에 클로에가 계속해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미 쿠르스트 산맥에 머무르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저를 마틴 님의 시종이라 알고 있어요. 이 신분을 억지로 뜯어고치려면 첩보국에서 꽤 고생해야 할 텐데. 게다가, 기사로 신분을 위장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에요.”

나는 그 말에 손을 휘휘 저었다.

“상관없어. 알버트가 거절하면 말해. 왕도에 가서 직접 얼굴 맞대고 담판 지을 테니까.”

클로에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이 시종뿐이 아니라는 확신이 섰다. 레이피어로 동전 꿰는 잔재주를 보여줬을 때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이건 그냥 잔재주 이상이다.

필요한 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하는 법이지. 필요하다면 약간 문제의 소지가 될 만한 행동을 저지를 각오도 되어있다.

“애초에, 그 실력이라면 기사 서임 정도는 받고도 남잖아. 신분 위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 같은데.”

내 말에 클로에가 멈칫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높게 평가할 만한 실력은 아니에요.”

“옘병, 입꼬리나 내리고 겸손 떨어.”

내 말에 클로에가 곧바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칼집에 검을 밀어 넣은 나는 어둑해진 하늘을 한 번 살펴봤다.

원래 땀범벅으로 흙구덩이에서 뒹굴고 나면 입맛이 돌기 마련이지. 오늘은 좀 식사를 많이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어차피 내 주머니에서 나간 돈으로 차려진 음식도 아니고, 레드우드 영지의 돈으로 구매한 식료품이잖아? 퍼먹는다고 해도 내 주머니가 가벼워질 일은 전혀 없다.

“고생했다. 오늘은 돌아가서 밥 먹고 쉬자고. 그리고, 오늘부터는 하인이나 호위병들 눈치 보지 말고 겸상해.”

내 말에 클로에가 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별별 소문이 다 돌걸요. 이런 말이 제 입에서 나오는 건 좀 소름 끼치지만, 제가 어디 가서 빠지는 외모는 아니잖아요.”

그래, 확실히 자기 입으로 자신이 이쁘다는 이야기는 어지간해서는 하지 않지.

“그래서 뭐, 내가 첩이라도 하나 들이려나 보다 하고 오해할까 봐?”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은 차고 넘치지 않아요?”

“나중에 내 검술 가르쳐줄 사람으로 밝혀지면 그런 개소문은 사라지기 마련이야. 차라리 지금부터 특별 대우를 해놓는 편이 나중에 그럴듯해 보여.”

내 말에 클로에가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할게요.”

치즈를 올려 구운 감자와 구운 닭, 과일 따위가 식사로 준비되어 있었다.

“도련님,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하인들 중 하나가 깊게 고개를 숙인 채 다가와서 나에게 말을 건네고 나서 곧장 고개를 숙인 채 사라진다. 하인들은 내가 식사를 하는 동안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맞은 편에 앉아 함께 식사를 하고 있던 클로에가 애매한 웃음을 지은 채 나를 바라봤다.

“역시 레드우드 가문의 식솔들은 마틴 님을 무서워하는 모양이네요. 식사하실 때 하인들의 태도를 보니 확실해요.”

“어쩔 수 없지.”

내가 저지른 일은 아니지만 계속 짊어지고 가야 하는 일종의 원죄 같은 거니까.

내가 이 몸에 들어오기 전에 마틴 레드우드가 저질러 놓은 일이 있는걸.

쿠르스트 산맥에서는 그 일대에 사는 사람들을 구한 영웅이지만, 레드우드 영지에서는 여전히 성격 더러운 양아치 도련님일 뿐이다.

쿠르스트 산맥에서 한 일을 듣지 않은 건 아니겠지만, 자신의 경험과 소문 둘 중 하나를 믿으라고 하면 보통 자기 경험을 믿거든.

“너도 하나 잡고 뜯어.”

나는 접시 위에 올려진 닭다리를 하나 뜯어낸 다음 접시를 클로에 쪽으로 밀어주었다.

“닭이라, 잘 먹겠습니다.”

말을 마친 클로에가 남아있는 닭다리를 손으로 움켜쥐고 뜯어냈다. 확 하고 올라오는 뜨거운 김. 우리는 대화를 멈추고 고기를 뜯고 접시를 비우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블 위의 음식은 메뚜기떼라도 만난 것처럼 황량해졌다.

“저는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화장실은 무슨, 보나 마나 국장에게 연락하러 가는 거겠지. 아마 내가 제안한 내용을 알버트에게 전달할 생각인 모양이다.

클로에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하인들에게 말해 그녀의 숙소를 확인하고 몇 가지를 더 배려해 두고, 침구도 바꿔놓으라고 지시했다.

“아, 목욕물도 내 거 말고 하나 더 준비해둬.”

“그러겠습니다, 도련님.”

시종 이상의 역할을 맡기겠다고 결정했으니, 거기에 걸맞은 대우를 해줘야지. 어차피 하인들은 나를 사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별다른 질문을 던지지 않고 순순히 지시를 이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클로에가 돌아왔다.

“목욕물 덥혀 놓으라고 했으니, 씻고 자라. 그리고, 내일부터 해 지면 하늘에서 유성우가 쏟아져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무너져도 내 검술 공부를 도와준다고 생각해.”

말을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련된 잠자리로 향했다.

“허상이라.”

실체가 있는 분신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허상을 제대로 활용할 생각을 깊게 해보지는 않은 것 같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로에가 말했던 방식으로 활용한 적은 제법 있지만, 그걸 그렇게까지 갈고 닦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실체가 있어 피해를 줄 수 있는 분신만큼이나 단순한 허상을 높게 평가했다.

* * *

로델린은 아침 일찍 식사를 하기 위해 영주성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데이먼이 들어왔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첫째 부인.”

데이먼의 말투는 건조했다. 로델린은 데이먼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덕분에 푹 쉬었어요. 데이먼도 안녕히 주무셨나요?”

로델린의 말에 데이먼이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예의가 없는 행위기는 하지만, 로델린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오늘 오후 중으로 그녀의 아들이 돌아온다.

벗어나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고, 그 때문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시간도 길었다. 하지만 마침내, 그녀의 아들은 쿠르스트 산맥의 군역에서 해방되었다. 그것도, 단순한 해방이 아니다. 왕이 친서까지 내려가면서 그녀의 아들이 세운 공을 치하했다.

데이먼이 테이블에 앉고 나서 몇 분 지나지 않아, 제인이 레온과 함께 들어왔다.

“식사하지.”

레온이 자리에 앉으며 말하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마틴이 오늘 중으로 온다고 들었는데.”

레온의 말에 로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레온이 데이먼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가솔들로 하여금 마틴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해라.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오는 길이니, 환영회에 부족함이 없도록 신경 써야 할 것이다. 내가 따로 신경 쓰지 않아도 네가 잘 준비할 것이라 믿는다.”

로델린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쓰게 웃었다. 역시, 그녀의 남편인 레온은 마틴을 영지의 상속자로 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데이먼은 그 지시를 듣고 나서 까칠하던 태도가 많이 풀어졌다.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버님,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레온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영주의 자리는 왕국에 공을 세웠다고 물려 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마틴은 기억상실이다. 물론 기억을 잃기 전까지도 영주가 되기 위한 교육을 성실히 수행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어릴 적부터 강제로나마 교육을 했었다. 그리고, 그 기억이라도 남아있었다면 아마, 레온 백작도 영지의 상속자에 대해서 다시금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틴이 기억상실인 이상 영지의 상속은 힘들다. 데이먼은 레온이 마틴을 포기한 이후 오랜 시간 성실하게 영주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이름값이라면 마틴이 더 높겠지만, 영주로서의 능력은 분명히 데이먼이 더 뛰어날 것이다.

“저는 먼저 일어나 보겠어요.”

로델린은 레온에게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 그녀의 아들 마틴은 이 레드우드 영지에는 정말로 머무르기 힘들 것 같다. 그리고, 로델린도 매한가지겠지.

그녀에게 있어서도 지금까지의 생활을 견디는 것은 서서히 한계에 봉착하고 있었으니까.

차라리, 지금 와서는 마틴이 레드우드 영지를 상속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알아서 길을 찾아보겠다고 말한 게 다행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로델린은 책을 읽으며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이제 와서, 이 영지에 정을 붙일 만한 사람이라고는 그녀의 아들 말고는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