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화
알버트에게 있어서 레티시아의 존재는 외국의 일이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저 외국의 일이라고 치부하고 잊어버릴 수 없는 사안이다.
그렇지만…….
“알겠습니다. 일단 엔더슨 하이빌의 조사에 집중하지요.”
나는 일단 알버트에게는 이런 대답을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나라도 나서서 레티시아를 어떻게든 하겠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건 의미 없다.
알버트는 그 일을 도와주지 않을 거다. 아니, 오히려 방해하겠지. 그러다가 잘못되면 왕국에 큰 손해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주게. 아, 그리고 지원을 요청했던 자금은 이미 자네 명의로 엔더슨이 다니는 교회에 헌금했어. 기도실 이용에 문제는 없을걸세.”
말을 마친 알버트는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다. 불어닥친 찬바람을 맞고 있던 나는 눈가를 꾹꾹 눌렀다.
“그래도 일단은 알버트의 생각이 틀린 건 아니지.”
나와 레티시아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는 지금 당장은 가까울지 몰라도, 실제 거리는 제국의 수도와 왕국의 수도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멀다. 신년 행사가 끝나고 나면 그녀는 돌아갈 것이다.
칠색 내각에서 내 시체를 보고 싶다면, 그 일을 주도적으로 진행하게 될 것은 왕국의 기사단장 사이에 숨어있는 적색이다.
따라서, 일단은 엔더슨에 대한 조사가 우선이다. 열린 창문을 바라보던 나는 저택을 나설 준비를 했다.
“외출하시나요? 따라붙을까요.”
알버트가 돌아가고 나서 다시 내 방으로 돌아온 클로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교회로 가시는 거죠? 엔더슨 경도 아마 지금쯤 교회로 출발했을 거예요.”
나는 클로에의 말을 듣고는 한숨을 쉬었다.
“거길 뭐하러 가겠어.”
내 말에 클로에가 음?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내가 그 교회에 2000론도를 지불했다는 건 지금쯤이면 엔더슨의 귀에 들어가고도 남아.”
내 말에 클로에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그렇군요. 교신에 사용하는 은잔을 챙겨갔을 리가 없네요.”
하지만, 교회에 가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전까지 꾸준히 다니다가 이제 와서 갑자기 안 다니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
“엘렌도 엔더슨의 저택으로 불러야 할 거야.”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 보안을 위한 마법 정도는 당연히 설치되어있을 테니까요. 연락을 넣어놓을게요.”
엘렌이 담당해야 하는 역할은 저택에 걸려 있는 마법의 해제다. 거기에 더해서, 만약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전력에 보탬이 되어주겠지.
“그럼, 준비하고 오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나는 지도를 확인하고 엔더슨의 저택 근처에 있는 건물을 하나 가리켰다.
“여기로 와. 엘렌에게도 이쪽으로 오라고 전해. 설마, 첩보국 소속이면서 몰래 거기까지 못 가는 건 아니지?”
내 말에 클로에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간단하지만 자신감 있는 대답이 돌아왔다.
“좋아, 그럼 한 시간 뒤 이 건물 지붕 위에서 보자고.”
말을 마친 나는 클로에를 보내고 나서 적당한 옷으로 갈아입고 장갑을 낀 다음, 깃펜과 철사 두 개를 챙겼다. 몰래 움직이는 건 나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은신을 사용하면 되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엔더슨의 저택 근처에 자리 잡고 엘렌과 클로에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거 담벼락 한번 높다.”
건물 지붕에서 봐도 저택 안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네. 하긴, 이 정도는 되어야 어설픈 녀석들이 도둑질을 안 하려 들지.
“뭐해.”
나는 그 말에 흠칫 놀라 검을 반쯤 뽑았다. 그리고, 허공에서 스르륵 엘렌과 클로에의 모습이 나타났다. 같이 온 모양이군.
“이런 망할, 칼질할 뻔했잖아.”
내 대답을 들은 엘렌이 픽 웃고는 저택을 훑어본다.
“엔더슨 기사단장의 저택은 역시 굉장하네. 경보 마법도 꽤 정교하게 짜여있고.”
감탄하는 것 같은 엘렌의 대답에 나는 약간 불안해졌다.
“뚫고 들어갈 수 있겠지?”
내 말에 엘렌이 나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보고 말했다.
“지금 네 옆에 있는 여자는 악마를 고향 땅으로 쑤셔 넣을 지옥문도 열어젖히는 마법사야. 당연히 저택의 경보 마법 정도는 뚫을 수 있어.”
그래, 뭐…… 엄연히 말하자면 헤로스가 제 발로 걸어 들어가지 않았다면 쑤셔 넣지는 못했겠지. 하지만 큰일을 해줘야 하는 사람의 성질을 그런 말로 긁을 필요는 없다.
“문제는, 완전히 해제하면 그것도 그것대로 문제가 생기거든.”
나는 그 말에 엘렌을 바라봤다.
“무슨 의미야?”
내 말에 엘렌이 대답했다.
“경보 마법에 걸리면 즉각 엔더슨에게 연락이 가고, 저택 안에는 종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져. 문제는, 내가 걸려 있는 마법을 해제하면 저택의 종과 엔더슨이 가지고 있는 도구는 부서질 거야.”
그것 참 기가 막힌 상황이네.
“그래서, 대안이 있으니 그렇게 차분한 표정이겠지?”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제를 하는 대신, 무력화 시킬 거야. 하지만, 그러면 나는 여기에서 움직이지 못해. 계속해서 저택에 걸린 경보 마법을 통제해야 하니까.”
그리고, 무력화는 해제보다 훨씬 까다롭기 때문에 엘렌이 움직이지 않고 집중하는 동안만 유효하다고 한다.
“여기에 리버플로우 양 혼자만 두는 건 위험할지도 몰라요.”
움직이지 못한다면 만에 하나 습격이 생겼을 경우, 엘렌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클로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남아서 엘렌을 지키고 있어. 저택으로는 나 혼자 들어갈 테니.”
내 말에 클로에가 침을 삼켰다.
“그러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나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저택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피리를 불게.”
어차피 내가 위험해진 상황이라면 더 이상 경보 마법을 무력화시킬 필요가 없다. 내가 피리를 불면 엘렌은 무력화를 중단하고 클로에와 함께 저택으로 진입하면 된다.
반대로, 엘렌이 위험한 상황이라면 클로에가 피리를 불면 된다. 그 즉시 나는 조사를 중단하고 저택을 벗어나 여기로 합류할 거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결론 났어? 그럼 바로 시작할게.”
엘렌은 말을 마치고 옷소매를 걷었다. 그녀의 손등에 박힌 보석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한 30초 정도 지났을까, 엘렌의 입이 열렸다.
“좋아, 지금이라면 들어가도 문제없어. 내가 무력화시킨 건 마법뿐이라는 걸 명심하고.”
“걱정할 필요 없어.”
남의 저택 몰래 들어가서 뒤지는 거? 기본 교양이지. 말을 마친 나는 지붕에서 뛰어내려 곧바로 저택의 담장을 향해 달렸다.
하나, 둘. 다리에 힘을 빡 주고 뛰어오르자, 나는 어렵지 않게 저택의 담을 넘을 수 있었다. 담을 넘자마자 나는 은신을 사용했다. 여기부터는 엘렌과 클로에도 내가 은신을 사용했다는 점을 알 수 없을 테니까.
서두르는 편이 좋겠지. 저택 안에는 횃불 같은 걸 들고 순찰을 도는 병사들이 꽤 있었다. 나는 녀석들의 눈을 피해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창문이 잠겼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창문을 살폈다. 걸쇠로 잠겨 있는 창문이다.
“개껌이지.”
주머니에서 꺼낸 철사를 밀어 넣고, 그대로 들어 올렸다. 철사 끝에 창문을 잠가놓은 걸쇠가 닿았다.
걸쇠가 약간 무겁다. 이러면…… 그냥 들어 올리면 철사만 구부러진다. 이럴 땐.
나는 철사 끝을 구부려 U자 모양을 만들었다. 다시 철사를 밀어 넣자, 걸쇠는 U자 모양으로 구부러진 철사의 가운데 부분에 닿았다.
지렛대처럼 쥐고 있는 철사 끝을 누르자, U자 모양으로 구부러진 철사가 걸쇠를 사이에 낀 채 ㄷ 모양으로 회전하며, 철사의 반대쪽 끝이 창문 틈으로 튀어나온다.
틈으로 튀어나온 반대쪽도 잡고 그대로 들어 올리자, 걸쇠가 들어 올려지며 잠긴 창문이 열렸다.
“후우.”
일단은 신발부터 털어야지. 손수건을 꺼낸 나는 한 손으로 창문에 매달린 채 손수건으로 신발 밑창을 깨끗하게 닦았다.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나는 은신을 풀고, 곧바로 내가 들어온 문을 다시 걸어 잠갔다. 집무실, 서재, 아니면 침실. 이 세 곳을 우선적으로 찾아봐야 한다.
“사람 소리가 들리는 곳은 아니야.”
지금 시간에 사람 소리가 들리는 곳은 하녀나 하인들이 쉬는 장소가 대부분이다.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피하며 나는 꽤 근사해 보이는 문 앞에 섰다. 여기는 어떨까.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려보니, 당연하다는 듯이 잠겨 있다.
“그럼 침실은 아니겠네.”
침실이 잠겨 있을 리는 없지. 서재나 집무실이 아닐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아까 유용하게 사용했던 철사를 다시 꺼냈다. 잠깐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후우.”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나는 손을 마주하고 가볍게 비볐다.
“좋아. 많이 어두운데.”
조심스럽게 손으로 주변을 더듬거리던 나는 기름을 태워 불을 붙이는 작은 램프를 찾아냈다. 살짝 밖으로 나와 벽에 장식되어있는 촛대의 불꽃을 램프로 옮겨 붙인 나는 다시 내가 딴 문 안으로 들어갔다.
조명은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나는 램프를 든 채 집무실 안을 살폈다.
“어머, 엄청 일찍 끝났네? 오늘 4층 청소 담당이라고 울상을 지었잖아.”
문 근처로 다가오는 소리에 나는 숨을 죽이고 문 옆에 붙었다. 하녀들인 모양이다.
“아하하, 엔더슨 경이 오늘은 침소 정돈을 하지 말라고 하셨거든.”
“어유, 복 터진 년. 그럼 나 좀 도와줘.”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복도를 걸어가는 하녀들, 덕분에 참 좋은 걸 하나 알아간다. 4층의 침소 정리라. 왜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을까?
여기가 3층이었으니까, 바로 위층에서 내려오는 길인 모양이다.
나는 그 대답을 듣자마자 곧바로 램프의 불을 끄고, 원래 있던 위치로 되돌려 놓고 문을 나와 4층으로 향했다.
중간에 인기척이 느껴지면 모습을 감추기를 반복하며 4층에 도착한 나는 문을 하나하나 확인하다가 침실이라고 생각되는 곳 앞에 멈춰 섰다.
“하.”
아무리 청소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인간적으로 문고리에 손자국 정도는 지우는 편이 어떠냐. 일을 아주 대충하는군그래. 하긴 뭐, 하녀들이라고 이 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걸까.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아 돌리자, 문은 의외로 수월하게 열렸다. 아직 침소 주인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잠가놓지 않은 모양이다. 오래 자리를 비운 것도 아닌데 침실을 잠가버리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