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75화 (75/275)

075화

내 말에 클로에의 안색이 파랗게 변했다.

“기사 중에는 그 훈장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 자기 마누라를 죽이려 드는 사람도 있을걸요.”

“나는 기사가 아니잖아.”

“그렇지만 귀족이시잖아요. 훈장을 받으셨다면 온갖 가문에서 자기 딸을 어떻게든 시집보내려고 줄을 섰을 거예요.”

나는 그 말에 우와, 하는 소리를 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안 받기를 더 잘한 것 같다.”

“…….”

클로에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자기 뺨을 한 대 때리고는 심호흡을 한다.

“그래서, 엔더슨 기사단장은 어땠어요?”

“이제 내가 좀 나누고 싶은 대화 주제를 들고 오네.”

그렇게 대꾸한 나는 손바닥을 몇 번 비비고 대답했다.

“지금까지 만난 세 명 중에 제일 수상해.”

내 말에 클로에가 진지한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봤다.

“그렇군요.”

그리고 클로에가 침묵한다. 나는 약간 이상해서 그녀를 바라봤다.

“그게 끝이야?”

“마틴 님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면 그게 맞겠죠.”

갑자기 그런 신뢰를 받으려니 부담된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클로에가 잠깐 내 얼굴을 살피다가 대답했다.

“퍼시발 스트리트에서 미로스 기사단장을 특정 짓는 걸 보고 더 이상 의심하지 않기로 했어요. 물론, 그래도 말씀해주신다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엔더슨은 새벽에 기도를 마치고 바로 기사단 막사로 출근해서 업무를 보지?”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새벽 기도할 때 입고 있던 옷을 갈아입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리고, 기사단의 기사들은 전시나 훈련 중이 아니라면 반드시 정해진 복장을 입게 되어있다.

“일리온 교단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게 정석이야.”

새벽에 한 번, 심야에 한 번. 매일 같이 두 번의 기도를 반복한다면 무릎의 천이 닳아있어야 한다.

“정복은 주기적으로 수선하지 않을까요?”

나는 그 말에 히죽 웃으면서 내 손목을 들어 올려 클로에의 눈앞에 가져갔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이거 보여?”

내 말에 클로에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내 손목을 확인했다. 엔더슨을 만나기 전, 하녀를 시켜 가져오도록 시킨 목제 브레이슬릿이다.

손목을 확인한 클로에가 입을 열었다.

“일리온 교단의 신자들이 기도할 때 사용하는 성물이네요. 그건 또 언제…….”

클로에가 말을 이어가다가 뭔가에 생각이 미쳤는지 입을 다물었다. 나는 히죽 웃었다.

“엔더슨은 내가 이걸 끼고 있는데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더군.”

예를 들어보자. 가톨릭이 아닌 사람은 다른 사람이 손목에 묵주를 걸고 있어도 별로 관심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누군가의 손목에 묵주가 걸려있는 모습을 본다면, 무슨 반응을 보이는 게 정상일까?

당연히 '아, 혹시 당신도?' 같은 반응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믿는 종교를 믿어보라고 강권하는 건 비매너일 수 있겠지만. 이건 그게 아니잖아.

가톨릭에 한정된 반응이 아니라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이는 반응이다. 하지만 엔더슨은 아니었지. 관심도 없었다.

“그 자식이 기도실을 이용하는 이유가 절대로 일리온 교단의 교리에 심취해서가 아니라는 반증이지.”

물론 엔더슨이 가져온 소식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당장 내 손목에 감겨있는 브레이슬릿을 보고도 반응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 뒤로도 엔더슨은 30분 동안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고, 그냥 시시콜콜한 잡담이었다.

즉, 내 손목의 브레이슬릿을 확인하고 뭔가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

“문제는 기도실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이네요.”

“무슨 소리야.”

누구 맘대로 기도실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확정 짓고 있어?

“알버트한테 돈 좀 달라고 요청해. 넉넉하게 2000론도 정도.”

알버트는 황녀의 방문 때문에 바쁘다지만, 지갑에서 돈 정도는 뽑아서 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클로에가 내가 발견한 것에 대해 알버트에게 보고하며 요청한다면 그 녀석 주머니에서 돈이 안 나오면 이상하다.

“기도실에서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는 데 성공하면…… 그때부터는 불법의 영역으로 넘어가야겠지.”

그다음에는 당연히 엔더슨의 집무실과 저택 같은 곳을 뒤져야 한다.

“시간이 없다는 점이 문제네요.”

“그래.”

졸지에 이웃 나라 황녀의 호위를 맡게 되었으니, 해가 떠 있을 동안에는 꼼짝없이 그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여자와 동행해야 한다. 엔더슨에 대한 조사는 밤에 이루어지겠지.

“제국 황녀의 호위를 수행하실 때는, 별로 좋은 대접을 받지는 못하실 거예요.”

아하, 간만에 익숙한 대접 한번 받겠네. 나는 그 말에 픽 웃었다.

“그럼 제국씩이나 되는 곳에서 태어날 때부터 황녀였던 여자가 옆에 졸개로 따라붙은 왕국의 귀족 나부랭이에게 무슨 대접을 해주겠어? 바라지도 않아.”

심지어 내가 그 여자의 호위로 들어가는 이유 자체가 제국에서 왕국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이다. 장담하는데, 절대로 보석 같은 취급은 못 받을 거다.

저택에 도착한 나는 그 길로 로델린에게 향했다.

“그래, 만남은 어땠니?”

“좋게 끝났어요. 정말 큰 도움을 받았어요. 감사합니다.”

내 말에 로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다른 만남도 금방…….”

그래,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왔다.

“죄송해요, 아무래도 이 이후로는 제가 요청하긴 했지만 다른 기사단장님들을 뵙는 건…… 당분간 힘들 것 같아요.”

제국 황녀의 호위로 붙어있게 되었고, 밤에는 엔더슨을 조사해야 한다.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는다. 내 이야기를 다들은 로델린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제국의 황녀라. 그렇구나.”

말을 마친 로델린이 잠깐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잘 견뎌낼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로델린도 이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베로나 제국 쪽 사람들이 아무리 귀찮게 굴어도 하이랜더만 하겠어요.”

내 말에 로델린이 억지로나마 희미하게 웃음을 보였다.

“그래, 말을 들어보니 또 그렇긴 하구나. 아, 그럼 엘렌 양에게도 말을 전해두어야겠다.”

“네, 제가 전할게요.”

로델린은 몰라도, 엘렌이라면 엔더슨에 대한 내용은 공유해야 하니까.

“그래, 알겠다. 아직 식사를 하지 않은 모양인데 함께 하자꾸나.”

“그러죠.”

로델린과 함께 식사를 마친 나는 바로 첩보국의 서류가 쌓여있는 내 방으로 향했다.

“오셨어요?”

“엘렌에게 편지를 보내줬으면 하는데. 첩보국 사람을 이용해서 전달해줘.”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이고 종이를 꺼내 들었다.

“엔더슨에 대한 내용이죠?”

“아니 연애편지 보내려고 하는데.”

빈정거림을 담은 내 대꾸를 들은 클로에가 놀란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본다. 나는 뚱한 표정으로 클로에를 보다가 말했다.

“내가 첩보국 도움까지 받아가며 전달하려는 편지잖아. 당연히 엔더슨에 대한 이야기지.”

“아.”

그리고 클로에는 놀란 표정을 지우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다 썼으면 오늘은 쉬자.”

내 말에 클로에가 야호, 하는 소리를 싱겁게 냈다.

“얼마 만에 이렇게 일찍 쉬는 건지. 근면성실은 상사의 악덕이에요.”

“게으른 부하 입장에서는 그렇겠지.”

대화를 나누던 와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마틴 레드우드 님 앞으로 온 편지입니다.”

나는 하인이 건네준 편지를 확인하고 허어, 하는 소리를 냈다.

“빠르기도 하지.”

“베로나 제국 황녀인가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 졸개가 보낸 거야. 내일 오전 8시까지 왕궁의 귀빈궁으로 오라는데.”

나는 편지를 구겨서 휙 던지며 말했다.

“아침 8시에 오라니. 근면성실은 상사의 악덕인데 말이야.”

“…….”

클로에가 황당한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봤다.

“왜? 난 게으른 부하야. 물론 네 입장에서는 게으른 상사겠지. 세상에, 게으른 상사를 만나는 데 성공하다니. 너는 참 복도 많다.”

클로에는 대답을 돌려주는 대신 편지를 봉투에 집어넣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어두워진 방 안에서 침대에 누워 마력을 모으던 나는 마음먹은 시간만큼 마력을 모으고 난 다음 눈을 감고 잠들었다.

다시 눈을 뜨자 새벽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밥 먹고, 씻고, 옷 갈아입은 다음 바로 왕국으로 향했다.

“아, 마틴 레드우드 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왕궁 앞을 지키는 병사들이 내 신원을 확인하고 들여보낸다. 귀빈궁이라. 당연히 실제 용도는 베로나 제국에서 누군가 왔을 때 머무를 곳을 제공하는 것이겠지.

“누구지?”

“마틴 레드우드.”

귀빈궁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은 딱 봐도 왕국의 양식이 아닌 갑옷을 입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곧바로 창을 X자로 겹치며 길을 막고 내 신분을 물어본다.

“그렇군. 기다려라.”

말을 마친 그들은 나를 세워놓고 사람을 하나 보냈다. 그리고는 30분이 지나도록 별다른 지시가 없다. 아, 이대로 한 번 지칠 때까지 기다려보라는 건가.

문제없지. 내가 잘하는 것들이 꽤 많은데, 그중 하나가 바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시간 죽이는 일이니까. 나는 별다른 움직임 없이 문 앞에 서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1시간,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다. 2시간이 지났다.

“저기, 손 떨리는 것 같은데 괜찮냐?”

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여전히 창을 겹쳐 X 모양을 만들어 놓은 상황이다. 병사들은 내 말에 전혀 대답해주지 않는다. 나도 사실 대답해줄 거라고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다.

“아따, 날 한번 춥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물통을 꺼내 물을 들이켰다.

대충 세 시간 정도가 지날 때가 되어서야 귀빈궁 너머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마틴 레드우드, 들어오시지요.”

마침내 귀빈궁의 문이 열리고,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으로 안내해준 곳에는 여자가 한 명 앉아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하얀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는군요. 올리비에 황녀 저하의 시녀 레티시아 들롱이에요.”

“마틴 레드우드입니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녀를 보고 굉장히 놀랐다. 백금발, 길이는 50cm 정도. 끝에 살짝 웨이브가 져 있다. 머리카락 끝의 웨이브는 자연적으로 생긴 게 아니다. 원래는 직모인데 고데기로 멋을 낸 거다.

시선이 아래로 향한다. 발 크기는 235mm. 악수를 했던 손끝에는 희미하게 붓꽃 냄새가 남아있다.

이야, 레티시아 들롱이라고 했나. 혹시 우리 구면 아니야? 로티샤 호수에서 서로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것 같은데.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닙니다. 꽤 재미있었습니다.”

나는 웃음을 띤 채 그런 대답을 돌려주었다.

일단, 지금 당장 내가 이 여자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제국에서 황녀를 보필하는 시녀라고 하면 최소한 백작 이상급의 귀족가 영애라는 소리니까.

여기에서 내가 갑자기 달려들어 이 아가씨의 멱을 따버리면 나는 그 길로 교수형 특등석이 예약될 것이다.

발 크기와 머리카락 길이와 색깔, 그리고 특징이 일치한다. 거기에 더해 사용한 화장품의 냄새까지 일치한다. 이 여자가 로티샤 호수에서 붉은 가지를 탐냈던 그 마법사가 아닐 확률은 거의 없어 보인다.

문제는 지금 손에 끼고 있는 장갑인데. 손등에 연결점을 박아넣었는지, 아니면 그냥 멋을 내려고 장갑을 낀 건지를 잘 모르겠다. 거기까지 확인한다면 확실해지긴 할 테지만…….

나는 장갑 안의 맨살을 보려는 생각은 뒤로 미뤄두었다. 어차피 신년 행사 전까지 시간은 3일 정도 남았으니까. 급할 필요 없지.

“다과가 굉장히 맛있습니다.”

“그렇죠? 제국에서 특별히 공수해 온 물건이랍니다.”

나는 입에 과자를 하나 던져넣고 갈아버리듯이 이빨로 뭉개면서 레티시아를 향해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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