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화
저택의 야외로 전장을 옮겼지만 크게 변한 건 없다. 여전히 엔더슨이 휘두르는 검은 땅을 찍을 때마다 살벌한 화염 기둥이 솟구치고, 우리는 그 열기와 엔더슨의 공격을 견디고, 반격한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엔더슨이 자리에 멈춰 선 채 숨을 몰아쉬며 우리를 노려본다. 그 틈에 나는 슬쩍 클로에의 표정을 보고 한마디 했다.
“진정해. 네가 다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으면 쉬어.”
내 말에 숨을 몰아쉬던 클로에가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의 가슴에 올리고 있던 손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이렇게 극한까지 상황이 몰린 덕분인지 또 내 장점이 하나 더 생겼다. 다른 기사들은 마력을 운용하면 심장의 이물감이 점점 더 심해지지만, 붉은 가지의 힘 덕분에 심장을 새로 빚어낸 나는 그게 없으니까.
서로가 극도로 집중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약간만 신경 쓰이는 게 있어도 집중력이 쉬이 흐트러지는데, 심장의 이물감이면 오죽할까. 그건 조금만 집중이 흐트러져도 신경이 작살나는 엘렌도 마찬가지겠지.
“쉬면서, 내 보조에 집중해.”
적이고 아군이고, 이 상황에서 가장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공세를 유지할 수 있는 건 나 말고 없다. 지구력. 그게 저 괴물 딱지 같은 기사단장을 상대로 명확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는 점이다.
“잘못하면 무덤 치우게 되는 거 알죠? 괜찮으시겠어요?”
“어차피 일이 잘못되면 너도 관짝 속으로 들어갈 테니 내 장례 치를 걱정은 할 필요 없어. 그리고, 생각 없이 보조에 집중하라고 한 게 아니야.”
말을 마친 나는 엘렌을 바라봤다.
“너는 큰 거 한 방 준비해둬.”
내 말에 엘렌이 대답했다.
“말했잖아, 내가 행사할 수 있는 마법으로는 저 갑옷을 뚫지 못해.”
“나도 네 말을 들었어. 약간 부족한 출력은 내가 마련해 줄 수 있으니까, 시키는 대로 해. 찬스가 오면, 모를 수 없을 거야.”
대화는 여기까지. 나는 숨을 몰아쉬고 있는 엔더슨을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좀 지쳤나?”
“닥쳐라!”
저 대답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예, 아니오가 아니잖아.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검과, 눈알의 먹물이 끓어오르는 것 같은 열기. 뒤에 나타난 분신이 엔더슨의 오금을 때리고 사라진다.
자세가 무너진 틈을 타 검과 검이 서로 부딪친다. 타오르는 불길 사이로 엔더슨의 얼굴이 보인다.
나는 지친 표정을 억지로 숨기고 히죽 웃었다.
“슬슬 포기하는 게 어때? 어차피 시간 문제야.”
우리는 시간을 충분히 잘 벌고 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사람들이 몰려올 거다. 내 말에 엔더슨이 숨을 한 번 크게 몰아쉰 다음 맞닿은 검에 힘을 확 불어넣었다.
내 몸이 뒤로 쭉 밀리고, 엔더슨의 검이 내 허리를 노리고 크게 횡으로 휘둘러진다. 하늘로 뛰어올라 그 검을 피한 내 다리를 엔더슨이 꽉 붙잡는다.
“잡았다.”
“…….”
한쪽 다리가 붙들린 채, 내 몸이 그대로 땅에 내려 찍힌다. 눈앞에 별똥별이 쏟아지며 몸 안에서 우드드득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건 뼈가 부러진 게 아니라 거의 으깨지다시피 한 상황인데.
바닥에 누운 나를 노리고 엔더슨의 검이 겨누어진다.
“이걸로 끝이군. 마틴 레드우드.”
“그러게.”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히죽 웃었다. 엔더슨의 뒤편에 떨어진 목제 케이스를, 분신이 나타나 열어버린다.
상자가 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으로 창백한 번갯불이 쏟아져 나와 엔더슨이 입은 갑옷 위를 달린다.
은은하게 빛나던 갑옷의 마법진이 선명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겨우 이런 걸로…….”
“엘렌! 때려 박아!”
내 말에 엘렌이 곧바로 엔더슨을 향해 마법을 쏟아낸다. 이걸로 갑옷이 버틸 수 있는 용량을 뛰어넘었다. 선명한 빛을 뿌리던 갑옷 위의 문양이 찌잉, 하는 울림과 함께 박살 나기 시작한다.
“하악, 흐에엑.”
엘렌은 그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손등에 박힌 보석을 중심으로, 불거져 나온 핏줄들이 피부를 뚫고 나올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다.
“크…… 허…….”
그리고, 갑옷의 마법 저항이 사라진 엔더슨은 쏟아진 마법을 얻어맞고 입에서 후욱, 하고 검은 연기를 뿜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이 마음이 급해졌을 때 승기를 잡으면 집중력이 무섭도록 한 곳에 몰리기 마련이지.”
아마, 이 정도 실력자라면 그냥 슬쩍 상자를 땅바닥에 버리는 것 정도는 금방 눈치챘을 거다.
당연히, 분신이 열기 전에 먼저 상자는 엔더슨의 손에 쥐어졌을 테고, 그럼 우리는 전부 감방행이었다.
내 다리를 잡는 데 성공한 순간, 엔더슨의 눈에는 나 말고는 보이지 않았을 거다. 덕분에 상자를 눈치채지 못했다.
“끝이야, 검은사자 기사단장 나으리.”
분신이 나타나, 바닥에 열린 채 방치된 목제 케이스를 챙겨 내 쪽으로 던진다. 나는 그 케이스를 받아들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좋아.”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케이스를 닫았다.
“멈춰라, 지금 당장 신분을 밝히고 투항해라!”
뒤편에 몰려온 왕도 수비대의 외침에 나는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이름은 마틴 레드우드다! 검은사자 기사단장 엔더슨 하이빌은 왕권을 유린 및 국가내란의 혐의를 받고 있다. 지금의 소란은 조사 과정에서 혐의가 밝혀진 엔더슨 하이빌이 저항하며 발생한 일이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지금 저 자리에 서 있는 엔더슨 하이빌이다!”
그때, 몰려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어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이리저리 밀리고, 누군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마틴 레드우드, 너는 네 말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지금 네가 공격한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국가를 위해 충의를 바쳐오던 기사이자, 나와 동고동락을 함께한 전우며, 나아가 검은사자 기사단의 단장이다.”
모리스 핀들턴. 번쩍이는 갑옷을 챙겨입고, 거대한 워해머를 든 노익장이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 말에 목제 케이스를 열고 그 안에 들어있던 은잔을 꺼내 들어 올렸다.
“잠시.”
그리고, 뒤편에서 처음 보는 얼굴을 한 남자가 한 명 걸어 나왔다.
“모리스 핀들턴 경, 마틴 레드우드의 말은 사실입니다.”
“네가 뭐라고 마틴 레드우드의 주장의 진위 여부를 확정 짓느냐.”
모리스의 말에 남자는 그의 앞에 서서 뭔가를 살짝 모리스에게 보여주었다.
“제 신분은 이걸로 증명되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
모리스는 남자가 내민 무언가를 확인하고 잠깐 움찔한 다음, 입을 다물었다. 모리스의 입을 다물게 한 남자가 엔더슨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현재 국가내란 및 왕권 유린 혐의에 관한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 순순히 협조해주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엔더슨이 후욱, 하고 숨을 내쉬자 다시금 검에 푸른 화염이 휘감긴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갈라지고 녀석은 엄청난 속도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엔더슨 하이빌.”
휘둘러진 검은 내 검에 막히지 않았다. 어느 사이엔가 모리스가 내 앞에 서 있었고 엔더슨의 검은 모리스의 망치가 막고 있었다.
쇠가 서로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엔더슨의 손에 쥐어졌던 검이 하늘을 날아 땅에 박힌다. 그리고, 모리스가 휘두른 망치가 엔더슨의 갑옷 흉부를 후려친다. 갑옷이 박살 나고, 엔더슨이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폐하의 명이다. 순순히 조사를 받도록.”
말을 마친 모리스는 잠깐 머뭇거리며 엔더슨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나는…… 그래. 술이나 한잔해야겠군.”
말을 마친 모리스가 돌아가고, 나는 쓰러진 엔더슨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묶었다.
“이후 일 처리는 제가 하죠.”
나는 모리스를 설득한 남자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내 말에 남자가 나를 잠깐 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리로.”
병사들이 다가와 엔더슨을 마차로 끌고 갔다. 나는 클로에와 엘렌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은 돌아가서 쉬고 있어.”
“괜찮겠어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난리를 피우고는 내일 아침에 또 베로나 제국 황녀의 졸개 노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짜증 나서 돌아버릴 것 같아.”
내 말에 엘렌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안 그래도 소식은 들었어. 우리가 아니라 네가 쉬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돌아가.”
말을 마친 나는 엔더슨이 끌려간 마차 쪽으로 향했다. 마차에 오르자, 한쪽 의자에는 엔더슨이 묶여 있고, 그 반대편 의자에는 방금 대화를 나누었던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마차가 굴러가기 시작하자,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첩보국은 지금 바쁘다고 들었는데, 그런 거 치고는 굉장히 빨리 오셨군요.”
내 말에 옆에 앉아있던 남자가 얼굴을 가렸다가 내렸다. 마침내 나는 익숙한 얼굴을 맞이할 수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야. 베로나 제국 황녀 건 때문에 가용한 인원이 거의 없어. 벌써 몇 번이나 말했잖아. 내가 왜 직접 왔겠나.”
말을 마친 알버트는 창문을 가리고 있는 커튼을 손으로 한 번 쓸어내렸다.
“사실상 제가 잡은 거니, 취조는 제가 하겠습니다.”
알버트는 커튼을 바라보며 고민하나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그렇게 하게.”
“그리고 하나 더, 엔더슨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클로에가 세운 공이 만만치 않으니 이걸 빌미로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알버트가 순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 어떡하나.
“하나 더, 클로에가 기사서임을 받게 된다면 제 호위기사로 둘 생각입니다. 물론, 클로에의 의사는 물어볼 겁니다.”
내 말의 의미를 알버트가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호위기사가 된다면, 클로에는 더 이상 첩보국 소속이 아니게 된다. 물론 이전처럼 첩보국과의 연락은 클로에에게 일임하겠지만, 그녀의 우선순위는 첩보국의 임무가 아니라 내가 지시한 일이어야 한다.
즉, 알버트는 클로에를 첩보국에서 놓아줘야 한다.
“그건…….”
알버트의 표정이 점점 더 복잡하게 변했다. 그리고 10분 정도 지났을까. 알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겠지.”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다. 아무래도, 클로에에게 뭔가 있기는 한 모양이군. 일단, 그건 내가 당장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니다.
“서류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내 말에 알버트가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 위에서 능숙하게 서류를 하나 작성하고, 거기에 국왕의 옥새를 찍었다.
클로에가 내 제안을 받아들여 호위기사가 된다면 그녀는 이 이후 첩보국에 협조할 뿐, 더 이상 첩보국의 소속이 아니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지금 말한 두 가지 조건 이외에도 당연히 지금까지 이 고생을 한 수고비 정도는 챙겨주실 거라 믿습니다.”
“자네, 장사를 하지 그랬나. 사례금을 조만간 보내도록 할 테니, 걱정하지 말게.”
좋아, 그 정도면 알버트에게 내가 요구할 만한 건 더는 없다. 그 이후로 우리는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도착했네, 내리지.”
알버트가 내리고, 나는 아직 정신을 잃은 상태인 엔더슨을 둘러업고 내렸다. 도착한 곳은 왕도 외곽에 위치한 농가 중 하나였다.
이미 알버트가 준비를 해두었는지, 왕국의 병사들이 주변을 지키는 중이었다.
“여기입니까?”
내 말에 다시 얼굴을 갈아 끼운 알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주변을 슥 훑어본 다음 농가 안으로 들어갔다.
엔더슨을 의자에 앉히자, 병사들이 들어와서 그의 몸을 다시 의자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맞은편 의자에 앉아서 잠시 기다리자, 엔더슨이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잘 잤냐. 누구는 이 시간 되도록 잠도 못 자고 있는데, 아주 세상 편하네.”
잠깐 숨을 몰아쉬던 엔더슨이 마른기침을 몇 번 하고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졌군.”
“그런 셈이지.”
내 대답을 듣자 엔더슨이 나지막하게 웃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들었다.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나? 칠색 내각에 한 방 먹였다고 여기는 모양이지?”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