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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61화 (61/275)

061화

영주성으로 진입하는 거대한 성문 앞에는 가솔이란 가솔들이 죄다 튀어나와 시립해 있었다.

“뭐 대단한 새끼 왔다고 영주성 안의 사람들을 다 끌어내서 세워놓은 거야.”

마차 안에서, 나는 그 꼴을 보고는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뭐, 도로에 구두약 같은 것도 발랐나? 마차가 서서히 속력을 줄이다 이내 완전히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나는 깔린 카펫을 밟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내 뒤를 따라 클로에도 내렸다.

내가 내리자, 곧바로 서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바닥에 깔린 카펫의 끝에는 레온 백작이 꽤 근사하게 옷을 차려입은 채 로델린과 제인, 그리고 데이먼을 거느리고 서 있었다.

“집에 돌아온 걸 환영한다. 내 아들, 마틴 레드우드.”

아들이라. 나는 그 말에 고개 숙여 인사했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별로 반갑지는 않을 거야, 아닌가? 인사를 마친 나는 데이먼의 얼굴을 살펴봤다.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다. 나름대로 똥줄이 타고 있는 중이라면 티가 날 법도 한데. 나의 배다른 형께서는 차분했다.

그렇다는 건, 영주 자리는 여전히 데이먼의 것인 모양이군. 레온에게 인사를 한 나는 로델린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간 잘 지내셨어요?”

생각해보면 그렇게 오래 얼굴을 보지 못한 건 아니다. 로델린이 돌아가는 길에 하이랜더 사태가 터졌으니까.

“그래, 너도 얼굴이 밝아 보이는구나.”

로델린의 말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렇긴 하죠?”

간단한 인사를 마친 나는 레온의 둘째 부인, 제인을 향해 인사를 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둘째 부인.”

내 말에 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쿠르스트 산맥에서 해낸 일을 들었어요.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자, 다음은 데이먼이군. 나는 웃으며 데이먼을 향해 말을 건넸다.

“형님은 더 훤칠해지셨습니다.”

내 말에 데이먼이 입에 웃음을 띤 채로 대답했다.

“너도, 성실히 군역을 수행하다 보니 심신이 더욱 강건해진 모양이구나. 가문의 큰 복이야.”

“생각했던 것보다 더 힘들긴 하더군요. 추워 죽는 줄 알았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하하하 웃었다. 내가 웃자, 데이먼도 마주 웃어주며 말했다.

“오느라 여독이 쌓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일단 짐을 풀고 잠시 쉰 다음, 저녁에 회포를 풀도록 하자꾸나. 이래 봬도, 큰 공을 올리고 돌아온 동생을 위해서 준비를 많이 했어.”

저 이야기를 레온이 아니라 데이먼이 하는군. 그럼 사실상 내 귀향 환영식은 데이먼이 주도적으로 준비했다는 뜻이다.

“그러시죠.”

말을 마친 나는 그들의 안내를 받아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뒤의 여자는 누구냐.”

레온의 말에 나는 간단하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검에 조예가 깊은 여자입니다. 따로 검술을 교육받고, 덤으로 시종의 역할도 겸하고 있습니다.”

내 말에 레온이 클로에를 한 번 훑어보았다.

“따로 방을 내어줄 테니, 너 또한 오느라 쌓인 여독을 풀 수 있도록. 이후로도 마틴을 보필하는 데 부족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클로에가 레온의 말을 듣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하겠습니다, 레드우드 백작님.”

성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우리 뒤를 따르던 가솔들이 각자 할 일을 하기 위해 다시금 흩어졌다. 주변에 사람이 적어진 것을 확인한 나는 슬쩍 데이먼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형님, 저녁 식사 전에 따로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아, 아버지도 함께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레온과 데이먼이 나를 돌아봤다.

“사적인 이야기라면 축하연에서 넉넉히 나눌 수 있을 텐데, 따로 자리까지 마련할 필요 있겠느냐. 그보다, 네 어머니가 너를 많이 그리워했다.”

아, 로델린이라면 나중에 찾아 갈 거니 걱정할 필요 없어. 나는 레온의 말에 여전히 웃는 표정을 유지하고 대답했다.

“사적인 이야기가 아니니 이렇게 자리를 청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버님.”

내 말에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바로 자리를 마련했으면 하느냐?”

“그래 주신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말을 마친 다음 나는 데이먼과 함께 레온 백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보자.”

“이번 하이랜더 사태로 인해 쿠르스트 산맥의 관문이 많이 파괴되었습니다. 보수를 위해서, 레드우드 백작가에서 식량 지원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내 말에 데이먼이 허, 하는 소리를 냈다.

“동생아, 쿠르스트 산맥의 사정이야 알고 있지만 그 지역에도 영주들이 있지 않느냐. 레드우드 백작가의 사정도 그렇게 좋지는 않아.”

데이먼, 나는 그 친구와 레온 백작을 한 번씩 본 다음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제 듣는 사람도 없으니 좀 편하게 말하겠습니다. 형님, 그리고 아버지.”

말을 마친 나는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채 두 사람을 바라봤다.

“레드우드 백작가의 곳간은 쿠르스트 산맥으로 향하기 전에 한번 살펴볼 기회가 있었지요. 곳간이 아주 그득하더군요. 절반 정도는 들어내도 올겨울 나는 데는 전혀 문제없겠던데.”

“영지에서 수확한 작물의 소유권은 영주인 나에게 있다.”

레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합니다, 아버님. 이 영지는 아버님의 것이고, 이후 제 형님 데이먼이 이어받아 잘 운영하겠지요.”

내 말에 레온과 데이먼이 동시에 움찔했다. 나는 데이먼을 보고 웃었다.

“이 영지는 형님이 가져도 상관없습니다. 별로 욕심이 나지도 않아요. 물론 저도 얼마든지 권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만, 딱히 그러고 싶지는 않네요.”

내 말에 데이먼과 레온이 다소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먼저 입을 연 건 레온이었다.

“네가 지금, 너에게 주어진 상속 권리를 두고 나와 거래를 하자는 거냐.”

“거래라.”

레온의 말을 들은 나는 얼굴에 웃음을 한가득 띄우고 대답했다.

“아니요. 아버님. 이건 일종의 협박 같은 건데요. 쿠르스트 국경 사령관께서 꽤 재미있는 제안을 하셨거든요. 신년 행사 때 폐하를 독대할 기회가 있으면 왕국의 영지들로 하여금 식량을 공출해 쿠르스트 산맥으로 보내 달라는 청을 해달라는 제안이었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오른손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을 이었다.

“그 대가로 쿠르스트 국경 수비대 총사령관께서 저에게 무엇을 약속해 주셨을 것 같습니까.”

“레드우드 백작가의 영주는 지금 네 앞에 서 있는 아비다. 쿠르스트 산맥의 국경 사령관이 제아무리 군부에서 그 권한이 강한 편이라 하나, 영지의 상속자를 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영주의 권한이다.”

나는 그 말에 입가에서 웃음을 지우고 대답했다.

“그렇군요. 아버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이야, 그럼 어쩔 수 없군요. 폐하를 독대했을 때, 사령관님이 저에게 한 제안을 이행하고 그 이후 형님과 상속권을 두고 다투는 수밖에.”

내 말에 데이먼의 안색이 점점 썩어들어간다.

“…….”

“저는 이래도 흥이고 저래도 흥입니다. 아버님의 말씀대로 영지의 상속자를 정하는 것이 전적으로 영주의 권한이라면야 데이먼 형님이 무사히 영지를 이어받게 되겠군요.”

말을 마친 나는 허리를 약간 앞으로 내민 채 데이먼을 바라봤다.

“한번, 배다른 형제끼리 피 터지게 싸워봅시다. 형님. 그것도 재미있겠네요.”

그리고 마침내 레온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크리스털 재떨이를 나에게 던졌다.

“때려서 교육할 나이는 지난 것 같습니다, 아버지.”

던져진 재떨이를 받아든 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레온을 바라봤다.

“네가 지금……!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는 있느냐.”

“글쎄요, 아마 패륜 아닐까요?”

내 말에 불같이 화를 내던 레온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아비를 협박하는 자식이라. 누가 봐도 반박할 여지 없이 패륜이죠. 하지만 아버지, 조금 솔직해져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재떨이를 바닥에 던졌다. 재떨이가 박살 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애초에 어머니의 몸에 아버님의 정을 쏟아 넣어 태어난 자식을 눈앞에서 치워버리려고 저 멀리 국경 수비대로 유배 보낸 분이, 이제 와서 패륜을 논하는 건 조금 웃기지 않습니까?”

선을 넘은 건 네가 먼저라고 생각해. 아비 협박하는 자식이나, 자식 버리는 아비나. 내가 봤을 때는 용호상박, 자강두천인데?

“그건 너도 알다시피, 후작가 둘째 아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함이었다.”

“에이, 저를 쿠르스트 산맥으로 보내겠다는 제안은 아버님 머리에서 나오지 않았습니까.”

왜 이래, 이제 와서 구질구질하게. 설마 내가 그걸 까먹었을 거라고 생각해서 뱉은 말은 아니겠지.

“짐작하고 계셨겠지만, 저는 여기에 오래 머무르지는 못할 겁니다. 왕도로 향해야 하기 때문에.”

레온이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이미 저 반응 자체가, 쿠르스트 국경 수비대 사령관이 마음먹고 개인적인 인맥을 동원해 나를 밀어주기 시작하면 그 압박을 버티기 힘들다는 증거다.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면 저런 반응이 나올 리 없지.

그리고 사실, 국경 수비대 사령관과 한 약속은 저게 아니었다. 지금 내가 한 행동은 일종의 블러핑이다.

신년 행사에서 국왕과 독대할 때 식량 지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달라, 대신 레드우드 가문의 영지 상속권이 나에게 돌아가도록 돕겠다. 애초에 사령관이 먼저 나에게 제안했던 내용이었다. 나는 이걸 거절하고 다른 제안을 했지. 즉, 애초에 내가 방금 꺼낸 말은 쿠르스트 사령관과 합의한 적이 없는 내용이다.

하지만, 사령관이 먼저 꺼냈다는 말은 충분히 그가 힘을 동원하면 가능한 일이라는 뜻이다. 즉, 레온 백작에게는 내 블러핑이 굉장히 현실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제가 쿠르스트 산맥에서 배운 게 하나 있습니다. 눈앞에 주어진 상황을 뒤로 미루면 상황은 더 악화되고, 때로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는 거죠. 이 자리에서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뭐 생각할 시간을 달라느니, 타협점을 찾아보자느니 하는 개소리는 안 듣겠다는 선포다.

“얼마나 지원하길 바라는 거냐.”

레온의 말에 나는 입맛을 다시고 머리를 긁었다.

“이미 말씀드렸잖습니까? 곳간의 식량 절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데이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를 향해 삿대질을 한다.

“네가 보자 보자 하니 정말로……!”

아, 자리에서 일어나? 그럼 나도 일어날게. 데이먼과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데이먼의 앞에 선 채 얼굴을 들이밀고 웃었다.

“보자 보자 하니 뭐요. 형님, 제 제안…… 아니지, 협박이구나. 협박에 기분이 더러우십니까? 그럼 한번 무시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내 말에 데이먼이 살짝 뒤로 물러나고, 나는 자연스럽게 한 걸음 더 데이먼에게 다가갔다.

“제가 좀 양아치였다지요? 심심하면 이 나이에 술 퍼먹고 하녀 목이나 조르고. 그러던 시절도 있었던 걸로 압니다. 근데 저는 기억을 잃어버렸어요. 형님께서 알고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형님 눈앞에 있는 마틴 레드우드라는 배다른 동생은 물에 빠지기 전이랑은 많이, 정말 많이 달라요.”

말을 마친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꾹 힘을 주며 웃었다.

“어떻게, 이 달라진 동생이랑 영지를 걸고 한번 싸워보시렵니까? 이길 자신은 있으시고?”

“그만.”

레온의 말에 나는 데이먼의 어깨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내렸다.

“올해 레드우드 영지에서 수확한 작물의 절반. 그걸로 만족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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