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화
큰 소리로 지시를 내린 엘렌이 시선을 돌려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가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엘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렌 리버플로우 양, 물론 저희가 왕궁 마법사의 도움을 요청하기는 했지만 유적 발굴 현장은 제가 지휘하고 있습니다.”
인부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건 자신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해두고 싶은 모양이다. 엘렌이 남자의 불만을 눈치채고는 깊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딴 게 중요한가?
“알고 있어요, 유적 조사 현장에 있는 인력의 지휘는 물론 당신이 담당하고 있죠.”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자신의 지휘권이 공고해졌다는 걸로 눈앞의 남자는 일단 만족한 모양이다.
“하지만 여기로 제가 파견된 이유는 유적의 조사에 있어 안전을 기하고, 최대한 온전하게 유적의 내부 물건을 확보하기 위함 아닌가요?”
“그 점은 맞습니다.”
“그렇다면, 부탁드리는데 지금과 같은 식의 유적 조사는 멈춰주셨으면 해요. 부탁드립니다.”
왕궁 마법사, 그중에서도 유망주로 인정받고 있는 엘렌이 입장을 굽히고 들어가자 현장 지휘관은 나름대로 만족한 모양인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일단 현재 작업을 진행 중이던 인력에게 지시를 내려 발굴을 멈추도록 하겠습니다.”
“요청을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적에는 충분한 조사가 필요하다. 엘렌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자신의 손을 살짝 움직였다. 그녀의 몸이 허공으로 살짝 떠오른다.
“조감도 형식으로 한번 확인해봐야겠어요. 잠시 기다려 주시겠어요?”
이곳의 책임자는 자신의 권위를 굉장히 중시한다. 모든 제안은 명령이 아니라 제안의 형식으로 시도해야 한다.
그냥, 누군가 자신의 허락을 구한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사람이다.
“네, 그러시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의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 엘렌은 하늘로 날아올라 거대한 유적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가 읽었던 남방 지역 역사의 지식과 유적 현장을 비교하던 엘렌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본 적 없는 구조야.”
그녀가 알고 있는 어떤 건축물과도 닮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닮은 구석이 존재한다.
“마치, 다른 남방의 건축 양식이 여기에서 비롯되었거나.”
아니면 그 모든 건축 양식을 받아들여 새롭게 소화하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다.
유적의 중앙에 자리 잡은 거대한 공터를 확인한 엘렌이 다시 하늘에서 내려왔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건 무덤 같은데요. 규모를 보면 아마 왕릉이 아닐까 싶네요.”
엘렌의 말에 현장 지휘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렇다면 대박 아닙니까? 마법사님은 어떤 나라의 유적 같습니까?”
“그게 문제에요. 확실하게 이 나라다, 싶을 정도로 딱 맞아떨어지지 않아요.”
엘렌이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었고, 현장 지휘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어쩌면 그린모스 늪지대가 지금 같지 않을 때 자리 잡고 있던 왕가의 유적일 수도 있겠습니다.”
무려 4000년 전이다. 당시 그린모스 늪지대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휘관의 추측은 물론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이 꽤 높은 추측이다.
“요청에 따라오기는 했지만, 이건 저 혼자서 판단을 내리기는 힘들어요. 다른 분들의 의견도 필요할 것 같아요.”
말을 마친 엘렌이 잠깐 해를 바라보고 나서 다시 현장 지휘관에게 말을 걸었다.
“일단, 저는 신년 행사 때문에 왕도로 돌아가야 하니. 돌아오는 길에 유적을 조사할 마법사를 추가로 요청해서 함께 올게요.”
“그럼 그전까지는…….”
엘렌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유적의 발굴은 멈춰주셨으면 해요. 가능하신가요?”
“어쩔 수 없죠.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엘렌이 지휘관의 말에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린모스 늪지대 외곽에서 유물을 발견하는 경우는 제법 되지만, 이 유적은 정말 굉장해요. 미리 축하드려요.”
지금 유적을 파는 건 너무 위험하다. 엘렌이 자리를 비운 사이 지휘관이 또 멋대로 유적을 파낼지도 모른다.
물론, 그 가능성이 그렇게 높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약을 쳐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엘렌의 말을 들은 지휘관의 입이 귀에 걸렸다.
“마법사님의 눈에도 그리 보이신다니 기쁘군요.”
“물론 마법사들이 본격적으로 조사에 착수해야 그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있겠지만…… 일단 제 판단부터 말씀드릴게요. 이 정도 유적의 발견은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일이에요.”
말을 마친 엘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현장 지휘관을 본다.
“다만…… 아시죠? 8년 전 테네스 공국의 네필론 제단 파괴 사고.”
폭우가 내리는 와중, 제대로 된 조사 없이 함부로 고대 제단을 들쑤시다가 귀중한 유물의 상당수를 손실하거나 파괴한 사건이다. 엘렌의 말에 지휘관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다마다요. 멍청한 공국 놈들 같으니라고.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암요! 역사적 발견 아닙니까. 으하하핫!”
웃음을 터뜨리는 현장 지휘관의 모습을 확인한 엘렌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까지 약을 뿌려놓았으면 섣부르게 땅을 파는 짓은 하지 않겠지.
“신년 행사가 끝나고, 다시 뵙겠습니다.”
“네, 이후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화를 마친 엘렌은 바로 왕도로 향할 준비를 서둘렀다.
* * *
알버트가 마련해준 저택 안에서, 첩보국이 파악한 기사단장들의 정보를 들쑤시고 있던 나는 마침내 내가 머무르는 곳에 엘렌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제야 오는군.”
그럼 하루가 지났다는 소리네. 나는 충혈된 눈가를 손으로 비비며 커피를 쭉 들이켰다. 잠시 뒤, 엘렌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나와 클로에를 한 번 살펴본 다음 입을 열었다.
“넘치는 학구열을 참을 수 없었던 거야?”
나는 그녀의 말에 텅 빈 커피잔을 몇 번 흔들고는 대답했다.
“오랜만이군. 정글이 몸에 잘 받나 봐.”
신수가 훤하네. 누구는 서류에 파묻혀서 죽어가고 있었는데.
“덥고, 습하고, 벌레가 꼬이지. 정글이 몸에 잘 받기는 개뿔.”
말을 마친 엘렌이 클로에를 다시 바라봤다. 곧바로 클로에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분은?”
“내 시종.”
내 말에 엘렌이 흠, 하는 소리를 낸 다음 낮은 목소리로 나를 향해 한마디 했다.
“선발 기준이 다소 의심되는데.”
나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공정하지 못한 심사를 통해 선별한 인원이지. 첩보국 소속이야.”
내 말에 엘렌이 놀란 표정을 지은 채 클로에를 바라봤다.
“첩보국? 예상하지 못한 조직이 튀어나왔잖아.”
엘렌의 말에 클로에가 웃으며 대답했다.
“클로에라고 합니다.”
엘렌이 클로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내밀었다.
“엘렌 리버플로우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서로 통성명을 끝낸 엘렌이 주변의 서류 중 하나를 확인하고는 나를 바라봤다.
“이 정보, 출저가 첩보국인거야?”
“그래, 네가 정글에 놀러 간 동안 슬프게도 나는 놀고 있지 않았거든.”
내 말에 엘렌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놀러 가? 망할, 대가리를 진흙 속에 박아 버릴까 보다.”
별로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계속 서류를 살펴보며 말했다.
“신년 행사가 있기 전에 왕도에 머무르는 기사단장들과 따로 자리를 한번 마련해서 만나 볼 생각이야.”
내 말에 엘렌이 아하,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네가 왕국 기사단장과 닿아있는 인맥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나는 없지. 하지만 내 어머니는 연락을 주고받을 만한 사람이 있는 모양이시더라.”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드우드 부인께서? 그럼, 부인도 여기 머무르고 계신 모양이네.”
“그래. 시간 나면 인사라도 한번 드려.”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사하고 있어 봐. 부인께 인사부터 드리고 올게.”
“인사를 드리는 게 예의이긴 한데. 지금은 조사를 돕는 편이 어떨까.”
내 말에 엘렌이 대답했다.
“레드우드 부인께서 인맥을 이용해 자리를 만들어 주신다는 건 이해했어. 거기에 내가 도움을 조금 더 드린다면 일이 더 수월해질 텐데.”
아하, 그럼 이야기가 달라지지. 말을 마친 엘렌이 근처에 쌓인 서류 더미에 손을 척 올려놓고 웃었다.
“서류를 읽는 건 꼭 나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동의. 올 때 뭐 먹을 것도 좀 챙겨와. 아, 그리고 이 방에 매번 문 걸어 잠그는 것도 좀 귀찮은데.”
내 말에 엘렌이 쯔, 하고 혀를 찼다.
“마법 걸어놓으라고?”
“그럼 방금 대화 이후에 내가 뭘 부탁할까, 옷 벗고 춤이라도 추라고 할 것 같았나 보지?”
내 대답을 들은 엘렌의 양손에 박힌 보석이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쏟아져 나온 빛줄기가 방을 스캔하듯이 쭉 훑었다.
“끝. 그럼 다녀올게.”
“올 때, 뭐 먹을 것도 좀 챙겨와 주면 고맙겠는데.”
최소한 오늘은 밥을 먹은 기억이 없다. 내 말에 엘렌이 좋아, 라고 말한 다음 문을 나섰다.
“두 분은 제법 친하신 모양이네요?”
“그럴 리가.”
만나서 시간을 보낸 기억이 길지는 않다. 한 일이라고는 쿠르스트 산맥에서 함께 헤로스라는 악마를 때려잡은 거 말고는 없으니까.
“그런 것 치고는 서로 대화가 상당히 거침없네요.”
“지금은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도, 앞으로는 그래야 할 필요가 있거든.”
함께 칠색 내각을 때려잡기로 합의를 끝냈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거나, 협조할 일이 많은데 굳이 안 친하다고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 필요는 없다.
엘렌도 마찬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그런 거 궁금해하지 말고, 서류에 집중해. 오늘 중으로 다 읽어야 하니까.”
“으. 지치지도 않으세요?”
나는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이걸로 지쳐? 첩보국에서 사람을 약하게 키웠네.”
“관련 업무에 대한 교육은 받았지만, 원래 하던 일은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시겠지. 다들 그런 핑계 하나씩은 주머니에 차고 다니다가 필요할 때 꺼내서 쓴다니까.
“불평하면 읽을 서류가 줄어들지?”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클로에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다시 서류에 코를 박았다.
얼마 뒤, 마침내 쌓여있던 서류의 확인을 마친 나는 벽에 붙여놓은 종이 위에 각 기사단장들의 일정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전부 파악되지는 않았네.”
“첩보국은 신이 아니니까요.”
그래. 노력한다고 해도 알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다. 첩보국에서 조사하지 못한 일정표의 빈칸에는 물음표를 채워 넣는다.
그리고, 일정이 있었다고 해도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면, 그 일정에는 체크를 해둔다.
“이 친구는 왜 매일같이 밤에 자리를 비우는 거지?”
내 말에 클로에가 벽에 붙은 일정표를 훑어본 다음 대답했다.
“큰울림 기사단장 미로스 제커빌 말씀하시는 거죠? 퍼시발 스트리트에 위치한 카페에 간 거잖아요.”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밤에 카페를 간다고?”
밤에 차를 안 마시면 잠을 못 자는 기괴한 체질인 모양이지? 내 말에 클로에가 잠깐 나를 살펴보고는 대답했다.
“네, 왜 그런 표정이세요?”
“이상하잖아. 안 그래? 밤에 카페에 가서 뭘 하겠어.”
클로에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표정을 고쳤다.
“하긴, 마틴 님은 왕도의 밤문화는 잘 모르시겠네요.”
그리고 클로에의 설명이 다 끝난 다음 나는 애매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이해했어.”
술 대신 차와 다과가 나오는 그렇고 그런 장소인 모양이다. 당연히, 목적이 차와 다과는 아닐 거다.
“카페라.”
“어머, 관심 있으세요?”
얼씨구, 여자 끼고 차 마시는 거에 관심이 있었다면 이미 댁이 몹쓸 짓을 당했을 거란 생각은 안 하나?
“관심이 있는 건 카페의 환경이야.”
그런 장소의 장점 중 하나가 바로 여자가 나가면, 방 안에는 아무도 없다는 점이다.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을 테니 함부로 방 안에 들어가지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