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은 국왕이 입을 열었다.
“과인은 이 나라 모든 백성의 어버이 되는 자고, 또한 이 나라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을 살피는 것이 과인의 의무일진데, 너는 어찌 그런 표정을 짓느냐?”
아니, 귀족들은 니가 전혀 모르는 걸로 알고 있던데. 사실, 방금까지 나도 그런 줄 알았고.
“세자의 성정이 폭급하여 귀족들이 그 아이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익히 알고 있지.”
말을 마친 국왕이 소파에 등을 기대며 대답했다.
“과인이 네 청을 들어준다면 왕국 내의 귀족들이 불만을 가질 것이다. 너는 이를 가라앉힐 만한 수단을 가지고 있느냐. 만약 없다면, 과인은 네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
단호한 한 마디.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있습니다.”
“바로 대답이 나오는군.”
나는 소매 안에서 서류를 꺼내 국왕에게 양손으로 내밀었다. 레온이 나에게 건네주었던 서류다.
“…….”
국왕은 천천히 그 서류를 살펴보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레드우드 가문에서 먼저 이 만큼의 식량 지원을 약속했다면 귀족들이 불만을 표시하기 힘들겠지.”
말을 마친 국왕은 서류를 다시 나에게 돌려주었다.
“준비를 했군.”
“할 수 있는 준비라면 해두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는 틀림이 없구나. 그래, 할 수 있는 준비라면 해두는 것이 좋으리.”
아무래도, 이 국왕은 자신이 죽고 난 다음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 정도면 스스로 레임덕을 자처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는 것 같다.
“쿠르스트 산맥 일대의 귀족들이 수확량을 속인 건 괘씸하지만, 국사를 논할 때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우는 건 암군이다. 이번 신년 행사에, 쿠르스트 산맥의 국경 수비대는 원하는 것을 얻으리.”
“성은이 망극합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곧바로 국왕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네가 여기를 찾아온 것은 그 이유 하나 때문이더냐.”
“사실, 개인적인 청 또한 있습니다.”
내 말에 국왕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너는 이 나라의 주인을 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네가 과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을 찾기보다 과인이 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들만을 찾는구나.”
국가가 당신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으십시오. 니가 무슨 존 F. 케네디냐?
“저 자신만을 위하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판단은 과인이 한다.”
나는 슬쩍 다시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이고는 대답했다.
“감사청에서 국가를 위해 봉사하기를 원합니다.”
내 말에 국왕이 찻잔으로 가져가던 손을 멈칫하고는 나를 바라봤다.
“과인은 네가 기사단에 자리를 원하는 줄 알았건만. 감사청이라?”
“기사단장들을 만나고 다녔던 이유는 기사단에 자리를 원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내 말에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인의 나라를 어지럽히는 녀석들의 수괴 중 하나인 엔더슨 하이빌을 찾아내기 위해서였지. 허나, 과인은 네가 단지 그것 이상의 것을 원하는 줄 알았다.”
말을 마친 국왕이 문을 향해 사람을 불렀고, 시녀가 들어왔다. 시녀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지시를 내린 국왕은, 하녀가 나가자 다시 나를 바라봤다.
“말해 보거라, 너는 감사청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첩보국이 국외의 정보 수집에 집중한다면, 감사청은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수상한 움직임을 찾아내고 예방하는 일에 중점을 두고 있다 알고 있습니다.”
물론 서로 간의 역할 경계가 명확한 편은 아니다. 첩보국에서 국내의 사람들을 조사할 때도 있다. 하지만, 감사청은 그러지 않는다. 오로지 국내의 일에만 집중한다. 내 말에 국왕이 희미하게 웃었다.
“밑그림은 대충 맞게 그렸도다. 첩보국과 감사청의 차이는 거기에서 비롯된다.”
차이라. 그저 담당하는 역할만 다른 게 아닌 모양이다.
“첩보국은 그 조직 안에 국장을 따로 두고 있지만, 감사청은 아니다. 감사청의 구성원들 위에는 따로 청장과 서열의 구분을 하지 않지. 그자들은 과인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아 행동한다.”
그 대답을 듣고 나서,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차이를 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말해 보거라.”
그렇게까지 어려운 질문은 아니다.
“첩보국이 임무를 수행하다 실수가 생기면 국가 간의 문제로 번질 수 있지만, 감사청의 임무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첩보국은 쉽게 말해 스파이다. 스파이를 보냈다가 걸리면 당연히 외교적으로 문제가 발생한다.
도마뱀의 꼬리 같은 거다.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이 국왕의 명령으로 인해 진행된 일이 아니라, 첩보국장이 독자적으로 벌인 일이라는 식으로 대응하겠지.
이후, 국왕은 첩보국장을 처벌해서 국가 간의 갈등을 해소한다. 하지만 감사청은 그럴 필요가 없다.
어차피 이 나라는 국왕의 것이고, 감사청이 독자적으로 국내를 조사하다가 걸린다고 해도 문제가 될 리 없으니, 당당하게 어명이라고 선언하면 된다.
“왕국의 감사청이 하는 일은 곧 과인의 뜻이다. 과인은 감사청에 소속된 자에게서 보고를 받지만, 그들의 행동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감사청은 왕의 명령을 받아 누군가를 조사하는 게 아니다. 자유롭게 조사하고 싶은 사람을 조사하고, 그 결과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을 경우 서류를 작성해 국왕에게 보고한다.
즉각적인 조치가 필요할 경우에는 먼저 적절한 조치를 취한 다음 국왕에게 보고한다.
“감사청의 권한은 첩보국만큼이나 크고, 때문에 사람을 가려 뽑는다.”
야 인마, 내 입으로 말하는 건 좀 그렇지만 그래도 내가 해놓은 일들이 있는데 설마 여기에서 퇴짜를 놓을 생각이냐?
“네 생각은 알았다. 허나, 과인은 너에게 따로 지시할 일이 있다.”
국왕의 말은 반론을 허락하지 않는다. 눈앞에 앉아있는 할아버지가 나한테 시킬 일이 있다고 하면 거기에서 구시렁거렸다가는 저잣거리에서 목이 탁 하고 날아갈 테니까.
“어명을 따릅니다.”
“강요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너는 들어보고 판단해라.”
그리고, 문 너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바마마, 세자가 왔습니다.”
“들어오거라.”
문이 열리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오는 남자를 향해 인사했다. 서른 중반 정도 되는 나이의 남자는, 눈빛이
“마틴 레드우드.”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나를 슥 훑어보고는 픽 웃었다.
“쿠르스트 산맥에서 큰일을 했다고 들었는데, 어려 보이는구나.”
이 자식아. 내가 지구에서는 너만 한 것들이 형이라고 부르면서 따랐어. 껍데기가 젊어서 그렇지 댁한테 어리다는 소리를 들을 나이는 아닌데.
“세자 저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앉거라.”
세자가 소파에 앉자, 왕이 나를 바라본다.
“너 또한 다시 자리에 앉아라.”
내가 맞은 편에 앉자. 세자가 입을 열었다.
“칠색 내각이라지?”
“그렇습니다.”
내 말에 세자가 혀를 한 번 찼다.
“그 자색이라고 하는 자식이 이름을 짓는 재주는 없는 모양이군.”
세자의 말에는 나도 격하게 공감한다. 어쩌면 친해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걸. 그나저나, 대화의 주제가 칠색 내각에 대한 내용일 줄은 몰랐는데.
“네 번이라고 들었다. 그 칠색 내각이라는 웃긴 이름의 조직에서 내 나라에 부리는 개수작을 막은 게.”
“재수가 좋았을 뿐입니다.”
내 말에 세자가 혀를 찼다.
“지랄. 이 사람아, 한 놈이 네 번씩이나 그토록 재수가 좋을 수 있다면 이 나라 왕조의 성을 바꿀 수도 있어.”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이 나를 쏘아본다. 그 시선을 받고 있던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제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세자 저하께서는, 소문과는 많이 다르신 분 같습니다.”
내 말에 조만간 목이라도 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녀석이 표정을 풀었다.
“댁 소문도 썩 정상은 아닌 것 같던데. 올가미 도련님.”
말을 마친 세자는 다소 시시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조금 무서워할 줄은 알았는데 말이야.”
첩보국의 정보는 굉장히 정확한 편이겠지만, 까놓고 말해서 세자에 대한 정보는 세간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첩보국이 세자 위에 있는 조직은 아니다.
세자가 자신을 감추려고 마음먹고 가면을 쓴다면, 첩보국에서는 그 가면을 벗길 도리가 없다.
“제가 담이 약간 큽니다.”
“새끼 이거.”
그렇게 중얼거린 세자는 느긋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아버지의 치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난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저절로 시선이 왕에게로 향했다. 대놓고 아들이 '내 아빠 조금 있으면 죽어.'라고 말하는데 그걸 듣는 아버지의 표정은 어떨까.
하지만, 내 걱정과는 다르게 왕의 표정은 굉장히 편안했다. 이야, 이래 봬도 왕족이다 그건가?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듣는 쪽도 아무렇지 않게 넘긴다.
“그리고, 그 칠색 의회인지 무지개 병신들인지 하는 것들은 아버지의 왕국을 어지럽히는 게 아니라 내 왕국을 어지럽히겠지.”
“……그 점은 사실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참수형이겠지만, 왕은 내가 보기에도 많이 노쇠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은 자신의 자리를 세자에게 내어 줄 생각인 모양이다.
그렇게 되면, 칠색 내각의 존재는 지금의 왕이 아니라, 내 눈앞에 앉아있는 세자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
“너는 나를 위해 일해줘야겠다. 감사청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지만, 네가 앞으로 해야 하는 일은 감사청과는 관련이 없을 것이다.”
“칠색 내각의 처리입니까?”
내 말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뭔가를 꺼내 들었다.
“태생부터 불온하기 짝이 없는 조직이다. 너는 어명을 받아 칠색 내각이라고 하는 녀석들의 뿌리를 뽑도록 해라.”
이건 세자와 내가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상황이군.
“칠색 내각을 뿌리 뽑는 데 성공한다면 네가 원하는 자리…… 아니지, 그 이상의 것을 너에게 내릴 것이다. 나는 유능한 인재를 도외시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건 뭐, 두고 봐야 알겠지. 세자가 서류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대답을 듣고 싶다. 마틴 레드우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은 채 서류를 받아들고 내용을 확인했다. 문제는 없어 보인다.
“명을 받듭니다.”
내 대답을 들은 세자가 나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흑단을 깎아 만든 통행증이었다. 통행증에는 금을 박아넣어 만든 세자의 인장과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통행증이다. 이 왕국 안에서는 어디를 가도 너를 막아서는 이가 없을 것이고, 외국에 나가도 쉽사리 너를 막아서지는 못하리.”
나는 그 통행증을 받아 넣었다. 영지에서 영지를 오가는 건 굉장히 성가신 일이다. 일반적으로 영지의 귀족들은 다른 귀족들이 초대도 없이 자신의 땅에 멋대로 들락날락하는 걸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내가 레드우드 영지를 떠나서 쿠르스트 산맥으로 향하거나, 쿠르스트 산맥에서 왕도로 향할 때도 클로에가 미리 일 처리를 해놓지 않았다면 해당 지역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귀족들에게서 이런저런 볼멘소리가 나왔겠지.
그런 의미에서, 완전한 자유 여행을 보장하는 이 통행증은 꽤 강력한 수단이다. 세자에 대해서 돌고 있는 소문을 고려한다면, 이 통행증을 내밀었을 때 시비를 거는 미친놈은 없을 테니까.
“내가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노력해라.”
세자에게서 통행증을 받자, 앉아서 이 광경을 보던 왕이 한마디 거든다.
“알겠습니다. 다만, 뭐 하나 여쭈어봐도 괜찮겠습니까.”
“듣고 있다.”
나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입을 열었다.
“폐하는 물론이고, 세자 저하까지 칠색 내각을 반드시 뿌리 뽑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엄밀하게 말해서, 왕 입장에서는 칠색 내각의 뿌리를 뽑을 필요까지는 없다. 그저, 이 나라에 칠색 내각이 개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하면 그걸로 족할 것이다.
실제로 첩보국장 알버트도 비슷한 포지션을 취했었지. 근데 세자는 그러고 싶지 않은 모양이고, 나로서는 그 이유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