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화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쓰러지듯이 잠든 나는 다음 날 새벽 억지로 눈을 떴다.
“베로나 제국 황녀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문을 열고 찾아온 클로에가 전해준 편지를 확인한 나는 히죽 웃었다. 와 씨, 대학교에서 뜻밖의 휴강 소식을 들은 기분인데.
“베로나 제국 측에서도 이번 일 때문에 많이 놀란 모양이더라고요.”
어젯밤 중에 있었던 일 때문에 황녀 측에서는 오늘 하루는 외출을 자제할 예정이라고 한다. 당연히, 외출 나간 황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녀야 하는 내 임무도 오늘 하루는 없던 일이 되었다.
“그래도 돌아가지는 않네.”
그냥 돌아가 버리지. 신년 행사까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엔더슨의 처형은?”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신년 행사 중에 처형식을 진행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으니까. 행사가 끝난 다음 소수의 인원만 입회한 가운데 진행될 것 같아요.”
그래, 신년 행사를 앞두고 사람을 광장에 끌어내서 대가리를 똑 하고 썰어버리는 건 아무래도 좀 기분이 그렇지. 새해의 시작을 범죄자의 참수와 함께하는 걸 즐기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알버트에게 말해서 나도 그 자리에 껴달라고 해줘.”
“네, 연락해둘게요.”
간단하게 보고를 받은 다음, 뜻밖으로 주어진 휴식을 감사하며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데, 하녀가 찾아왔다.
“모리스 핀들턴 경이 찾아오셨습니다.”
“핀들턴 경이? 이리로 모셔줘.”
하녀가 나가고 나서 접시 위의 아침 식사를 쓸어 넣듯이 먹어치운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로 향했다.
“마틴 레드우드.”
모리스 핀들턴의 기분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표정만 보면 비 오기 전에 무릎이 쑤시는 노인네의 표정을 꼭 빼다 박았다.
그리고, 오늘은 그 자랑스러운 워해머 대신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었다. 이유가 뭐지.
“엔더슨 하이빌의 일은 정말 안되었습니다.”
내 말에 모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녀석이 그동안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오늘 새벽 일찍 보고를 받았다. 폐하와 국가를 배신한 자의 말로다. 응당 참수형이겠지.”
그 말에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하지만 관계의 정이라는 게 또 쉽게 끊어지는 물건이 아니지 않습니까.”
모리스는 틀림없이 엔더슨과 오랜 시간을 함께했을 거다. 심지어, 엔더슨은 모리스를 꼬박꼬박 어르신이라고 불렀으니까. 두 사람의 관계는 내가 짐작하는 것 이상일 가능성이 있다.
내 말에 모리스가 대답했다.
“내 자랑스러운 전우 엔더슨 하이빌은 긍지 높고 자랑스러운 왕국의 기사였고, 전장에서 그 용맹함을 떨치던 무인이었다.”
말을 마친 모리스의 표정이 다시금 어두워진다.
“그놈은 참수형을 통해 죽은 게 아니야. 그 망할 새끼는,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고 다른 생각을 했을 때 죽은 거다.”
말을 마친 모리스는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주먹을 쥐었다. 잠시 그 상태로 테이블을 노려보던 모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내가 찾아온 이유는 너에게 신세 한탄을 하기 위함도 아니지. 금일 오전 입궐해서 폐하께 청을 드렸다. 조속히 만나보고 싶어 하시더군.”
그건 좋은 소식이다. 마침 오늘 딱 일정도 없으니까.
“오후에 마차 한 대가 저택 앞에 머물 것이다. 너는 몸을 씻고 복장을 단정히 하거라.”
“그리하겠습니다.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핀들턴 경.”
내 말에 녀석이 손을 휘휘 저은 다음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어젯밤에 너와 함께 싸운 여자가 있는 걸로 아는데. 네 시종이라지?”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클로에라고 합니다.”
내 말에 엔더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오거라.”
나는 그 말에 밖에 있는 하인을 불러 클로에를 데려오게 했다. 잠시 뒤 클로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머리가 아직 덜 마른 걸 보니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모양이군. 아주 그냥, 늦잠이 패시브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핀들턴 기사단장님.”
클로에의 말에 엔더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틴 레드우드, 자네도 일어나게.”
나는 그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바로, 모리스가 입을 열었다.
“급작스럽게 정해진 일이기 때문에 약식으로 진행하도록 하겠다. 하지만, 이 의식은 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것이 아님을 명심하고, 그대는 무릎을 꿇어 예를 표하라.”
말을 마친 모리스의 말에 클로에가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나, 왕실 기사단장 모리스 핀들턴은 파이크 왕국의 정당한 국왕이신 리트빈 슈타이어 2세의 명을 받들어 이 자리에 섰다.”
그 말을 들은 클로에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뭔지 대충 눈치를 챈 모양인데.
그리고 나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이해했다. 기사 서임식을 하는 거군.
절차는 약식이라고 모리스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정해진 절차에 따라 모리스가 대사를 읊고, 그 사이 클로에는 가만히 듣는다. 검이 클로에의 어깨 위에 살짝 올려진다.
“이 시간부로 클로에는 왕국의 기사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손을 내밀어라.”
말을 마친 모리스가 클로에의 손 위에 배지를 하나 올려주었다. 아, 한국에서도 저거 달고 다니는 친구들이 있었지.
국회의원. 싸움 잘하고 남들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높으신 분이라는 것까지 완벽하게 기사와 일치하네.
국회 선진화법 이후로 진짜 쌈박질은 못 하게 되었다지만, 뭐 싸움이 주먹다짐만 있는 건 아니잖아? 아가리 파이팅도 싸움이라면 싸움이지.
어쨌든, 약식 기사서임을 마친 다음 나는 모리스를 향해 한 마디 던졌다.
“기사로 인정 받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것 같지 않은데. 해주는 김에 저도 한 번 해주시죠.”
내 말에 모리스가 웃음을 터뜨리고 내 등을 한 번 퍽 쳤다.
“보통의 너절이가 그런 개소리를 떠들었으면 대가리를 터뜨렸을 거야!”
음, 지금 이 사람 나한테 농담하는 거 맞지? 왜 이렇게 등골이 서늘하냐.
“어명에 따르면, 오늘 이 자리, 이 시간에 기사가 되는 자는 이 아가씨 한 명뿐이라네. 그나저나, 앞으로는 아가씨가 아니라 성으로 불러야 할 텐데…….”
모리스의 말에 클로에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본디 어린 시절 고아가 되었기 때문에…… 성을 모릅니다.”
모리스가 그 말에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미안하군.”
단순히 이름 뒤에 경을 붙이는 건 좀 이상한 느낌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내가 짓지 뭐.”
내 말에 클로에가 네?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뭐, 기사 되었다고 시종 생활 접을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지?”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죠.”
“그럼 문제없잖아.”
시종의 성을 주인이 정해주는 게 흔치 않은 일은 아니라고 알고 있다. 내 말에 클로에가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성이라. 뭐라고 짓는 편이 좋을까. 남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도 아니고 성을 지어주는 건데 장난을 칠 수는 없겠지.
“로니세라.”
기억이 맞다면 인동덩굴이라는 뜻일 거다.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데요. 이상한 어감이었으면 뭐라고 하려고 했는데.”
“이름가지고 장난 안 쳐.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모리스가 검을 다시 칼집에 밀어 넣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다 달성한 것 같군. 돌아가 보도록 하겠네.”
말을 마친 모리스는 대충 손 인사를 건네고는 휘적휘적 문을 나섰다. 클로에는 모리스가 나간 문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이제 저는 뭘 하면 좋을까요. 주군.”
그 대답을 들은 나는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주군?”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앞으로도 계속 모셔야 하잖아요? 기사가 따르는 주인이 주군이지 그럼 뭐에요.”
나는 그 말에 눈을 질끈 감고 있다가 대답했다.
“그냥, 주군 말고 다른 건 없을까.”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글쎄요. 다른 분들은 데리고 다니는 호위기사가 주군이라고 불러도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던데.”
“그건 다른 녀석들이고.”
나는 귀에 주군이라는 단어가 때려 박히자마자 전두엽에 닭살이 돋아나는 기분이었어.
“앞으로는 로니세라 경이라고 불러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나는 그런 말을 하는 클로에를 바라보다가 한마디 했다.
“너 굉장히 기뻐 보인다?”
내 말에 클로에가 히죽 웃으며 모리스에게 받은 배지를 꺼내 가슴팍에 끼웠다.
“시장통에서 쓰레기를 주워 먹던 고아가 기사가 되고 성을 받았어요. 기분이 나쁘면 좀 머리가 이상한 사람 아닐까요.”
나는 그런 클로에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고는 어제 알버트를 통해 건네받은 서류를 보여주었다.
“……이건.”
클로에가 침을 삼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다음 나를 바라봤다.
“네가 거절한다고 해도 기사 서임이 취소되는 건 아니다. 넌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으니.”
클로에의 도움이 없었다면 엔더슨을 이길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강한 적이었으니까.
그녀가 이 서류에 쓰여 있는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클로에는 기사 서임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그래서 일부러 기사 서임이 끝나고 나서 이 서류를 보여준 거다.
이미 받은 기사서임을 취소할 수는 없으니까.
“…….”
서류를 다시 천천히 읽어본 클로에가 대답했다.
“조금,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러시든가.”
클로에는 서류를 챙겨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테이블 위에 다리를 올리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앞에 마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틴 레드우드 님을 태워야 한다고 말하는데, 누가 보낸 건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아, 온 모양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전해줘.”
말을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정문에 멈춰있는 마차에 탔다. 마차는 곧바로 왕궁으로 향했다.
신원 조사를 받고, 차고 있던 검을 내려놓고, 소지품 검사를 하는 식의 절차가 끝난 다음에야 나는 왕궁 안에서도 왕이 머무르는 본궁으로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왕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화려한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정확히 말하면, 허상이 그런 자세를 취했다. 그 사이 은신을 사용한 나는 왕의 얼굴과 몸을 훑었다.
나이가 많다. 얼굴에는 세월이 남기고 간 주름이 켜켜이 쌓여있고, 드문드문 검버섯이 보인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선명하다.
과장 조금 보태서 밤에 불을 다 꺼놓아도 저 눈만큼은 계속 빛나고 있지 않을까.
“너는 일어나 고개를 들어라.”
나는 그 말에 허상을 자리에서 일으키고, 허상을 지움과 동시에 은신을 풀었다.
“마틴 레드우드. 직접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습니다.”
말을 마치자, 왕이 먼저 자리에 가 앉으며 손짓을 했다.
“와서 앉으라.”
맞은 편에 자리를 잡고 앉자. 왕이 나를 천천히 살폈다.
“과인이 너에 대해서 이전에 들은 소문이 있다. 하지만, 요 근래 네가 보인 행동은 과인이 들은 소문과는 사뭇 다르구나.”
시녀가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옷 위에 달린 브로치는 왕도 주변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백작가의 문양이다. 아무리 적게 쳐줘도 백작가의 직계 여식 정도는 되어 보이는 여자다.
나보다 신분이 낮다고는 농담으로도 말할 수 없겠지. 시녀가 왕의 잔에 조심스럽게 차를 따른다.
“차를 대령했습니다, 국왕 폐하.”
“그래, 너도 한 잔 받거라.”
나는 그 말에 공손하게 양 손으로 시녀가 따라주는 차를 받았다.
“과인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지. 이유를 한번 들어보자.”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쿠르스트 산맥에 도움이 필요합니다.”
내 말에 왕이 하얗게 센 수염을 쓰다듬고는 대답했다.
“내가 알기로는 이미 쿠르스트 산맥 일대의 귀족들이 관문의 복구를 위해 많은 지원을 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렇습니다. 쿠르스트 산맥 일대의 귀족들은 관문의 보수를 위한 자재와 인력을 지원하고 있습니다만, 정작 인부를 먹일 식량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내 말에 국왕이 대답했다.
“그래, 언젠가는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 쿠르스트 산맥의 귀족들이 흉년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자에게 보낼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수확량을 속였지.”
나는 그 말에 움찔했다. 잠깐만, 뭐야 이 자식. 알고 있었어? 내가 멍한 표정을 짓자, 국왕이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