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69화 (69/275)

069화

후드를 쓴 사람이 별다른 말 없이 흔들리는 촛불 아래에서 조각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은으로 만들어진 잔이 피를 가득 채운 채 놓여있다.

― 결국 너도 실패했나. 입만 살았었군.

끓어오르는 피를 통해 목소리가 전해진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그 말에 대답했다.

“아, 변명하지는 않으마. 상대하는 친구가 제법이긴 하군.”

후드 아래에서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 이제 와서 인정하는 척 하는 거냐, 자색.

자색이라고 호칭된 후드 쓴 사람은 적색의 말에 낮게 웃음을 흘렸다. 인정하는 척하다니. 그런 쓸데없는 감정 소모는 하지 않는다.

“별수 없지. 이번에 세운 계획에 소모한 인력은 네가 징발한 녀석들이었으니까.”

― 네 실패가 내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그럴 리가. 그냥, 내 생각보다 훨씬 연약한 친구들이었다는 것뿐이야. 실패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내 탓이지.”

말을 마친 자색은 티스푼으로 차를 휘휘 젓다가 입을 열었다.

“설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나에게 연락 한 건 아닐 텐데?”

― ……첩보국에서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한 모양이다. 왕국 기사단장들을 대상으로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찻잔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내용물을 바라보던 자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첩보국장이 마틴 레드우드와 연합한 모양이네.”

그렇다면 적색이 무사히 생존할 가능성은 확 낮아졌다.

― 그게 무슨 소리지, 확실한 건가?

“알 필요 없어.”

설명할 수 없다. 애초에, 자색에게 누가 와서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라고 물어본다면 들려줄 수 있는 답이 없다.

기껏해야 '그걸 왜 물어보세요?'라는 이야기밖에 못 한다. 오히려 그냥 알 수 있는 걸 물어보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게다가, 적색은 이후 마틴 레드우드에 의해 처리될 가능성이 높다. 굳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이어갈 이유는 없다. 결론을 내린 자색은 적색과의 연락을 끊고, 다른 잔을 손에 들었다.

― 지시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파이크 왕국의 적색과 내가 접촉했던 흔적을 지워. 뭘 해야 하는지 알려줄 테니, 그대로 실행하도록.”

잠깐 잔을 들고 몇 가지 지시를 내린 자색이 말을 마치자, 약간 걱정된다는 듯한 목소리가 잔을 통해 넘어왔다.

― 다만, 자색. 정말로 괜찮은 게 맞습니까? 아무래도 마틴 레드우드가 눈치챌 것 같은데요.

“걱정하지 말고, 시킨 일을 해. 벌써 몇 개월이나 지난 시점이잖아?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지. 게다가, 설사 눈치챈다고 해도 마틴 레드우드로서는 조치를 취할 수 없는 상황이야.”

잔을 들고 말하고 있는 자색의 입가에는 다소 삐뚤어진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연락은 여기까지 하겠다.

자색은 잔을 내려놓고 반지를 벗었다. 그리고 의자 아래에서 졸고 있던 하얀 강아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의 냄새를 맡던 강아지가 혀를 내밀어 그 손을 핥는다.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는 자색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엘렌 리버플로우는 조사에 착수하기 전에 왕도를 떠나게 했다. 첩보국은 기사단장에 대한 조사를 이어 갈 여유가 없을 정도로 바쁠 것이다.

“실망하겠지.”

마틴 레드우드가 왕도에 도착하면 자신의 예상과는 다른, 다소 짜증 나는 결과를 마주하게 될 테니까.

* * *

마침내, 끝나기는 하는 건지 알 수 없던 길고 긴 마차 여행이 그 끝을 고하고 있다.

“저기, 왕도가 보여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드디어 끝났다. 이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 갇혀서 죽여야 했던 시간들이 마침내 그 끝을 고하다니.

마차가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왕도의 하얀 성벽이 점점 커진다. 성벽 자체는 쿠르스트 산맥의 관문에 세워진 성벽보다 높이가 낮은 편이다.

“다행히, 시간에는 여유가 조금 있네요. 중간에 습격만 없었다면 더 빨리 도착했을 텐데.”

“신년 행사 전에 도착했으면 된 거지. 그래도 며칠 여유가 있잖아?”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다행이네요. 바로 첩보국장님이 마련해둔 숙소로 향하실 건가요?”

“그러자.”

내 대답을 들은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이고 마부에게 뭐라고 말을 전달했다. 잠시 뒤, 우리는 왕도로 들어가는 성문 앞에 멈춰 섰다.

성문 앞에 서서 검문을 받던 사람들이 옆으로 쭉 물러섰다. 합법적인 새치기라, 기분 참 묘하네.

“마틴 레드우드다.”

“왕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마차의 창을 열자, 내 얼굴과 마차의 문양을 확인한 병사가 별다른 검문 없이 경례와 함께 내 마차와 동행한 사람들을 통과시켰다.

우리는 알버트가 마련해 놓은 저택에 짐을 풀었다.

“나는 바로 만나 볼 사람들이 있단다.”

로델린은 그런 말을 남기고, 저택의 위치만 확인한 다음 다시 마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했다.

“마틴 레드우드. 잘 지냈나?”

“잘 지냈습니다. 굉장히 건강해 보이시는군요. 요즘 할 일이 없으신가 봅니다?”

내 말에 대번에 알버트가 얼굴을 구겼다.

“쓸데없는 소리, 지금도 억지로 시간을 낸 거야. 오래 머무를 수는 없을 것 같으니, 짐을 푸는 건 하인들에게 맡기고, 잠시 이야기 좀 나누지.”

“그러시죠.”

그 대화를 들은 클로에는 짐을 옮기는 하인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자, 따라오게.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만한 정원이 있거든.”

알버트의 안내에 따라 정원에 도착한 나는 주변을 살핀 다음 입을 열었다.

“조사는 어떻게 되어갑니까?”

“그게 말이야.”

저런 식으로 말을 시작한다는 건 별로 좋지 않은데. 설마하니 뭐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다는 건 아니겠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 너무 그렇게 꼴아보지 말라고.”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내 말에 알버트가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다음 지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왕궁에는 베로나 제국의 황녀가 머무르고 있다네.”

나는 그 말에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제국의 황녀가? 뭐하러 여기에 있는 겁니까?”

“신년 행사에 참석할 모양이야. 그 소식을 접한 첩보국이 얼마나 바빴는지 아나?”

원래 베로나 제국에서는 왕국의 신년 행사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사절단을 보내왔었다. 하지만, 사절단에 황녀가 동행하는 경우는 없었다.

“황녀가 직접 오다 보니 사절단 규모도 말도 안 되게 커져 버렸어.”

무슨 의도로 제국에서 황녀를 보내온 건지. 그리고 갑자기 커져 버린 사절단에 혹시 수상한 녀석이 섞여 있는 건 아닌지.

뭐 그런 것들을 갑자기 조사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서 첩보국의 인력이 해당 사절단의 조사에 집중되었던 모양이다.

“아직도 완전히 조사가 끝난 게 아니야. 폐하께서도 현재 진행 중인 일은 대부분 일시중단하고, 사절단에 관련된 조사에 집중하라 하셨어.”

“그것참.”

타이밍 한번 아름답군.

“그럼 말이라도 해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내 말에 알버트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베로나 제국 황녀의 신년 행사 참석 소식은 이틀 전에 공표되었네. 칠색 내각에 관련된 일도 아닌데 자네에게 몰래 먼저 귀띔을 해줄 수는 없지.”

그건 맞는 말이네. 나는 첩보국 소속이 아니니까.

물론 클로에는 첩보국 소속이긴 하지만, 당장 제국 사절단의 조사에 투입할 수 있는 인력이 아니니 당연히 그녀에게도 이 이야기는 비밀로 해두었겠지.

첩보국장 정도 되는 자리라면 모를까, 단순히 첩보국에서 일한다고, 거기에서 다루는 모든 정보를 다 공유받는 건 아니다.

“일단, 사정은 알겠습니다.”

별로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다. 엘렌은 난데없이 그린모스 늪지대로 파견되고, 뭔가를 해줄 거라고 기대했던 첩보부는 뜬금없이 밀어닥친 제국의 황녀 때문에 정신없이 바빴다니. 그래도 그 소식을 듣기 전까지 파악해 둔 정보는 있을 거다.

“왕국 기사단장들에 대해 여태까지 파악해둔 정보, 전부 건네주세요.”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내가 언제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하청 줘가면서 일했냐. 내 말에 알버트가 고개를 끄덕이고 작은 열쇠 하나를 건네주었다.

“저택 안에 이미 옮겨놓았네. 혹시 칠색 내각을 조사하는 과정에 더 필요한 정보가 있다면 말하게. 이미 파악해두었던 정보에 한해서는 제공해줄 테니.”

즉, 추가로 정보를 수집할 여유는 없다는 소리다. 첩보국의 상황이 지금 저렇다면, 문제가 하나 더 있는데.

“그럼 클로에의 신분 변경은……?”

내 말에 알버트가 작게 한숨을 쉬고 나를 바라봤다.

“거기에 신경 쓸 여유가 도저히 나오지 않더군. 이런저런 소문이 도는 건 어쩔 수 없지만. 클로에는 당분간 지금 신분을 유지해야 할 거야.”

일 참 잘 되어간다. 결국 내가 부탁한 것 중에 제대로 이루어진 건 하나도 없는 거네. 아무리 사정이 사정이라고 하지만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황녀 건만 해결되면 자네의 요청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지고 깔끔하게 정리해두겠네.”

알버트가 썩어있는 내 표정을 보더니 그렇게 확언을 돌려주었다.

“그때 가서도 다른 말을 하신다면…… 죄송하지만 제가 첩보국과 함께 뭘 해보겠다는 생각은 싹 포기할 겁니다.”

지금 첩보국의 사정이 급하다는 건 알겠다. 어쩌겠어, 조직도 조직 나름의 사정이라는 게 있는 건데. 한 번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간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베로나 제국의 황녀가 돌아간 다음에도 내가 요청한 것들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솔직히 내가 이 녀석이랑 같이 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확실하게 말해두었네. 황녀의 방문 건이 끝나고 나면 우선적으로 자네의 요청부터 처리하지.”

대답을 들었으니 이제 불신의 표정은 당분간 거두어 두자. 나는 약간 표정을 푼 다음 입을 열었다.

“엘렌 리버플로우는 그린모스 늪지대에서 언제 왕도로 옵니까?”

“아…… 얼핏 듣기로는 내일 오후 중으로 도착할 예정이라고 하더군.”

말을 마친 알버트는 호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 다음 나를 바라봤다.

“가야 합니까?”

“그래. 아, 그래도 클로에는 일단 계속 붙여놓을 생각이니까. 좋을 대로 활용하라고.”

말을 마친 알버트는 급하게 인사를 마치고 저택을 떠났다. 그 뒷모습을 보던 나는 작게 탄식했다.

“인생 씨벌것.”

내 손으로 직접 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니까. 일단 그래도 클로에는 여전히 내가 부려먹을 수 있는 인력이고, 엘렌이 내일 오후에는 왕도로 도착한다고 하니 그걸 위안으로 삼아야 하나.

약간 짜증이 나서 발로 정원의 땅을 한 번 콱 차버린 나는 저택으로 돌아갔다. 클로에는 아직도 하인들에게 지시를 내려 짐을 옮기는 중이었다.

“국장님과 대화는 나눠보셨어요?”

나는 그 말에 현재 첩보국이 처한 상황에 대해 말해주었다. 클로에가 멍하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자기 입술을 한 번 핥았다.

“첩보국에 불났네요.”

그래, 적절한 표현이네. 거기 불났다. 지금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는 모양이다.

“베로나 제국이라면 공식적으로 사절단과 함께 공물을 보내는 대국이니, 어쩔 수 없죠.”

권력의 역학관계에서, 나의 조국은 베로나 제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관계인 모양이다.

첩보국이 이 왕국 안에서는 왕을 제외하면 함부로 건들 사람이 없는 조직이라고 해도, 다른 나라까지 연관되면 그렇지 않게 되니까.

“어디 보자…….”

이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해야 할 일은 크게 세 가지다.

왕도의 기사단장을 조사해서 수상한 녀석을 특정지어야 한다.

신년 행사가 시작되면 왕과 독대해서 쿠르스트 산맥에 대한 식량 지원에 대한 대답을 받아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감사청에 내가 소속되고 싶어 한다는 의견을 타진해야 한다.

“바로 시작하자고.”

말을 마친 나는 박수를 한 번 짝치고 나서 저택으로 향했다. 세 가지 일 중 두 개는 어차피 신년 행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진행할 수 없는 일이다.

알버트가 기사단장들에 대한 정보를 저택으로 옮겨두었다고 했으니, 그것부터 살펴봐야겠다.

내 방에 쌓여있는 문서들을 확인한 나는 이야, 하는 소리를 내고 클로에를 바라봤다.

“커피 필요하세요?”

“그래.”

내 대답을 들은 클로에가 인사를 하고 잠시 문을 나섰다. 그 사이, 나는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이걸 머리에 다 구겨 넣는 것도 일이겠군그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