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65화 (65/275)

065화

클로에는 레이피어의 끝을 겨눈 채 뒤로 살짝 물러났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를 향해 휘둘러진 검이 땅을 내려찍는다.

“조금 더 힘을 내.”

팍 하고 튀어 나가 상대하는 남자의 귓가로 얼굴을 들이민 클로에는 그렇게 속삭인 다음 순식간에 뒤로 빠졌다. 심장 박동과 함께 온몸으로 퍼지는 마력과, 동시에 심장을 죄어오는 것 같은 뻐근한 통증.

“이게……!”

처음에 얼굴은 다치지 않게 하겠다며 여유를 부리던 남자는 이제 관자놀이에 핏줄까지 바짝 세워가며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클로에가 허리를 뒤로 젖히자,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로 휘둘러진 검이 그녀의 가슴 언저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아까워라.”

놀리는 것 같은 한마디와 함께, 클로에는 다시 상반신을 세우며 그 반동으로 레이피어를 내질렀다. 카칵, 하는 쇠 갈리는 소리와 함께 클로에가 내지른 레이피어와 상대의 대검이 서로 부딪치며 불똥을 튀긴다.

“와 막았어. 대단한데?”

클로에는 곧바로 레이피어를 허공으로 휙 던지고는 짝짝짝, 하고 박수를 친다. 그 꼴을 보고 있는 상대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진지하게 임해야 하는 결투에서 별거 없어 보이는 여자가 광대놀음을 하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비참하게 느껴지고 있다.

그 사이 클로에가 남자의 다리를 한 번 걷어찼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저절로 상대의 무릎이 꺾인다.

“남자가 고개를 그렇게 쉽게 숙이면 여자한테 미움받는데.”

“으아아아!”

상대가 억지로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나며 검을 올려붙였다. 휘둘러진 검은 후웅, 하는 소리를 내고 허공을 스친다.

“부채질이 필요한 날씨는 아닌데.”

클로에는 슬슬 끝내야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이 이상 길어질 이유가 없는 싸움이다. 끝내고, 다시 테이블에 돌아가서 뜯고 있던 돼지갈비나 마저 뜯어야지.

결론을 내린 클로에는 상대에게 파고들어 상대의 배를 향해 무릎 차기를 때려 박았다. 뻐억, 하는 북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상대의 몸이 공중에 약간 떠올랐다 가라앉는다. 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우……웨에에에에엑!”

양손으로 스스로의 복부를 감싸 쥔 남자가 무릎을 꿇은 채 바닥에 피가 섞인 토사물을 쏟아낸다.

“푸후.”

클로에는 상대의 구토를 보다가 얼굴을 구기고 코를 막고 마틴을 향해 걸어갔다.

* * *

“조금 더 놀아주지 그랬어.”

클로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겼다. 그것도 그냥 이긴 게 아니라 아주 상대의 자존심을 짓밟아버렸다.

“배고파요.”

짤막한 대답을 남겨놓고 클로에는 음식이 쌓여있는 곳으로 향한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반 레브란트 쪽으로 향했다.

“젠장!”

이반의 표정이 어둡다.

“혹시 똥 마려우십니까? 화장실 알려 드릴까요?”

내가 이겼으니 이제는 존댓말은 써준다. 그런다고 내가 거둔 승리의 빛이 바래지는 않는다.

“이건!”

이반의 외침을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입을 열었다.

“설마 무효라고 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이 연회장 안에 있는 모두가 일련의 상황을 보고 들었습니다.”

내 말에 이반이 주변을 살펴본 다음 입을 다물고 몸을 살짝 떨었다. 분한 모양이다.

“이후, 레브란트 후작가에서 로티샤 호수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고에 대해 저에게 책임을 묻는 모든 행위는 금지해주시길 바랍니다.”

내 말에 이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반 레브란트?”

내 말에 녀석이 눈을 질끈 감고 잇다가 대답했다.

“알았다.”

좋아, 오늘 연회 재미있게 끝났네. 확답을 들은 나는 그 길로 레온 백작에게로 향했다.

“아버지, 저를 위해서 열어주신 파티는 감사하지만 제가 조금 피곤합니다.”

내 말에 레온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나를 바라봤다.

“그래, 돌아가서 쉬도록 해라.”

“물론 그럴 생각입니다. 그 전에 미리 전해드려야 할 소식이 있어서요.”

내 말에 레온이 나를 슥 훑었다. 이 양아치 패륜아 새끼가 또 무슨 개소리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뜸을 들이고 있을까 하는 얼굴이다.

그렇게 불안해할 필요 없어. 이건 아마 너도 굉장히 좋아할 만한 제안이라고 생각하거든.

“신년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 왕도로 향할 때, 어머니도 함께 모시고 갈 생각입니다.”

“그래, 괜찮은 생각이구나. 언제쯤 돌아올 것 같으냐.”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글쎄요,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왕도에 머무르려고 합니다. 어머니 또한 함께 모시고 살 생각입니다.”

내 말에 레온의 표정이 변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왕도에 계속 머무르겠다니.”

“어머니와는 이미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허락하신 일입니다.”

내 말에 레온이 대답했다.

“네 어머니가 허락했다고 해도 내가 허락할 수 없다. 부부가 서로 떨어져 산다니, 무슨 흉한 이야기가 돌 줄 알고.”

뭘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레온이 거절 의사를 표명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별로 신경 쓸 일도 아니고, 무서워할 일도 아니다.

“아무튼, 그렇게 알고 계시면 됩니다.”

내 말에 레온이 나를 바라봤다.

“네가 지금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통보를 하는 것이렷다.”

“네. 혹시,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어머니와 함께 살고 싶다는 자식의 의사를 거절하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요.”

내 말에 레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정녕 가문과 완전히 연을 끊을 생각인 것이냐.”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 사이 레온이 고개를 돌려 로델린을 바라봤다.

“저 말이 참이오?”

로델린이 레온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이 처음으로 왕도에서 생활한다고 하는데, 어미 된 사람으로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따라가 보살펴 준다면, 마틴이 왕도 생활에 적응하기 훨씬 수월하겠죠.”

로델린의 대답을 들은 레온의 시선이 나와 로델린을 번갈아 바라본다. 그리고 입에서 무거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모자가 서로 마음을 맞춰 지아비이자 아버지인 나를 모욕하려 하는 거냐.”

나는 그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식이 좋은 일이 생겨 왕도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가 아들과 함께 사는 것이 어찌 모욕이라 생각하십니까.”

내 말에 레온이 중얼거렸다.

“닥쳐라. 애초에, 네 어머니를 모실 만한 변변찮은 곳도 마련하지 못했을 거 아니냐. 그런 주제에 대뜸 왕도로 모시고만 가면 제일이더냐.”

“그 점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머니는 레드우드 영주성에 머무르실 때처럼…… 아니지, 어쩌면 그 이상으로 좋은 곳에서 머무르실 겁니다.”

레온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꽉 주먹을 쥐고 있었다. 왜, 막상 여자가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아깝냐?

“그럼 저는 이만 방에 돌아가서 쉬도록 하겠습니다. 저를 위해 마련해 주신 만찬에 다시 한번 깊게 감사드립니다.”

“…….”

어쭈, 말 안 해? 그래라.

“안녕히 주무십시오, 아버지.”

나는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다음 방으로 향했다. 곧바로 내 뒤에 클로에가 따라붙었다.

“분위기 보아하니, 바로 여행 준비 들어갈까요?”

“말하지 않아도 잘하네. 앞으로 크게 될 인재야.”

“조금 더 칭찬해주셔도 괜찮아요.”

칭찬이라. 말로 하는 칭찬은 칭찬이 아니지.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자금 중에 백오십 론도는 네 몫으로 빼놔.”

내 말에 클로에가 다소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결투 협조 비용. 왕도 가서 과자 사 먹어라.”

오늘 클로에가 순순히 협조해주지 않았다면 내 마음에 드는 성과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협조해 준 사람에게는 돈이든 뭐든 해준 일에 걸맞은 보상을 지불해야 한다.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용하게 잘 쓰겠습니다.”

“왕도로 갈 준비를 하면서, 왕도에 도착해서 머무를 곳도 준비해줘.”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아, 그거. 첩보국장님이 따로 머무르실 저택을 제공하실 생각인 모양이었는데요.”

“그래? 다행이네.”

남의 집 빌려서 머무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하지만 계속 거기에서 신세를 질 수는 없지 않을까 합니다. 마틴 님이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금으로는 아무래도…… 뭐라고 해야 할까요. 신분에 어울리는 거처를 구하는 게 조금 난처할 것 같아요.”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한두 달 정도 머무를 곳만 있으면 충분해.”

이후에 내가 머무를 장소는 받아내든 뜯어내든 하면 된다.

“그럼, 장기적으로 머무를 거처는 따로 제가 준비할 필요 없다는 이야기로 알아들을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첩보국장은 너에게 별 이야기 안 하든?”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첩보국장이 너를 내 시종으로 붙인 이유 중 하나가 미인계로 홀리는 거였잖아.”

내 말에 뒤를 따라 걸어가던 클로에가 걸음을 멈췄다. 나도 마찬가지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지금까지 별다른 진전이 없었으니, 첩보국장의 입장에서는 한마디 할 법도 한데.”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 부하를 조지는 건 상사의 특권이자 의무다. 알버트가 그냥 허허허 웃으면서 넘어가지는 않았을 거다. 내 말에 클로에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해당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마틴 님에게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렇겠지. 알아서 해. 그냥 한번 물어본 거였으니까.”

대화를 마칠 때 즈음 나는 거처에 도착했다. 의자에 걸터앉은 나는 후우, 하는 소리와 함께 목의 넥타이를 풀어 내리며 클로에에게 말을 던졌다.

“고생했다, 돌아가서 쉬어.”

“……네. 마틴 님도 푹 쉬세요.”

잠깐 고민하던 클로에는 이내 그런 인사를 남기고 내 거처를 떠났다.

“슬슬 골치가 아프겠지.”

클로에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하기 싫던 미인계였다. 근데 미인계를 걸어야 하는 대상은 이미 자기 머리 위에서 놀면서 당해줄 기색을 보이지 않고, 상사는 왜 아직도 성과가 없냐며 쪼아댄다.

클로에가 첩보국이라는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제아무리 높다고 해도 이런 상황이 길어지면 점점 힘들어지겠지.

“적당히 타이밍 봐서 아예 첩보국에서 빼내 버려야겠어.”

안 그래도 제법 마음에 드는 수준이었던 시종으로서의 업무는 이제 따로 지적할 게 없을 정도로 훌륭하게 소화하고 있다.

게다가, 검술도 아직까지는 나를 이겨 먹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다. 어디 가서 이런 인재를 구하는 건 쉽지 않을 거다.

나는 셔츠를 벗어 휙 하고 집어던졌다. 분신이 나타나 내가 던진 셔츠를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

“물건은 돈으로 사지만 사람은 기회로 산다지.”

돈이 아무리 많아도 뛰어난 인재를 만날 기회가 없으면 사람을 구할 수는 없다.

“인생살이가, 꼭 랜덤 박스 같다니까.”

누구는 수백만 원을 캐시로 때려 박아야 좋은 아이템을 구하는데, 누구는 그냥 길바닥에서 줍기도 하잖아. 좋은 인재 구하는 게 꼭 그 꼴이다. 운이 좋아야 한다.

클로에는 좋은 인재고, 나는 얻은 기회를 버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신년 행사가 마무리되면, 본격적으로 작업에 착수해야겠는걸.”

나름대로 결정을 내린 나는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워 눈을 감고 심장에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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