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화
레온 백작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저게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오냐, 아주 서로 사이 틀어졌으니 한번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가 보자 그건가?
“마틴?”
갑자기 일어난 나를 보고 로델린이 당황하며 내 옷깃을 붙잡았다.
“잠시만요, 어머니.”
나는 차분하게 말한 다음 옷깃을 잡고 있는 로델린의 손을 잡았다. 로델린이 손에서 힘을 풀고, 나는 레온 백작에게로 향했다. 나와 레온 백작 사이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불과 몇 걸음도 되지 않았다.
“방금 되게 웃기는 소리를 들은 것 같습니다, 아버지.”
레브란트 후작가의 자제가 나랑 정신줄 놓고 간이 터져라 술 푸다가 1+1으로 호수에 빠진 게 내 잘못이라고?
“마틴, 인정해야 할 건 인정해야 하지 않겠느냐.”
인정을 하긴 뭘 해 이 새끼야. 니가 나한테 엿을 한 번 먹고 나서도 연회장에서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길래 신기하게 생각했는데, 아예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엿을 먹일 생각이었나 보지?
나와 레온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던 이반 레브란트가 입을 열었다.
“레온 백작이 직접 사과한 일이다. 네 아버지이자 레드우드 영지의 영주가 직접 한 말이다.”
“그리고 그건 내가 연관되어 있는 일이지, 이반 레브란트. 잘잘못을 따지고 싶다면 내 아버지가 아니라 나한테 찾아와야 했을 텐데.”
“방금 전 태도를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원만한 해결이 힘들 것 같아서.”
이반의 대답을 들은 나는 코웃음을 치고 녀석을 바라봤다.
“지랄한다.”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을 들은 레온이 나를 향해 외쳤다.
“마틴!”
그 외침과 함께 활기를 띠고 있던 연회장의 분위기가 액화 질소에 쑤셔 넣은 것처럼 차갑게 굳었다.
“뭡니까, 아버지. 이 친구랑 나눠야 할 말이 있어서 그런데 짧게 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내가 말을 마치자 이반 레브란트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봤다.
“지금, 자네가 누구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는 알고 있나.”
“알고 있는데.”
지금 이 상황까지 와서 저 녀석에게 친절하게 존댓말 꼬박꼬박 해주고, 기분 상할까 봐 내뱉는 말에 필터링을 달 이유는 없다.
후작가 장남? 어쩌라고, 집어치워. 지금 여기에서 내가 그 이름값 때문에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꼼짝없이 이반 레브란트의 동생 놈이 물에 빠져 뒈진 게 내 탓이 될 상황인데.
아까랑은 상황이 다르다.
“분명히 말한다, 이반 레브란트. 네 동생이 로티샤 호수에서 죽은 건 사고야. 불의로 일어난 사고에 대한 책임을 단지 동행했다는 이유로 나에게 물을 수는 없어.”
친구랑 같이 택시 탔는데 자동차 사고가 나서 친구가 죽으면 그게 내 잘못이 되냐? 내 말에 이반 레브란트가 곧바로 목청을 높였다.
“로티샤 호수에서 있었던 일에는 분명히 네 책임도 있다!”
논리도 없고 증거도 없는데 꼬마애가 장난감 사달라고 징징거리는 것처럼 떼쓴다면 내 쪽에서도 할 말은 딱 하나뿐이지.
“없어.”
나도 같이 떼쓸 거다. 어디 한번 이렇게 너랑 나랑 사이좋게 끌어안고 3박 4일 동안 서로 인정하라고 지랄하고 인정 못 한다고 염병 떨면서 시간 죽여보자고. 누가 먼저 지쳐 나가떨어지나.
“…….”
이반 레브란트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 와서 이 후작가 놈들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벌써 몇 개월이나 지난 로티샤 호수의 사건을 물고 늘어지는 이유는 뻔하다.
인정하게 만들고, 그걸 빌미로 내 멱살을 잡고 몇 번 흔들어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좀 받아먹겠다는 거지. 몇 개월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 내 몸에는 떨어질 콩고물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으니까.
“그만, 모처럼 마련된 연회에서 이런 소란이 생기는 건 바라지 않는다. 레브란트 후작가의 장남도 이만 진정하시게.”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를 더 죽여버리고 싶다는 말이 있지. 이 지랄 같은 사태를 벌여놓은 건 정작 자신이면서 이제 와서 말리려고 든다.
“아니요, 아버님. 여기서 확실히 정리해야겠습니다.”
장단 맞춰서 놀아 줄 생각 없어. 여기에서 끝내고 다시는 로티샤 호수 건으로 레브란트 후작가에서 나한테 시비 트는 일 없도록 할 거다.
“서로의 주장이 맞지 않으니, 서로 목청만 높아지지 않느냐. 게다가, 지금 네 태도는 분명히 무례했다. 이 이상 상황을 악화시키지 말거라.”
단호한 레온 백작의 말을 나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이반 레브란트를 향해 턱짓을 했다.
“이반 레브란트, 싸울 사람 하나 뽑아.”
내 말에 이반 레브란트가 눈썹을 찌푸렸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뭐, 절차에 따라 면상에 장갑이라도 던져 줄까?”
얼굴로 그거 받으면 기분 더러울 것 같아서 나름대로 배려해준 건데. 내 말에 이반이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지금 결투에 의한 재판을 하자는 거냐.”
“로티샤 호수의 사건에 내 책임이 있다고 하는 레브란트 후작가도 확실한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책임이 없다고 하는 나로서도 확실한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잖아?”
물론 현대의 미끈하게 빠진 사법체계 안에서는 나도 증명 못 하고 저 친구도 증명 못 하면 혐의없음으로 불기소처분 당하겠지만, 슬프게도 이 세상은 그렇지 않다.
확실하게 매듭짓고, 더는 레브란트 후작가에서 이 사안으로 내 엉덩이를 쿡쿡 쑤시지 않게 만들려면 이 방법이 최고다.
“왜, 막상 결투 재판으로 끝내려고 하니 고민되는 모양이지?”
내 말에 이반 레브란트가 대답했다.
“네가 쿠르스트 산맥에서 수비대의 간부로 군역을 마쳤고, 하이랜더를 막는데 큰 공을 세운 건 왕국의 귀족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네 실력을 고려한다면 결투에 의한 재판으로 시비를 가리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그래, 이리 뺀질 저리 뺀질 참 애쓰는구나. 그런 식으로 나올 것 같았지.
“내가 싸울 생각 없어.”
말을 마친 나는 목청을 높였다.
“클로에!”
내 외침에 연회 테이블에 앉아서 지금 광경을 구경하고 있던 클로에가 흠칫하고는 나를 바라봤다. 동시에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의 눈이 전부 그녀에게로 쏠렸다.
“이러면 좀 공평하겠지?”
내 말에 이반 레브란트가 대답했다.
“여자를 결투 재판의 대리로 내세우겠다고.”
“왜, 싫으면 대리 세우지 말고 내가 직접 싸울까?”
내 말에 이반 레브란트가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다음 나를 응시한다. 거절할 수는 없을걸. 입소문은 무섭고, 지금 이 자리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레드우드 영지 안의 촌장들과 인근 영지에서 온 손님들이다.
이 앞에서 결투를, 그것도 상대가 여자인 결투를 거절하고 꼬리를 말았다?
레브란트 가문의 장자는 천하에 둘도 없는 쫄보 새끼라고 온 천지에 광고를 하는 꼴이다. 채신머리 구기는 방법이야 많다고 하지만 그것만큼 빠르게 채신머리를 작살 내는 방법이 또 있을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이 결투의 증인이 될 것이다.”
결국 녀석은 내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곧장 이반 레브란트의 말을 받았다.
“결투로 정해진 결과는 번복하지 않는다.”
알고 있으니 싸울 놈이나 빨리 추려. 시간 질질 끌지 말고. 이반 레브란트가 시선을 돌려 레온을 바라봤다.
“레드우드 백작가의 영주님, 마틴 레드우드의 요청에 따른 결투 재판을 하려고 합니다. 자리를 마련해 주시겠습니까.”
“……그러도록.”
연회장의 분위기가 변했다. 결투를 위한 공간이 마련되는 동안, 졸지에 내 대리로 결투 재판을 수행하게 된 클로에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에요?”
클로에가 눈에 띄게 당황하는 중이다.
“왜, 질 것 같냐?”
내 말에 클로에가 결투 상대로 내정된 사람을 슥 훑어본 다음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하반신을 흙에 파묻고 싸워도 제가 이길걸요.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럼 뭐가 문제야.”
내 말에 클로에가 자기 가슴을 퍽퍽 때리면서 말했다.
“저는 대외적으로 마틴 님의 시종일 뿐이에요. 대뜸 결투에서 후작가 가신을 이겨버리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나는 클로에의 말을 듣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좋네. 어차피 내 시종이라는 위장 신분은 벗어던질 예정이었잖아.”
내 시종이라는 위장 신분은 검술 교사로 갈아 끼울 계획 아니었어?
“그건 그렇지만…….”
대답하고는. 맥아리 빠지게. 나는 하품을 한 번 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면 나도 첩보국에 도움을 주기 힘들어져.”
“……확실해요?”
사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아니라고 생각하면 지던가. 다만, 네가 패배한 이후 나에게 벌어질 일을 감당할 수 있길 바란다.”
이쯤에서 뻥카 한 번 날려줘야지. 내 말에 클로에가 후우, 하는 소리를 내고 홀의 천장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발라버릴까요? 아니면 적당히 맞춰주다가 이길까요.”
“조져버려. 다만, 다른 사람들이 네 실력도 제대로 못 알아볼 정도로 순식간에 조지지는 말고.”
신분세탁을 끝낸다면 클로에는 나에게 검술을 가르쳐주는 교사라는 새 신분을 얻을 예정이다. 결투에서 비실거리는 모습을 보여줄 이유는 없다.
“주문 한번 까다롭네요. 알겠어요.”
대답을 마친 클로에는 자리에 앉아서 결투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대결을 준비 중인 레브란트 후작가의 가신을 구경하던 나는 픽 웃으며 클로에를 바라봤다.
“어이구, 저 덩치 봐. 껍데기만 봐서는 한 손으로 네 허리를 똑 하고 부러뜨리겠는데.”
아무래도 꼭 결투에서 이기고 싶은 모양이다. 내 말을 들은 클로에가 몸을 살짝 떠는 시늉을 한다.
“저같이 가녀린 여자가 저런 무식한 근육 덩어리를 이길 수 있을까요? 어떡하죠? 무서워라.”
절로 입에서 염병, 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게 하네. 괜히 장난쳤다.
레브란트 후작가의 근육덩어리도 클로에의 표정을 봤는지 씨익 하고 웃는다. 클로에가 겉으로는 두려워하는 표정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웃어? 그 허리가 반대로 접혀도 웃음 질질 흘러나오나 보자.”
몸은 무섭다고 말하지만 입은 솔직하군. 윗사람이라 꼬박꼬박 존댓말을 해서 다행이지, 아랫사람이거나 대등한 입장이었다면 나도 클로에한테 이런저런 협박을 참 많이 들었을 것 같다.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나는 그 말에 좋아, 라고 말한 다음 클로에를 바라봤다. 자리에서 일어난 클로에는 레이피어를 챙긴 다음 나를 향해 인사를 하고, 연회장 한가운데 마련된 공간에 섰다.
졸지에 연회장에 초대되어서 결투의 진행자 역할을 하게 된 신관이 큰 목소리로 현재 일어나게 되는 결투 재판의 목적과 이후 일어나게 되는 결과에 대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술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구경거리 중 하나가 싸움이잖아. 심지어 그냥 길거리 싸움을 구경할 때는 손에 술잔을 들고 집중해서 구경하기 어렵지만, 이건 아주 술 먹으면서 구경하라고 판을 깔아준 꼴이니까.
“아가씨 팔자도 참 험하군. 고운 얼굴은 다치지 않게 해주지.”
근육 덩어리의 능글거리는 말을 들은 클로에가 어머, 하는 소리를 내고 희미하게 웃음을 띄웠다.
“자비롭기도 해라. 저도 죽이지는 않을게요.”
사제가 뒤로 물러나 종을 치는 방망이를 손에 들었다. 저걸로 종을 치면 결투가 시작된다. 마침내, 사제가 종을 힘껏 때렸다. 맑은 소리가 퍼지는 가운데, 대결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