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화
내 말에 세자가 대답했다.
“이는 어명이 아니라 내가 내리는 명령이다.”
말을 마친 세자는 자신의 손을 이리저리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 나라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는 기사단장이 그 망할 조직의 졸개로 밝혀졌다.”
세자는 인상을 팍 쓴 채로 말을 이었다.
“그대로 두고 볼 수야 없지. 한번 사람을 문 개새끼는 다시 사람을 무는 법이다. 그렇다면, 다시 물리기 전에 개새끼의 목을 따두어야지.”
일종의 예방 차원이라는 거다. 말을 마친 세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콧대 높은 베로나 제국 놈들은 언제나 꼴 보기 싫었거든. 적당한 빚을 지워두면 이후 국정을 운영하기 쉬워질 것이다.”
베로나 제국에도 칠색 내각의 사람들이 심어져 있다. 이 녀석들을 찾아내서 뿌리 뽑는 데 도움을 준다면, 제국 입장에서는 빚이 된다. 세자는 일단 그렇게 계산을 한 모양이다.
물론, 그걸 베로나 제국에서 빚으로 생각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어차피 그건 이 나라에서 외교를 담당하는 친구들이 해야 할 일이지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세자 저하의 뜻을 알았습니다. 삼가 받들겠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자, 세자가 돈주머니를 건네주었다.
“활동비라 생각해라.”
말을 마친 세자가 돌아가고, 왕이 나를 바라봤다.
“네가 청한 이야기를 승낙했고, 내 명 또한 네가 받아들였으니 이걸로 더 나눌 이야기는 없을 것 같구나. 돌아가 보도록.”
인사를 마친 나는 왕궁을 나와 저택으로 돌아갔다.
왕궁을 나선 나는 다시금 저택으로 돌아갔다. 방에 도착해서 읽던 책을 다시 펼치기가 무섭게 클로에가 방문을 두들겼다.
“말씀해주신 제안에 대해서 생각해봤는데요.”
목소리가 다소 기어들어 가고, 표정도 굉장히 애매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책으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더 생각해.”
“네?”
“표정과 목소리를 보니 스스로의 판단에 확신이 없는 모양인데, 아직 시간은 충분히 있어. 더 생각해보고, 후회하지 않겠다 싶을 때 답하라고.”
원래 모든 결정이 후회를 동반하기 마련이지만, 확신 없이 내린 결정이 가져다주는 후회는 확신을 가지고 내린 결정보다 몇 배는 큰 후회를 가져다준다.
내 말을 들은 클로에가 잠깐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결정은 뒤로 미루고, 일단 이것부터 확인해봐.”
말을 마친 나는 클로에에게 세자한테 받은 통행증을 보여주었다.
“이건.”
클로에가 놀란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봤다.
“세자 저하께서 칠색 내각을 어지간히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시는 모양이야.”
클로에가 통행증을 확인하며 대답했다.
“그 조직에 관련해서 따로 어명을 받으신 모양이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칠색 내각 찾아내서 조지라고 하는데.”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국장님에게도 전해두는 편이 좋겠네요.”
말을 마친 클로에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건 좋은 신호다. 나를 만나기 어려워하는 게 아니라 알버트에게 접촉하는 걸 부담스러워 한다는 뜻이니까.
방금 클로에를 제지하지 않고 그냥 있었다면 내가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을 수는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첩보국에 미련이 남은 상태로 나와 함께 일하는 건 내 입장에서는 썩 반가운 일이 아니다.
“말해둬도, 어차피 큰 협조를 바라기는 힘들 거야.”
레티시아가 칠색 내각의 사람 중 하나라는 걸 말했을 때도 영 반응이 미지근했으니까.
“그래도 아예 말하지 않는 것보다는 좋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지.”
사람을 풀어서 우리의 조사를 도울 가능성은 작지만, 그래도 이미 쌓아놓은 정보의 열람 정도는 충분히 협조해 줄 테니까. 그것만 해도 큰 도움이 된다.
예를 들면…….
“첩보국에게 베로나 제국 황녀의 시녀 레티시아 들롱에 대한 정보를 전부 달라고 요청해.”
이전에 알버트에게 말했을 때는 별로 도울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이제는 다르지. 공동 작업을 하지는 않아도 내가 요구하는 정보는 제공해 줄 것이다.
“아, 그리고.”
나는 세자가 건네주었던 돈주머니에서 1500론도 정도의 화폐를 덜어낸 다음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와, 추가수당인가요?”
“그럴 리가 있냐, 예산에 넣어놔. 로델린과 함께 외출할 생각이니 마차도 준비해주고.”
클로에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는 나를 바라봤다.
“동행해야 하나요?”
“그걸 뭘 물어봐. 당연히 따라붙어야지.”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해둘게요.”
내 대답을 들은 클로에가 인사를 하고 나갔다.
“조금 정리를 해 볼까.”
쿠르스트 국경 수비대 사령관의 요청은 달성했다.
요구했던 자리는 감사청이었지만, 오히려 세자가 제안한 역할이 내 입맛에는 더 맞을 것 같으니 잘 풀렸다.
왕도로 향했던 제일 중요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칠색 내각의 적색도 찾아내서 제거했다.
“하기로 한 일은 다 끝낸 것 같은데.”
문제는, 왕도로 가져왔던 일거리를 마무리 지은 만큼, 새로운 일거리가 들어왔다는 점이다.
“레티시아 들롱.”
베로나 제국 황녀를 꼭두각시처럼 부리는 여자.
“엔더슨과 같은 식으로 끝나지는 않겠지.”
그 여자는 그렇게 정리할 수가 없다. 애초에 이 나라보다 훨씬 큰 제국의 황녀를 자기 마음대로 부리는 여자니, 증거를 찾아낸다고 해도 그걸 통해서 레티시아가 처리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럼 뭐 별수 있나. 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책상 옆에 기대놓은 칼을 바라봤다.
“뛰어난 해커는 뛰어난 보안전문가가 될 수 있고, 훌륭한 지폐위조범은 훌륭한 위폐감별사가 될 수 있지.”
마찬가지로, 나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뛰어난 범죄자가 될 수 있다.
엔더슨을 처리할 때도 그랬지만, 레티시아의 처리는 아무래도 불법의 영역에 조금 더 깊게 발을 내디뎌야 할 것 같다.
다만, 지금 죽일 수는 없다. 엄밀히 말하면 죽일 수는 있는데.
“뒷감당할 수가 없지.”
외국의 황녀가 곁에 끼고 도는 시녀가 외국에서 덜컥 죽어버리면 그 사인이 뭐건 상관없이 파이크 왕국은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그 대가로 베로나 제국에서 뭘 요구할지 알 수 없다.
“까놓고 말해서 날 보면 알 수 있잖아.”
같이 뱃놀이 갔던 후작가 둘째 녀석이 사고로 인해 나와 같이 물에 빠졌을 뿐인데 그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쿠르스트 산맥으로 향해야 했다.
하물며 같은 나라 안의 후작과 백작 사이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제국과 왕국 사이라고 하면 내가 경험해야 했던 황당한 유배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무언가를 베로나 제국에서 파이크 왕국에게 요구할 수도 있다.
“많이 위험해지더라도…….”
이 나라 안에서는 죽일 수 없다. 레티시아 들롱이 신년 행사를 마치고 무사히 돌아가게 된다면 황녀의 시녀답게 베로나 제국의 황궁에서 지낼 것이다.
그리고, 황궁에 몰래 잡입하는 일은 굉장히 어렵겠지. 하지만 최소한, 그 책임의 불똥이 이 나라에 튀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레티시아 들롱은 무조건 제국으로 돌아간 다음 죽어야 한다.
“신년 행사까지는 여유롭겠네.”
내일 하루 더 황녀의 졸개 역할을 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바로 신년 행사가 시작된다.
레티시아 들롱을 나중에 처리하기로 결정했으니,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한 번 켜고는 시간을 확인한 다음 로델린이 머무르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외출했다가 돌아왔다고 들었다.”
로델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밖에 볼일이 있어서요.”
내 말에 로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내가 나가서 뭘 하고 돌아왔는지는 물어볼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베로나 제국 황녀의 호위를 하게 되었다고 들었는데, 많이 피곤하겠구나.”
“괜찮아요. 그래봤자 그냥 얌전히 뒤를 쫓아다니는 게 전부인걸요.”
내 말에 로델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하니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만.”
“어머니는, 모임에 갔다가 돌아오셨다고 들었는데요.”
그냥 심심해서 계모임 아주머니들을 만나 고스톱 치는 식의 만남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 간만에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구나. 그래도, 신년 행사가 시작되면 너에게 소개해 줄 사람들이 조금 생겨서 참 다행이야.”
봐, 고스톱 치려고 만난 게 아니지.
“감사합니다.”
로델린은 레드우드 백작가에서는 좀처럼 밖에 나갈 기회가 없던 사람이다. 나를 낳은 나이대를 생각해보면 사실상 10대 후반에 시집을 간 거다.
그 이후로는 레드우드 백작가에 머무르며 그다지 사람을 만날 일이 없었겠지. 그러다가 이제 와 갑자기 다른 귀족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부담이 안 될 리가 있나.
“고맙기는 뭘. 그래서, 오늘은 또 무슨 일 때문에 찾아온 거니?”
저렇게 말하면 약간 죄책감이 들기는 한다. 뭐라고 해야 하나.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찾아간 소년이 아마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냥 찾아온 거예요. 오늘 하루는 조금 여유가 있어서.”
내 말에 로델린이 잠깐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도 한 잔 먹겠니?”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은 다음 대답했다.
“그 뭐냐, 사실은 이번에 의외의 보수를 조금 받아서 여유가 좀 생겼거든요.”
엔더슨을 잡은 대가로 첩보국에서 주기로 한 보수, 거기에 더해서 세자가 건네준 돈주머니. 마지막으로 나름대로 아껴 사용한 덕분에 쿠르스트 산맥에서 받았던 보상금도 좀 남아있다.
그걸 다 합치면 제법 돈이 된다.
“선물이라도 하나 해드리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내 말에 로델린이 잠깐 흠칫하고는 이내 대답했다.
“나는 괜찮다. 수도에서 생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돈 나갈 곳이 많을 텐데. 더 중요한 곳에 쓰렴.”
로델린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필요한 돈은 이미 따로 편성을 끝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아무리 그래도…….”
로델린의 말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물을 사서 드릴까도 생각해봤는데, 기왕이면 같이 고르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찾아온 거예요.”
내가 알고 있기로는 로델린도 지금부터는 딱히 일정이 없다. 내일부터 다시 황녀의 졸개 노릇을 하고, 이후 신년 행사에 참석하는 일정을 고려해보면 오늘 말고는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다.
“가시죠. 겸사겸사 저녁도 밖에서 먹으면 될 것 같은데.”
내 말에 로델린이 여전히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어머니잖아요.”
내 말에 로델린이 대답했다.
“어머니라고 모두 자식에게 봉양 받을 자격이 있는 건 아니잖니.”
“그 말에는 동의해요. 하지만 그 판단은 부모가 아니라 자식이 하는 게 아닐까요.”
잘 찾아보면 세상에 미친 부모는 얼마든지 있다. 내가 받게 된 의뢰 중에도 그런 부모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내 새끼가 자신이 외국으로 출장 나간 사이 뭐 하고 다니는지 거의 30초 단위로 파악해서 서류로 작성해 보내 달라는 식의 의뢰를 했던 부모가 있다.
그 의뢰를 수행하는 동안에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었지. 단순히 자식에 대한 애정이라는 단어로 웃으며 넘기기에는 좀 심각한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이런 대접을 받으실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내 말을 들은 로델린이 살짝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다. 외출 준비를 하고 나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련.”
나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로델린은 약 30분 정도 뒤에 문을 나섰다.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있었다. 아무래도 나를 내보내고 나서 울었던 모양이다.
나름대로 신경 써서 지운다고 지운 모양이지만, 내가 로델린이 신경 써서 흔적을 지웠다고 해서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둔한 녀석은 아니라서.
하지만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 사람 화나게 하는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잘 먹히는 마법의 질문이 두 개 있거든.
삐졌냐? 라는 질문과 울었냐? 라는 질문.
“이리로.”
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로델린을 마차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