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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74화 (74/275)

074화

모리스가 사라진 사이, 이쪽으로 하녀가 걸어와 조심스럽게 쟁반을 올린다.

“레드우드 님, 여기 땀을 닦을 수건을 가져왔습니다.”

“고맙다.”

하녀가 건네준 젖은 수건으로 땀을 닦고 있으려니 클로에가 다가와 입을 연다.

“어땠어요?”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클로에의 질문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것참, 영감님 힘 한번 장사네.”

노익장이라는 단어가 세상에 괜히 있는 게 아니구나.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제가 물어본 건 그게 아니에요.”

나도 알아 인마.

“이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꽤 높은 사람이더군.”

방금 연주된 노래가 뭔지는 나도 알고는 있다. 석양가. 국왕이 공식적으로 오늘 일과를 마치고 휴식에 들어갈 때 연주되는 가락이다.

왕도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저 노래가 울려 퍼지는 것을 기준으로 일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간다. 일종의 공식 퇴근송 같은 거다.

“왕궁 안에 머무르는 것도 아닌데, 저 노래를 듣고 부동자세를 취하는 사람은 거의 없죠. 어쩌면, 마틴 님에게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게 아닐까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나에게 수건을 건네주려고 다가오던 하녀도 저 가락이 울리자마자 재빨리 수건을 담은 쟁반을 내려놓고 부동자세를 취했어.”

제대로 교육이 되어있다는 거다. 그렇게 민첩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생각해봤을 때, 왕궁에서 저 노래가 연주되고 있는데 움직였던 하인들은 모두 불호령을 맞았던 것이 분명하다.

“덤으로 상당히 검소한 편이야. 이 날씨에 응접실에 벽난로가 꺼져 있었고, 신고 있는 신발은 몇 번이나 수선했어. 문제는 이 저택은 검소함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는 점인데…….”

내 말에 클로에가 슥 저택을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저택은 폐하께서 하사하셨어요. 모리스 핀들턴 경은 세 번이나 거절했다고 들었어요.”

아하, 그런 미담이 또 숨어있었군.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응접실의 벽난로는 차갑게 식어있었지만,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들은 장작불을 쬐고 있었지.”

클로에가 내 말을 혼자 종합해보나 싶더니 입을 열었다.

“왕국에 충성스럽고, 검소한데 아랫사람들을 배려한다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가 찾는 사람 같지는 않네요.”

그래 보이긴 한다. 검소하다는 건 돈으로 매수하기는 힘든 사람이라는 뜻이다. 왕국에 충성스럽다는 건 수상한 조직이 접촉하더라도 대가리를 박살 내면 박살 내지 협조하지는 않는다는 뜻이지.

모리스를 계속 의심하는 건 적절하지 못한 행위인 것 같다. 물론, 다른 기사단장을 전부 조사해 본 다음 별다른 수상한 점을 찾지 못했다면 모리스도 다시 용의 선상에 올라갈 수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지. 아직 우리가 의심을 거두지 않은 기사단장이 세 명이나 더 있으니까.

“재수가 좋으면 여기에서 엔더슨 하이빌 기사단장도 만나고 갈 수 있겠네요.”

“사실 그걸 기대 중이야.”

모리스를 만나보고 돌아올 계획이었는데 지금 이 저택 안에는 엔더슨도 같이 있다. 그렇다면 만나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나가는 하녀를 향해 뭔가를 가져와 달라고 말했다. 잠시 뒤, 하녀가 나에게 목제 브레이슬릿을 건네주었다. 나는 그걸 손목에 찼다.

“마틴 레드우드 님.”

그 사이 하인이 내 쪽으로 다가와 인사를 하고는 입을 열었다.

“핀들턴 경이 찾으십니다. 괜찮으시다면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나는 그 말에 살짝 눈썹을 꿈틀했다. 이건 내 예상보다 좀 빠른데. 내가 클로에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지는 10분도 지나지 않았다. 근데 벌써 부른다고?

“아무래도 엔더슨 하이빌이 여기에 온 이유는 나와 관련이 있는 모양인데.”

“설마요, 마틴 님이 왕도로 온 지는 얼마 지나지도 않았을 텐데.”

가보면 알 일이다. 나는 하인의 안내를 따라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왔나. 자리에 앉게.”

모리스의 표정이 그렇게 편하지는 않다. 마찬가지로 그 맞은편에 앉아있는 남자도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황녀 측에서는 어르신 아니면 이 친구를 요청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자리에 앉으면서 엔더슨을 바라봤다.

“처음 뵙겠습니다 엔더슨 하이빌 경.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만, 혹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신지 여쭈어봐도 괜찮겠습니까?”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틴 레드우드. 나도 만나보게 되어서 좋군. 지금 나누고 있는 이야기는 제국에서 온 황녀의 호위에 대한 이야기라네.”

황녀의 호위? 그걸 도대체 왜 이 나라 사람에게 시키려고 하는 건데. 미국 대통령이 북한 가서 자기 호위로 북한 간부 쓰는 것만큼이나 미친 짓이잖아.

“제국에서 호위에 충분한 병력을 보냈을 텐데요.”

내 말에 엔더슨이 고개를 끄덕이고 한탄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종의 자기 위세 같은 거야. 파이크 왕국은 베로나 제국의 아래에 있다는 걸 명확하게 해두기 위한 요청이지. 원래 황녀 측에서 요청한 건 왕도의 기사단장 중 하나였네.”

모리스가 엔더슨의 말이 끝나자마자 쾅 하고 테이블을 내려쳤다.

“개쌍놈의 새끼들. 우리는 왕국을 위해 봉사하고 죽기 위해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다! 외국의 계집년 따위 곁에 쫄래쫄래 개새끼처럼 붙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는 그 말에 혀를 한 번 찼다. 대충 알 것 같다. 사실상 황녀 측은 호위라기보다는 데리고 다니면서 과시하며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거다.

파이크 왕국의 무력의 상징이라 존경받는 기사단장도, 결국 베로나 제국이 마음먹는다면 호위로 부려먹을 수 있다! 같은 거.

내 말에 모리스가 끄응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사실, 황녀 측에서도 정말로 왕국의 기사단장을 호위로 부려먹을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야.”

파이크 왕국 측에서 반발하자 한발 양보하며 대신 적절한 자격을 가진 자를 한 명 붙여달라고 했던 모양이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저 같은 게 뭐라고.”

내 말에 모리스가 팔걸이에 손을 올려놓고 나를 바라봤다.

“스스로를 과소평가하지는 말게. 자네는 쿠르스트 산맥의 전승 기념식에서 따로 폐하의 친서까지 받았어. 게다가, 신년 행사에서 자네에게 하사할 훈장과 부장의 제작이 상황이고.”

“훈장 말씀이십니까?”

내 말에 엔더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2급 무공훈장이야. 원래는 비밀로 해두고, 신년 행사 때 폐하께서 훈장을 하사한다면 그 이후 사람들이 축하 인사와 선물을 보내는 게 관례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말해줘야겠지.”

뭐, 일종의 깜짝파티 같은 건가? 생각해보면 쿠르스트 산맥에서 뭐 큰 공을 세웠다느니 어쨌다느니 떠들던 것과는 다르게 의외로 왕도 사람들의 반응이 싱겁긴 했다. 여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쉽게 말해서, 현직 기사단장을 갈음해서 신년 행사에서 훈장을 받을 예정인 저를 넘겨주겠다는 뜻이군요.”

내 말에 모리스가 푸후,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그걸 누가 직접 입으로 말해주니 더 열이 받는군.”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픽 웃은 다음 입을 열었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 베로나 제국 황녀의 호위라. 까짓거, 하겠습니다.”

내 말에 두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 확 쏠렸다.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자네가 하겠다고 말하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조국의 입장은 여전히 난처해.”

“신년 행사에 예정된 훈장 수여 때문 아닙니까?”

내 말에 두 사람이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 전까지 외국 황녀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훈장을 받는 건 국가 위신을 깎는 행위다.

“그럼, 신년 행사에서 제가 훈장을 받지 않으면 되는 일입니다.”

그럼 모든 게 해결된다. 황녀의 요청에도 응할 수 있고, 국가의 위신도 상하지 않는다. 내 말에 두 사람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자네가 세운 공은 분명해. 그리고, 2급 무공훈장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명예가 아니야.”

“제 개인의 명예를 높이자고 조국의 위신을 깎을 수야 있습니까.”

그딴 금속 쪼가리 받는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나는 이 자리에서 깔끔하게 훈장을 포기하면서 얻게 되는 이득이 훈장보다 더 유용하다고 판단했다.

모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눈을 마주친다.

“……자네의 말은 잊지 않고 기억해두겠네.”

자기 저택에 머무르고 있으면서도 왕궁에서 석양가가 흘러나오면 꼬박꼬박 하던 일을 멈추고 부동자세를 취할 정도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사람이다.

방금 내가 뱉은 말과 행동으로 왕실 기사단장 모리스는 나를 높게 평가할 것이다. 거기에 더해, 결국 훈장 수여는 국왕이 직접 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훈장 수여를 거절했다는 게 국왕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 없다. 당연히, 내가 훈장 수여를 포기한 이유를 국왕이 모를 수는 없지.

어떻게 보면 이 나라가 나에게 빚을 한 번 지게 되는 거다.

“그럼…… 일단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그 뒤로, 우리는 자리에 앉아 30분 정도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엔더슨이 자리에서 일어나 모리스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저 친구가 돌아갔으니…….

“다만, 꼭 신년 행사 자리가 아니라 해도 국왕 폐하와의 독대는 꼭 한번 하고 싶습니다.”

내 말에 모리스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나를 바라봤다.

“이유가?”

“쿠르스트 산맥 국경수비대와 한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대답을 들은 모리스가 후우, 하고 심호흡을 한 다음 나를 바라봤다.

“알았네. 내가 폐하께 간청드려보지.”

양심이 있다면, 국왕이 이 요청을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혹여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기탄없이 말하게. 왕실 기사단에 들어오고 싶다면 내 특별히 시험조차 치르지 않고 합격시켜주지.”

“그건 몇 년이나 노력한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내 말에 모리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하긴, 굳이 내가 합격시켜주지 않는다고 해도 자네 정도라면 왕실 기사단에 소속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게야.”

말을 마친 그는 내 등을 한 번 두들겨 주고, 다시 알버트가 마련해준 저택으로 돌아가는 나를 배웅했다.

마차에 오르자마자, 클로에가 물병의 뚜껑을 열며 말했다.

“무슨 이야기 나누셨어요?”

이 정도는 말해줘도 괜찮겠지. 어차피 알버트도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이야기니까.

“신년 행사 때 훈장을 받을 예정이었는데, 포기했다.”

내 말에 마차 안에서 물을 마시던 클로에가 푸하학, 하는 소리와 함께 물을 뿜고는 나를 바라봤다. 나는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의 감촉을 느끼며 얼굴을 구겼다.

“이런 씨…….”

뭐라고 내가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클로에가 급하게 손수건을 꺼내 내 얼굴을 닦아주며 입을 열었다.

“시종이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미치셨어요?”

나는 손수건으로 얼굴에 흘러내리는 물을 훔치고 대답했다.

“일이 조금 꼬였어. 그런 것보다…….”

“그런 것보다라니! 훈장이잖아요! 훈장을 받게 되실 줄은 몰랐는데, 심지어 훈장을 수여받을 권리를 포기했다고요?”

나는 그 말에 여전히 인상을 쓴 채로 클로에를 바라봤다.

“그게 주는 이득을 말해봐.”

내 말에 클로에가 곧바로 기관총처럼 말을 쏟아놓기 시작한다.

“여행 중에 어떤 영주성이라고 해도 머무르기를 청하면 공짜로 묵을 수 있어요. 세금도 안 내고, 매해 추수철마다 품위 유지비를 지급해주죠. 국가의 주요 행사가 있을 때마다 언제나 특별히 자리를 마련해두고…… 추후 돌아가시게 된다면 왕궁의 메모리얼 홀에 시신을 안치해요.”

그 뒤로도 줄줄줄 쏟아지는 수십 가지 특혜들.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별거 없네.”

물론 엄청난 의미가 있다는 건 대충 알겠다. 애초에 내가 훈장을 포기한다고 했을 때도 정말 그 금속 쪼가리 하나만 포기하는 게 아닐 거라고 짐작했었으니까.

“무슨 훈장이었어요?”

“2급 무공훈장이라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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