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화
엔더슨의 침소는 집무실처럼 어두컴컴하지 않았다. 연한 조명이 방 안을 비추고 있다.
은신을 유지한 채 침실 안으로 들어간 나는 순간적으로 방 안을 훑어보고는 열린 문 너머에 허상을 하나 만들고, 문 안으로 걸어들어오게 했다.
“…….”
그리고, 나는 허상이 손을 뻗어 문을 닫는 시늉을 하도록 하며 거기에 맞춰 문을 움직여 닫았다. 문이 닫히자마자, 바닥에 놓여 있던 작은 진주 하나가 짙은 초록색 빛을 뿜으며 마법진을 만든다.
“가짜라고?!”
그리고, 허상을 노리고 장롱에서 튀어나와 칼질한 복면 여성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린다. 숨어 있던 녀석이 이렇게 큰 소리를 냈다는 건, 방금 뿜어져 나온 마법진이 이 방의 소음을 밖으로 전달하지 않게 만들었다는 뜻이겠지.
녀석의 뒤통수를 검 손잡이로 내려찍었다. 머리를 얻어맞은 여자가 정신을 잃었다.
“친구. 다음 생에는 조금 더 자연스러운 물건에 마법진을 새겨둬.”
진주라니, 바보냐?
이 방에 진주가 뭐하러 덩그러니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겠어. 엔더슨이 부업으로 보석세공이라도 하냐? 몰래 숨어서 습격을 노리고 싶다면, 조금 더 자연스러운 물건을 사용해야지.
하다못해 저 진주를 컵 안에 넣어두고 있다가 발동시켰어도 눈치채지 못했을 텐데.
“엔더슨이 하녀를 출입시키지 않은 이유는 알겠어.”
청소하다가 장롱 안에 숨어있는 이 친구를 보면 하녀가 얼마나 놀라겠어.
나는 칼끝을 조심스럽게 여자의 뒷목 줄기에 밀어 넣었다. 살을 가르고 들어간 칼날이 경추 사이의 틈으로 밀려 들어가 척수를 끊는다.
검을 박아넣은 채로, 신발을 닦았던 손수건을 꺼낸 나는 검을 천천히 뽑아내기가 무섭게 상처를 손수건으로 막고, 칼날을 그 손수건에 문질러 닦았다.
“이제…….”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장롱 쪽으로 다가갔다. 여기에 숨어있었다면, 당연히 여기에 내가 찾는 물건이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바닥에 끌린 자국.”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장롱의 내부를 손등으로 몇 번 두들겨 보았다.
“좋아.”
이 장롱 뒤편에 작은 공간이 있을 거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바닥의 진주를 슬쩍 확인했다. 아직까지 달려오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저 진주에서 튀어나온 마법진의 효과는 내가 생각하는 게 맞는 모양이다.
“후우.”
장롱을 옆으로 밀어낸 나는 장롱 뒤편의 공간을 확인하고 웃었다.
“일단은 저 진주부터.”
나는 바닥에서 여전히 빛을 흘리는 진주를 검으로 내려찍어 박살 냈다. 엘렌과 클로에가 위협에 처하면 피리를 불 텐데, 계속 소리를 차단시켜 놓으면 그 소리를 못 듣게 될 수도 있으니까.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진주를 부수고 장롱 뒤편의 공간을 확인한 나는 얼굴을 구겼다.
“에라이 씨.”
목제 케이스? 여기에서 또 이렇게 귀찮은 일을 시키다니. 나는 고급스러운 윤택이 도는 케이스를 살펴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이즈를 보니 은잔이 들어가면 딱 맞겠는데.”
나는 분신을 하나 만들어서 케이스를 손등으로 두들겨 보도록 했다.
소리가 둔탁하다. 열어보면 진열장 같은 형식이겠지. 은잔 하나가 들어갈 공간을 남겨두고 나머지 공간은 다 완충재가 채워져 있을 거다. 그 뭐냐, 한국에서 가성비 옆구리가 터진 과자처럼 말이야.
“정말 열고 싶지 않게 생겼다.”
자물쇠도 없고, 잠금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들키면 안 되는 물건을 이렇게 허술하게 보관하는 이유는 하나겠지.
“마법.”
열려고 하면 뭔가 걸려 있는 참으로 신비로운 마법이 발동되면서 나를 튀겨버릴지도 모른다. 그건 이미 쿠르스트 산맥에서 소포로 한 번 당해봤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때 내가 받았던 소포도 엔더슨이 보낸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다면 같은 마법을 이 상자에 걸어놓지 않았으리란 법도 없다.
분신으로 상자를 들어보게 했다.
“별다른 일은 없네.”
그냥, 열어보지만 않으면 되는 모양이다. 그럼 챙겨서 돌아갈…….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뭔가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침실의 벽 중 하나가 통째로 무너졌다. 먼지가 확 일어났다. 재채기를 하던 나는 쏟아지는 먼지 사이로 드러난 익숙한 얼굴을 보고 입을 열었다.
“쿨럭, 괜찮겠어? 니 집이잖아. 이거 수리비 엄청 깨질 텐데. 아니면 평소에 침실이 좀 작다고 생각해서 확장공사 한 거야?”
공사 한번 거칠게 한다. 엔더슨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검을 쥔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예상했던 복귀 시간보다 훨씬 빠르다.
바쁘게 온 것 같은데, 몸을 감싼 갑옷은 또 어느 틈에 입은 거야.
“마틴 레드우드, 이 개 같은 새끼.”
나는 입에 피리를 물고 신호를 보냈다. 얘들아 살려줘, 여기 무서운 아저씨가 있다. 잠깐 사이에 신호를 보낸 다음 입에 물고 있던 피리를 뱉은 나는 검을 쥔 채 자세를 잡았다.
“엔더슨 하이빌. 그런 표정 짓지 마. 누가 보면 내가 네 마누라라도 뺏은 줄 알겠다.”
헐떡거리는 꼴 보아하니 내가 교회로 오는 기색이 없자 수상함을 느끼고 거기부터 여기까지 미친 듯이 질주한 모양인데.
“이름 말고 다른 걸로 불러줄까, 적색은 어때?”
녀석은 별다른 말 없이 나를 노려보다가 시선을 슬쩍 옆으로 돌렸다. 옆으로 밀어진 장롱, 그리고 그 뒤편의 텅 빈 공간. 엔더슨이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는 지금 자랑스러운 조국의 기사단장 엔더슨 하이빌의 거처에 무단 침입했다.”
“기사단장이었던 엔더슨 하이빌 아닐까.”
나는 그런 대답을 돌려주었다.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엔더슨 기사단장.”
엘렌과 클로에가 굳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엘렌 리버플로우, 자네는 지금 큰 오해를 하고 있어.”
나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장롱 뒤에서 꺼낸 상자를 가볍게 흔들었다.
“오해는 물증으로 해결해야지. 우리 함께 열어볼까?”
내 말에 엘렌이 상자를 흘끗 보고는 대답했다.
“쿠르스트 산맥에서 다나 힐베른이 자신의 배낭에 걸어두었던 마법과 정확히 같아요.”
그 말에 엔더슨이 대답했다.
“저건 내 물건이 아니다.”
나는 그 말에 오호, 하는 소리를 내고 그를 바라봤다.
“지금 당장 이게 네 물건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몇 가지 말해 줄 수 있는데. 들어볼래?”
“왕도에 주둔 중인 병력들도 지금의 소란을 눈치챘을 거예요, 엔더슨 기사단장.”
클로에의 말에 엔더슨이 우리를 슥 훑어보고 검을 들어 올렸다. 세 명 다 죽이고 상자도 파괴할 생각이군.
그 뒤에는 우리를 그냥 멋대로 저택에 침입한 습격자로 치부하면 될 일이다.
“도와.”
말을 마친 나는 엔더슨을 향해 달려들었다. 엔더슨의 검과 내 검이 서로 부딪치고, 아직도 희미하게 주변을 떠돌던 먼지가 바람을 타고 날뛰기 시작한다.
“네 녀석이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검을 휘둘렀다!”
“……슬슬 날이 추우면 뼈가 시릴 나이겠네. 안 그래?”
서로 부딪친 검 너머에서 전해지는 힘에, 내 몸이 천천히 뒤로 밀리기 시작한다. 기사단장이라는 새끼들은 죄다 인체실험이라도 자원한 건가. 왜 이렇게 힘이 좋아.
“정면은 교대하죠.”
그때, 클로에의 레이피어가 엔더슨의 검에 닿았다. 나는 곧바로 검에서 힘을 빼고 뒤로 빠졌다.
“흠.”
엔더슨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자신의 검에 닿은 클로에의 레이피어를 바라봤다.
“내가 바라본 전장이 수십이 넘는다. 나의 청춘은 전쟁으로 시작해서 전쟁으로 끝났다.”
말을 하면서, 서서히 엔더슨의 검 위로 시퍼런 불꽃이 뿜어져 나온다. 본 기억이 있다.
“쿠르스트 산맥의 동굴에서 봤던 불타는 깡통이 너였냐.”
속이 비어있었으니, 아마 원격 조종 같은 방식을 사용했던 모양인데. 당연히, 본체 되시는 이 친구의 검을 휘감고 있는 창백한 불꽃은 그때의 깡통 시절과는 차원이 다르다.
“순식간에 끝나지는 말아라.”
“기사단장직을 아가리 놀려서 딴 거냐.”
나는 그렇게 대꾸하고 녀석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청색의 화염이 휘감긴 검이 내 몸을 노리고 휘둘러진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허공에 뜬 채 뒤로 날아간다.
“멱살잡이. 천장에 꽂아버려라.”
거기에 맞춰 엘렌이 다이아몬드가 박힌 손을 들어 올린다. 엔더슨의 몸 주변에 아지랑이가 휘감긴다. 그의 몸이 갑옷째 들썩거리기 시작하고, 갑옷 위에 금색의 마법진이 떠오른다. 엘렌이 얼굴을 구겼다.
“마력 저항이 너무 강해. 이래서는…….”
그래? 작열하는 공기 속에서 얼굴을 구긴 채, 나는 클로에를 바라봤다.
“클로에, 도와서 띄워버려!”
내 말에 그녀가 레이피어를 들고 엔더슨을 향해 달려들어 검을 올려붙였다. 엔더슨이 검을 내려찍어 클로에의 공격을 막아낸다.
쿠쿵, 하는 소리와 함께 클로에의 검에 쌓여있던 힘이 엔더슨을 향해 쏟아진다. 동시에, 일렁거리던 아지랑이가 격렬하게 날뛰며, 엔더슨의 몸이 붕 떠올랐다.
허공에 뜬 엔더슨을 향해, 내가 만들어낸 분신이 쏘아져 나간다. 엔더슨이 타오르는 검을 휘둘러 분신을 지운다. 곧바로 다시 분신이 날아간다.
“저 갑옷에 대해 말해봐. 최대한 빠르게.”
“마법 저항이 대마법 처리를 한 성벽 수준이야. 저 갑옷의 마력 저항을 날려버리기에는 내가 낼 수 있는 최고 출력이 조금, 정말 조금 모자라.”
그럼 절대로 못 뚫는다는 건 아니군.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스무 개에 달하는 분신이 녀석의 검에 박살 나거나, 갑옷을 두들기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아, 이제 한계다.
투두두두두두, 하는 소리와 함께 이어지던 공세가 끝나고 잠깐 숨을 몰아쉬는 사이 엔더슨이 충혈된 눈으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죽어라!”
엘렌이 엔더슨의 검에 휘감긴 화염이 격렬해지는 걸 확인하고 순간적으로 양손을 겹쳤다. 나와 클로에, 엘렌의 몸을 투명한 막이 감싼다.
“이걸로 막을 수 있는 건 열기뿐이야, 피해!”
나도 피할 생각이었어! 나는 달려드는 엔더슨을 향해 다섯 번 정도 분신을 쏟아내며 가까스로 내려찍는 검을 피했다.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내려찍힌 자리에서 시퍼런 화염 기둥이 치솟는다.
“크……으…….”
그리고, 내 몸을 감싸고 있던 투명한 막이 출렁거리며 산 채로 타는 것 같은 고통이 찾아온다. 열기 막아준다고 했잖아! 전혀 안 막아준 것 같은데?!
“망할.”
엔더슨의 검에서 솟구친 불기둥은 방의 천장을 녹였다. 뻥 뚫린 거대한 구멍과, 아래로 주르르 쏟아져 내리는 시뻘건 액체.
“지금 저 새끼, 대리석을 녹인거야?”
나는 뻥 뚫린 구멍을 확인하고 침을 삼켰다. 저건 거의 인간 용광로잖아. 우리는 벽을 박살내고 야외로 나갔다.
밀폐된 장소에서 저런 거랑 싸우니 오븐 안에 들어가는 게 더 현명하다.
내가 경악하는 모습을 보고 엘렌이 한마디 했다.
“헤로스는 이것보다 훨씬 더 심했어. 그런 녀석도 이겼잖아?”
“그 해골은 내기랍시고 봐줬잖아. 이 여자야.”
엔더슨의 질주는 아직 멈추지 않았다. 우리를 쫓아 밖으로 나온 녀석은 멀쩡해 보이는 모습으로 청색으로 작열하는 검을 손에 쥔 채 우리를 바라본다.
“하아…… 이제 좀 살아있는 것 같군.”
나는 그 말에 움찔하고는 엔더슨을 바라봤다. 충혈된 눈과 부풀어 오른 근육. 입에서 흘러내리는 침과 헐떡이는 숨까지.
“미친놈.”
내 말에 녀석이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마틴 레드우드! 미치지 않으면 견딜 수 경험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다! 네 따위가 전쟁을 아느냐.”
“커흡.”
타오르는 화염은 어떻게든 엘렌이 유지하는 투명한 막으로 견딜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 녀석의 검에 실린 힘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검이 부딪친 충격만으로도 목구멍 위로 핏물이 올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