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화
약 1시간 뒤, 한창 치고받은 다음 대자로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던 나는 연무장의 바닥을 향해 주먹을 한 번 강하게 휘둘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손을 타고 전해지는 충격.
“망할.”
또 졌어?! 돌아버리겠네.
“힘내세요. 마틴 님은 지금 부러울 정도로 빠르게 나아지고 계시니까요. 어제와 오늘이 달라 보일 정도예요.”
나는 그 말에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대답했다.
“힘을 내고 자시고 할 이유가 뭐가 있어. 그나저나 연무장 되게 단단하네.”
그냥 폼으로 만들어 놓은 건 아니었구나. 마차 타고 오면서 클로에와 치고받았을 때는 주변이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개작살이 났었는데. 연무장은 별로 손상되지 않았다.
“나랑 치고받는 모습을 그 병사들이 봤으면 너를 여자로 보지 않았을 텐데.”
내 말에 클로에가 아하, 하는 소리를 내고 레이피어를 허리춤에 꽂는다.
“그러게요. 차라리 병사들을 여기에 남겨둘 걸 그랬나 봐요.”
“결혼은 별로 염두에 두지 않고 사나 봐?”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그런 편이죠. 혹시, 그 점이 문제가 되나요.”
“별로.”
니가 여자를 좋아하건 하이랜더를 좋아하건, 아니면 독신주의 노선을 걷는 중이건 내 알 바냐.
“슬슬 저녁 식사 시간이 된 것 같은데요.”
연무장 입구에 서 있던 하인이 고개를 숙인 채 다가와서 나에게 만찬 준비가 끝났다고 알렸다. 평상시에는 따로 마련된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지만, 오늘은 아니다.
만찬을 위해 영지 아래의 마을 촌장들도 영주성으로 들어왔고, 인근 영지에서도 축하 선물과 함께 사람을 보냈다.
레온 입장에서는 속이 쓰리겠네. 만찬에 필요한 식재료도 꽤 많을 텐데, 거기에 더해서 쿠르스트 산맥으로 애먼 식량까지 지원해주게 생겼으니까.
“씻고 가겠어. 이 꼴로 들어갈 수는 없으니.”
“그리 전하겠습니다, 도련님.”
하인이 대답을 한 다음 인사를 하고 뒷걸음질로 돌아갔다.
“너도 씻고 나서 바로 홀로 오도록 해.”
클로에에게 지시를 마친 나는 바로 목욕을 마치고 나서 만찬 장소로 정해진 홀로 향했다.
“왔느냐.”
레온은 나를 향해 인사말을 건넸다. 물론, 표정은 썩 밝지 않다. 레온의 표정만 따로 뜯어내서 걸어놓으면 사람들이 무슨 추모 행사라도 여는 줄 알겠는데. 물론, 레온을 그런 표정으로 만들어 놓은 나는 레온의 표정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부족한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런 자리까지 마련해주시다니, 소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내 말에 레온이 잠깐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기쁜 날을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느냐. 오늘만큼은 쌓여있는 일들을 뒤로 미뤄두고 이 시간을 즐기자.”
그래도 귀족이고, 영주로서 오랫동안 굴러먹은 짬밥이 있어서 그런지 실제로 하고 싶은 말을 숨기고 인사치레를 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도가 텄구나.
“오늘 만찬을 위해 먼 길을 온 충성스러운 가신과 귀한 손님들이 많다. 가서 인사를 드리는 편이 어떻겠느냐.”
“그러겠습니다, 아버지.”
말을 마친 나는 다시 한번 앉아있는 레온 백작을 향해 인사를 하고, 테이블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래 뭐, 이런 만찬에 참석해서 배불리 먹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결혼식에 먹을 게 아무리 많아도 신부와 신랑은 쫄쫄 굶기 마련이잖아?
“이렇게 먼 길을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는 순서는 다른 영지에서 찾아온 손님들에게 먼저 하고, 영지의 각 마을에서 온 촌장들에게 하는 게 순서다. 인사를 하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자세를 바로 해야지. 왕국을 위해 큰일을 해준 사실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럴수록 예의를 지키고, 공손하게.”
내가 뭔가를 잘못한 기억은 없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를 바라봤다. 꽤 젊은 친구다. 나보다 많아봤자 2-3살 정도. 슬쩍 마련된 테이블 위에 놓인 가문의 문장을 확인한 나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레브란트 후작가 장남 이반 레브란트라. 나랑 같이 물놀이 갔다가 둘째 아들이 죽었다고 했었나.
자기 둘째 아들이 죽은 것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쿠르스트 산맥으로 보냈던 녀석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사지 말짱하게 돌아왔으니 저 친구들 입장에서는 영 기분이 더러울 만도 하다.
게다가 장남이라고 했으니 어떻게 보면 이 친구의 동생이 죽은 거잖아. 까놓고 말해 빡치겠지. 그래서 괜히 시비를 한번 걸어보는 모양이다.
“이반 레브란트, 일전에 있었던 일로 인한 동생분의 죽음에 대해서는 깊은 슬픔의 뜻을 전합니다.”
내 말에 그가 하,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슬픔의 뜻? 마치 내 동생의 죽음에 관련이 없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마틴 레드우드.”
삐딱하게 나오시네. 한번 제대로 시비를 털어보자 뭐 그런 건가? 레브란트 후작가라. 가문의 뒤에 붙는 공후백자남이라고 하는 호칭은 어지간해서는 바뀌는 법이 없다.
남작이 자작이 되거나, 백작이 후작이 되는 가장 빠른 길이 반란에 가담해서 성공시키는 일이라는 이야기도 있을 지경이니까.
즉, 아직 내가 대놓고 앞에서 재수 없는 표정으로 이빨을 털어버리기에는 다소 난감한 상대라는 뜻이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나는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동생분께서 함께 호수로 물놀이를 나갔다가 당하신 변에 대해서는 저 또한 상심이 컸습니다. 서로 마음이 맞는 친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떠내 보내다니 지금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네가 끝까지…….”
레브란트 후작가의 장남 친구. 오늘 이 만찬 자리에서 내 입으로 죄송합니다, 라는 말이 나올 일은 없어. 그걸 내 잘못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죽음에 대한 책임을 본격적으로 따질 수 있게 되니까. 일이 귀찮아진다.
얼굴에 피가 몰리기 시작한 그를 보고 나는 어두운 표정으로 잔을 들고, 이반 레브란트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오늘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을 보내셨으면 합니다.”
“집어치우게.”
어지간히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 아직 어려서 그런 걸까.
지금 이반이 나를 싫어하는 것 이상으로 레온이 나를 싫어하고 있을 거다. 자식이 아비에게 엿을 먹인 상황이니까.
하지만 레온은 이 자리에서 그런 티를 전혀 내고 있지 않았다. 그에 비해 레브란트 후작가를 이어받을 이 친구는 뭐라고 해야 하나.
데이먼과 자웅을 겨룰 만한 친구라고 감히 평가해보겠다. 얼굴에 가면도 제대로 못 쓰면서 무슨 큰일을 하겠다고.
“그럼 저는 이만.”
공손한 인사를 돌려준 나는 그 이후에도 인근 영지에서 찾아온 손님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블랙매도우 남작가의 신시아에요. 만나 뵙게 되어서 기뻐요.”
그리고, 상당수의 가문들은 장남이나 차남 대신 딸을 보내왔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레브란트 후작가를 제외한 나머지 귀족 가문에서는 죄다 여자를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가 뭔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눈치챌 수 있다.
더 웃긴 건, 정작 참석한 여자들은 나를 어려워한다는 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서워한다고 해야겠지.”
“누가요?”
클로에는 어느 순간 내 뒤에 붙어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내 중얼거림을 들은 클로에의 질문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악명 높은 올가미 도련님. 아직 그 버릇을 고쳤는지 안 고쳤는지는 모르겠지만 공을 세워 이름이 높아졌으니. 귀족 가문 입장에서는 신랑 후보로 올려두고 싶어 하는데.”
문제는 결혼을 하게 되는 여자들의 불쌍한 처지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 모여있는 귀족가의 여식들 중에 한 명을 찝어서 관심을 보여볼까? 그럼 그 여자 얼굴에서 핏기가 쫙 빠질걸.”
억지로 밝은 표정을 유지하겠지만, 머릿속으로는 첫날밤에 목에 밧줄을 걸고 켁켁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그릴 것이다.
“정작 저는 소문과 다르게 목에 실타래 한 가닥 걸려 본 적 없는데요.”
그거야 뭐, 나는 그런 취향이 없으니까. 나는 다음의 손님을 향해 걸어가면서 머리를 살짝 긁었다.
“이래서야 원.”
내 생각보다 올가미 도련님이라고 하는 거지 같은 타이틀이 꽤 널리 퍼져 있는 모양이다. 이런 이미지가 강하게 박혀있는 상황에서는 설사 왕도의 귀족들과 친분을 쌓기가 힘들 것 같은데.
몸캠 사기에 걸려서 알몸으로 손장난하는 영상이 지인들에게 쫙 뿌려진 다음 동창회에 나가는 꼴이니까. 나는 슬쩍 레온 백작 옆에 앉아있는 로델린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로델린에게 의존해야 할 일이 많아질 것 같다. 나는 몰라도, 그녀라면 친분을 쌓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다.
나에 대한 소문 때문에 나를 초대하는 건 좀 거시기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관심이 없는 건 아닐 테니까. 그러면 로델린을 대신 부르는 식으로 일을 처리할 거다.
“오늘 만찬에서 얻어가는 건 이 정도면 족하겠네.”
그냥 시간 낭비를 한 건 아니라서 다행이다. 일단, 여기까지 찾아온 다른 영지의 귀족들을 만나보는 건 이걸로 끝났다.
다음은 영지 마을의 촌장들과 인사를 나눠야 하는데. 여기에는 별로 신경 쓸 생각이 없다. 애초에, 내 영지가 될 것도 아닌데 촌장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줄 이유는 없잖아?
적당히 인사를 마치고, 나는 로델린의 옆에 앉았다.
“자, 먹으렴. 사람을 만나 인사를 나누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을 텐데.”
로델린은 내 쪽으로 접시를 하나 밀어주었다. 살을 발라낸 칠면조 고기가 접시 위에 놓여있다. 뭘 또 이걸 다 발라 놓았어. 내가 손이 없는 것도 아니고.
슬쩍 테이블을 보니 로델린은 거의 식사를 하지 않은 모양이다.
“어머니도 아직 식사를 안 하신 것 같은데, 같이 드시죠.”
내 말에 로델린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식사를 하던 와중에 로델린이 작게 한숨을 쉬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네 이전 모습을 바라보면서 속이 썩어들어가는 것 같았단다.”
뭐, 양아치였으니까. 식사를 하던 나는 포크를 잠깐 내려놓고 로델린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들리는 이야기만으로도 제가 얼마나 모자란 녀석이었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가슴이 아플 일이지요.”
로델린은 내 말에 고개를 몇 번 저었다.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야. 내가 잘못 키운 죄책감 때문에 가슴이 아팠던 거란다.”
말을 마친 로델린이 포크로 음식을 몇 번 찌르다가 말을 이었다.
“미안하다. 변명 아닌 변명을 조금 해보자면…… 네 아버지, 레온과 결혼했을 때 내 나이는 이제 막 열아홉이 되었을 때였어. 네가 세상에 나왔을 때는 이제 막 스물이 되었을 때였고.”
말을 마친 로델린이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네가 세상에 나왔을 때,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있는지 잘 몰랐단다.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어. 그저 뭐든지 해주고 싶었고, 조금이라도 더 좋은 걸 주고 싶었어.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지. 사랑하는 아들, 내 배 아파 낳은 아들이었으니까.”
왁자지껄한 연회 속에서도 로델린의 말은 어쨌든 귀로 제대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도 나름대로 로델린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우는 얼굴 대신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고, 가지고 싶은 걸 가지지 못해서 시무룩해 있으면 뭐라도 해줘야 할 것 같아서 어쩔 줄 몰랐지. 못난 어미였어. 네가 어느 정도 자라고 나서야 내 잘못을 깨달았지만 그땐 너무 늦어있었다.”
말을 마친 로델린이 내 손을 잡았다.
“그런데, 모자란 어미의 부족한 생각과 덜떨어진 행동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컸구나. 비록 그것이…… 호수에서 일어난 불의의 사고 때문이라지만.”
이야, 이건 아무래도 죄책감이 생기는 기분인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호수에 빠진 게 썩 나쁜 일은 아니었던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하지는 마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단다.”
그런 다소 간지러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레드우드 영주성에서의 연회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나쁜 분위기는 아니었다.
“로티샤 호수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내가 대신 사과하지. 아들의 잘못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났어.”
연회가 이어지던 와중 내 사랑해 마지않는 아버지, 레온 백작이 레브란트 후작가의 장남에게 던진 저 개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히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