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화
엔더슨의 질문 두 개 중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리다. 내가 칠색 내각에 한 방 먹인 건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칠색 내각이라, 아직 이긴 건 아니지.”
말을 마친 나는 의자를 당겨서 엔더슨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하지만 너를 이긴 건 확실하잖아?”
내 말에 엔더슨이 다시 한번 기침을 하고는 입에서 피를 흘렸다.
“그건 부정할 수 없겠군.”
말을 마친 엔더슨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말했다.
“아직 내 숨통이 붙어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물어볼 게 조금 있거든.”
협조해준다면 최소한 교수형 당하기 전에 괴롭힘당할 일은 없을 거야.
다소 지친 표정이던 엔더슨이 얼굴을 굳히고 나를 바라봤다.
“애송아, 전쟁을 경험해 본 적 있나?”
저 말은 싸울 때도 했던 것 같은데.
엔더슨은 짐승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것 같이 섬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지만, 손에 쥐고 있는 검에서 이글거리던 푸른 화염은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글쎄, 비슷한 건 경험해 봤는데. 저기 꽤 추운 산골짜기에서.”
내 말에 엔더슨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쿠르스트 산맥의 방어전 따위. 전쟁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시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자기가 경험한 일이 제일 어렵다고 생각하는 법이니까.
“진짜 전쟁은, 비참하게 후퇴할 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사기는 바닥을 치고, 보급은 끊기지. 영광도 없고 찬사도 없어. 전우애와 명예는 전쟁에 휩싸여 재로 변한다.”
엔더슨의 검에서 피어오르던 화염은 잦아들었다. 녀석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기사니, 군인이니…… 우리는 결국 장작개비일 뿐이다. 남의 손에 의해 불구덩이 속에 던져져, 그 속에서 스스로를 불태우지.”
잠깐 침묵하고 있던 엔더슨이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불구덩이 속에 던져 넣어진 것은 장작이지만, 그 장작이 스스로의 몸을 불사르며 뿜어져 나오는 빛과 온기는 장작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 주제에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전우애니, 용맹이니 하는 공허한 말과 몇몇 조각의 싸구려 훈장 따위로 스스로를 위안한다!”
엔더슨이 눈을 질끈 감고 있다가 잦아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장작이 아니라 장작을 던져넣는 인간이 되고 싶었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가볍게 몇 번 두들기고 웃었다.
“친구, 의자에 묶여 있는 상황을 보니 썩 마음에 드는 결과가 나오지는 않은 모양인데.”
“그렇군. 결국 이 꼴이니.”
말을 마친 엔더슨이 내 눈을 응시했다.
“네 녀석의 방해만 없었어도 충분했다. 쿠르스트 산맥에서 찾아낸 시체를 일으켰다면 능히 이 왕국을 내 손 안에 넣었을 것이다. 이 왕국에 새로운 왕가, 하이빌 왕가가 탄생했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남의 명령을 듣고 전장이라는 이름의 불구덩이로 던져 넣어지는 장작 신세를 벗어날 수 있었을 거다.”
입에서 피를 흘리며, 사지가 쇠사슬로 묶인 엔더슨은 말 그대로 다 타고 남은 재 찌꺼기와 그렇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고개를 돌려 자신의 몸을 휘감은 두꺼운 쇠사슬을 확인한 엔더슨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저지른 일을 들켰으니 참수형이겠지.”
나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하고는 입을 열었다.
“거기 듣고 있는 거 알고 있으니, 술이나 한잔 넣어주시죠.”
잠시 뒤, 문이 열리고 술병 하나를 받을 수 있었다.
“마셔.”
원래 반란이라는 게 성공하면 대박이고, 실패하면 쪽박인 법이다.
굳이 이 녀석에게 술을 먹이는 이유는 뭐 동정심 같은 게 들어서가 아니라, 대충 태도를 보아하니 약간 부드럽게 대해주면 막 살을 자르고 뼈를 부수고 할 필요 없이 내가 궁금해하던 것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술을 들이켠 엔더슨이 푸후, 하는 소리를 내고 침을 삼켰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 게 뭐지?”
이렇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술을 가져다준 거지만, 나는 짐짓 놀란 척을 했다.
“의외로 협조적인데.”
내 말에 엔더슨이 히죽 웃었다. 녀석의 눈에는 안쓰러움이 담겨 있었다.
“너는 네가 지금 살아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아니다. 내 눈에는 시체가 걸어 다니는 꼴로 보이는군.”
나는 그 말에 픽 웃었다.
“그거참 대단한 우연이군. 나도 지금 시체가 말하는 걸 듣고 있는 중이거든.”
내 대답을 들은 엔더슨이 흐흐흐, 하고 웃음을 흘렸다.
“칠색 내각에는 일곱 명의 지도자가 있다. 각자 서로를 색깔로 부르지.”
“그건 다나 힐베른에게 들어서 알고 있어.”
내 말에 엔더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칠색 내각의 여섯 명은 각자 나름대로의 조직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활동한다. 자기 자신을 제외한 다른 색들이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
나는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조직은 그런 식으로 유지될 수 없어.”
내 말에 엔더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섯 명은 그렇게 활동하지만, 한 명은 예외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다시금 술병을 기울여 엔더슨의 입에 술을 넣어주었다.
“예외라. 더 들어보고 싶은데.”
언제나 예외가 중요한 법이지. 엔더슨이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다음 대답했다.
“우리는 칠색 내각이라는 이름하에 움직이고 있지만, 오로지 자색을 통해서만 서로에게 연락할 수 있다.”
자색, 다른 말로는 보라색. 무지개의 일곱 색깔 중 가장 마지막.
“다른 색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영향력을 강화하지. 그러다가 도움이 필요하거나, 협조를 받을 일이 생기면 자색에게 연락한다.”
그러면 자색은 그 요구를 확인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색에게 연락한다.
“정보가 완전히 일방통행이군.”
칠색 내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자색의 귀로 흘러들어온다. 자색은 그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꼭 필요한 정보만을 다른 색들에게 알려준다. 내 말에 엔더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지.”
장작을 던지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한 주제에 속한 조직에서 담당하는 역할을 보면 아주 장작이 따로 없는데?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았다.
협조하는 취조 대상의 성질을 긁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니까.
“또한, 여섯 가지 색이 각자 진행하고 있던 계획이 뜻대로 풀리지 않게 되면 자색에게 조언을 청하고, 상황이 더 심각해지면 아예 자색이 직접 나서 사태를 수습한다.”
엔더슨의 말을 들은 나는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쿠르스트 산맥에서 일어났던 하이랜더의 단체 습격 사건도 그럼 자색의 짓인가?”
내 말에 엔더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중에 사건이 다 끝나고 난 다음 알버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나도 괜찮은 생각이었다고 감탄했을 정도니까. 다른 녀석들이 벌인 일을 수습하고 다니는 해결사 노릇을 할 정도의 능력을 충분히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런 거치고는 네가 아직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는데.”
보통 그런 비밀 조직이라면 조직의 간부가 내부 비밀을 털어놓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뭐 자폭 장치 같은 거라도 몸에 심어놓지 않나?
내 말에 엔더슨이 한숨을 쉬었다.
“자색이라면 내가 여기에 붙잡혀서 하게 될 말 정도는 능히 짐작하고 있겠지. 내가 아무리 기를 쓰고 알고 있는 것들을 전부 알려준다고 해도 마틴 레드우드, 네 녀석이 자신에게 닿을 수 없다는 걸 그 자식은 확신하고 있는 거야.”
“그거참 당돌한 친구네.”
그 정도면 자신감이 아니라 오만함이라고 표현하는 쪽이 더 걸맞겠는데. 내 말에 엔더슨이 휘적휘적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보고 걸어 다니는 시체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바닥에 피가 섞인 침을 뱉은 엔더슨이 나를 바라봤다.
“너는 절대로 자색을 찾아내지 못할 거다. 오히려, 녀석 손안에서 놀아나다가 비참하게 죽겠지. 이건 저주가 아니라 사실이다.”
나는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대답했다.
“사실이 아니라 경험에 의한 추론이겠지.”
100마리의 백조를 확인했는데 모두 깃털이 하얀색이었다. 그러니 백조들은 전부 깃털이 하얀색일 것이다. 그런 식으로 증명된 사실은 검은 백조 한 마리가 나오는 순간 부정된다.
“예외는 없었다. 지금까지 칠색 내각의 존재를 눈치챈 녀석이 너 하나만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나름대로 날고 기던 모든 녀석들이 결국 자색에 의해 최후를 맞이했어.”
말을 마친 엔더슨이 잠깐 침묵하나 싶더니 고개를 돌려 벽을 바라본다.
“너 말고 다른 녀석들이 들으면 즐거워할 소식도 하나 전해주지. 이 왕국 안에 존재하는 색은 나 혼자가 아니다. 최소한 하나 이상은 더 있어.”
“확신하는 이유는?”
내 말에 엔더슨이 대답했다.
“자색에게 필요 자금을 몇 번 요청했었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요청한 금액을 받을 수 있었지. 외국에 있는 색에게 자금 원조를 받은 것이라면 그렇게 빨리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어.”
나는 그 말에 턱을 쓰다듬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어차피 의미 없는 일이지. 자색을 찾아내서 제거하지 못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자색은 나를 대신할 적색을 새로 구하겠지. 설사 재주가 뛰어나 나 이외의 다른 색을 더 찾아내 제거하는 데 성공해도 똑같다.”
결국 칠색 내각은 얼핏 이야기만 들으면 일곱 명이 동등한 위치에서 움직이는 조직인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한 명이 남들보다 위에 있고, 그 이외에 나머지만 평등하다.
“이야기 잘 들었다. 아마 다른 녀석들은 더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궁금한 건 이걸로 끝났어.”
말을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참수형 당할 때 놀러 가지.”
내 말에 엔더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칠색 내각에 의해 최후를 맞이할 때, 내가 이 자리에서 한 말을 떠올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먼저 가서 기다리마.”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문을 나섰다.
“불만족스러우십니까?”
내 말에 알버트가 고개를 저었다.
“칠색 내각의 구조에 대해 알게 된 것만 해도 큰 수확이야. 거기에 더해, 왕국 안에 아직 한 녀석이 더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 않나. 만족스러운 성과지.”
나는 그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솔직히 손해 본 느낌입니다.”
까놓고 말해서, 알버트는 별로 한 것도 없이 꽁으로 이득을 챙긴 그림이지만, 나는 그 개고생을 해서 얻은 정보라는 게 고작 이거다. 자색을 찾아내지 못하면 칠색 내각을 처리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색은 자신의 신분을 절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엔더슨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지만, 어쨌든 계속해서 칠색 내각의 간부들의 정체가 밝혀지기 시작하면 상대 입장에서도 부담이 될 거야.”
“글쎄요.”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어둠이 내려앉은 농가 주변의 밭을 바라봤다.
“무슨 뜻인가?”
“하신 말씀은 이해했습니다.”
알버트가 한 말의 요점은 그거다.
결국 우리가 계속해서 칠색 내각의 간부들을 밝혀내고 제거하면 칠색 내각에 소속된 녀석들 사이에 불신감이 퍼질 테고, 결국 그 구성원들 간의 갈등이 발생해 자연스럽게 조직의 힘이 약해진다.
“크흐.”
그 정도의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칠색 내각의 실질적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자색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녀석은 엔더슨이 자기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왕국에서 참수형을 당하도록 방치했다.
“자신감입니다.”
다른 색들이 자색에게 불신감이나 불만을 품어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는 자신감.
“실질적으로 엔더슨은 애초부터 자색이 버릴 생각이었겠죠.”
“그래. 엔더슨도 여기에 묶여서 눈을 뜨자 자신이 버려졌다는 걸 확신했겠지.”
그래서 순종적으로 나온 것이다. 어차피 목이 떨어지는 걸 피할 수는 없으니, 배신당한 김에 조금이라도 칠색 내각에 엿을 먹이고 싶은 마음에. 하지만, 엔더슨은 스스로 알고 있는 것들을 털어놓으면서도, 이걸로 우리가 뭔가를 해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보고 시체가 걸어 다닌다고 할 정도였으니, 그만큼 자색을 두려워하는 거다.
“시체가 걸어 다닌다고 했지. 들어보니 기분이 어떤가?”
알버트도 엔더슨이 던졌던 말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별로 아무렇지도 않네요.”
내가 인생 살면서 저런 이야기를 한두 번 들어 본 게 아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엔더슨이 모르고 있는 점이 하나 있다. 지금 이 몸뚱어리 안에 들어있는 사람은 17살 먹은 애송이가 아니다.
“자색이라, 지가 똑똑해 봤자 아니겠습니까.”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