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화
연회장의 문이 열리고, 사람을 안내하던 중년이 큰 소리로 왕족들이 왔다는 사실을 알렸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인다.
“그대들은 머리를 들라.”
자리에 앉은 왕의 말과 함께 모두가 허리를 세운다. 왕은 입에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대대로 이어지던 신년 행사가 오늘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일주일 동안은 지난 한 해에 있었던 힘든 시간들을 세월에 흘려보내는 시간이니. 그대들은 궁 안에서 편히 쉬다 갈 수 있도록 하라.”
국왕의 말 자체는 간단했다. 고개를 들어 올린 나는 마련된 테이블에 서 있는 사람들을 확인했다.
이미 한 번 얼굴을 봤던 왕과 세자 말고도, 오늘 처음 보는 왕비는 물론이고, 세 명 정도 되어 보이는 첩은 물론이고, 세자를 빼고도 네 명은 되어 보이는 왕족들이 눈에 보인다.
저게 다 세자의 형제자매들이겠지.
그것참,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는데 왕이 젊을 적에는 기가 막히게 정력이 넘쳤던 모양이군. 세자가 자기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신경 쓸 일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어.
왕이 말을 마친 다음, 베로나 제국의 황녀 올리비에를 향해 뭐라고 말을 했다. 곧이어, 올리비에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파이크 왕국의 전통 깊은 신년 행사를 두 눈으로 볼 수 있어 정말로 기쁩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베로나 제국과 파이크 왕국 사이의 관계가 더욱더 공고해지기를 바랍니다.”
간단한 이야기였다. 자리에 앉은 올리비에가 곧바로 옆에 앉아있는 레티시아에게 뭔가를 물어보는 광경이 보인다. 아마, 지금 자기가 한 말에 큰 문제가 없는 건지 레티시아를 통해 확인하는 거겠지. 레티시아가 뭐라고 대답을 하자, 그제야 올리비에의 표정이 편해졌다.
완전 잡혀 사는군.
연회는 기본적으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면서 중앙의 공터에서 벌어지는 공연을 보게 된다.
광대들이 서커스를 하거나 무희들이 춤을 추는 식이다. 현대로 말하자면 TV 보면서 술 마시는 거랑 비슷하지 않을까.
“아니, 내가 고자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에잇 고자라니! 내가, 내가 고자라니!”
“…….”
광대들이 나와서 연기를 하는데, 되게 익숙한 느낌의 대사가 나왔다. 볼거리가 끝나고 나면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기 마련이고, 그때부터는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니게 된다.
물론,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아직 술을 마실 나이가 되지 않았다는 핑계도 있고, 지금 내가 술 먹고 해롱거릴 만한 상황도 아니었으니까.
“마틴 레드우드! 이리로 와라!”
어느 정도 술을 마신 세자가 나를 보고 키들거리면서 의자를 탁탁 내려친다.
“세자 저하, 어찌 제가 감히…….”
내 말에 세자가 으응? 하는 소리를 내고는 히죽거린다.
“그럼 내가 내려갈까?”
“…….”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왕이 웃음을 터뜨리고는 말했다.
“연회에서 예의에 지나치게 묶일 필요는 없다. 너는 세자의 말을 들어라. 아무리 그래도 세자가 내려갈 수는 없지 않겠느냐?”
나는 왕의 허락을 받고 세자의 옆자리에 앉았다.
“세자 저하, 제가 보기에는 전혀 취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세자가 히죽 웃으며 술잔을 몇 번 흔들었다.
“야, 이까짓 썩힌 포도즙 몇 잔 마셨다고 취해서야 쓰나.”
썩힌 포도즙이라, 완전히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와인 좋아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상당히 빡치겠는걸.
“또 보게 되는군요.”
근처에 앉아있던 레티시아 들롱이 먼저 아는 척을 하고, 옆에 앉아있던 올리비에가 슬쩍 아는 척을 한다.
“올리비에 황녀 저하, 요 며칠간 모시게 되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레티시아는 깔끔하게 무시하고, 나는 올리비에에게 인사를 올렸다. 내 말에 그녀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레티시아를 슬쩍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티시아 들롱 양도 좋은 시간 되시길 빕니다.”
“그래야겠죠. 모처럼 온 길이니. 사실, 기대를 아주 많이 하고 있거든요.”
저 여자의 말이 곱게 들리지 않는 건 내 기분 탓은 아닐 거다. 뭔가, 따로 준비한 게 있는 모양인데.
비워놓은 저택에 무슨 짓을 해둔 걸까? 그렇다면 알버트와 엘렌의 도움을 받아서 신년 행사가 끝난 다음 저택을 한번 싹 스캔하면 될 일이다.
고작 그런 어설픈 계획을 세우고는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지는 않겠지.
“자, 기분이라도 내야지. 한 잔 받으라고!”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보고 있던 세자가 웃음을 터뜨리며 나를 향해 슥 하고 잔을 밀었다.
“세자 저하, 저는 술 마실 나이가 아직…….”
내 말에 녀석이 턱짓을 했다.
“그냥 물이야. 기분이라도 내라고 했잖나.”
잔을 들어 확인해 본 나는 정말로 잔 안에 차 있는 액체가 물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내용물을 비웠다.
“죄송하지만, 기왕 기분 내는 김에 안주도 좀 먹어도 됩니까?”
내 말에 세자가 허, 하는 소리를 내고는 음식이 담긴 접시를 내 쪽으로 슥 밀어주었다.
“감사합니다.”
내가 세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다른 귀족들 사이에서 오가는 눈빛이 범상치 않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나와 세자 사이의 관계가 퍽 친밀해 보였으니까.
사실, 안 친한 것도 아니지. 서로 이해관계가 맞고, 해줘야 할 일과 받아야 할 것이 있다면 어제 만난 사람도 10년 만난 사람처럼 친한 척할 수 있는 법이잖아.
“그리고 그 누구냐. 맞아. 클로에 로니세라!”
그 외침에 음식을 먹고 있던 클로에가 커허헙, 하는 기괴한 소리를 낸 다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네도 와서 한 잔 받게!”
곧바로 테이블에서 튀어 나간 클로에가 옷에 손을 문질러 닦은 다음, 세자가 내민 잔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기사 서임을 축하하네. 앞으로도 조국을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쭉 비워!”
잔을 비운 클로에가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어디, 그다음은.”
말을 마친 세자는 아래의 테이블을 슥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왕궁 마법사 엘렌 리버플로우, 자네도 한 잔 받게나!”
세자로부터 술을 받은 사람은 이걸로 세 명이다. 그리고, 이 세 명의 공통점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이 자리에 없을 것이다. 엔더슨 하이빌을 구속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이다.
엘렌이 세자로부터 잔을 받아 마시고 나자 세자는 고개를 돌려 레티시아 들롱을 보며 히죽 웃었다.
“레티시아 들롱 양, 이 세 명이 왕국을 위해서 큰 공을 세웠어. 알고 있나?”
레티시아가 세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검은사자 기사단장인 엔더슨 하이빌이 수상한 꿍꿍이를 품고 있었다지요.”
세자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지금 술을 내린 세 명이 그 행위를 적발해 체포했지. 왕국의 기사단장이 불순한 의도를 가졌다는 건 슬픈 일이지만…….”
말을 마친 세자가 잔을 쿵 하고 내려놓은 다음 히죽 웃었다.
“아버지의 나라이자, 내 나라가 될 이 파이크 왕국은 수상한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너절한 녀석들에게 무너질 정도로 나약하지 않다는 반증이야. 나는 이 세 명이 참으로 자랑스럽다네.”
세자가 레티시아에게 저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안다. 이미 레티시아가 수상하다는 이야기는 알버트에게 했다. 그리고 그 보고는 자연스럽게 국왕과 세자의 귀로 들어갔겠지.
지금 세자는 엄포를 놓는 거다. 이 이상 개수작을 부릴 생각은 하지 말라고.
“너무나도 감탄스러운 이야기라서 몇 번이고 소문을 다시 확인해야 했습니다. 공고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파이크 왕국이 이토록 건실한 것 또한 제국의 흥복이겠지요.”
레티시아와 세자가 한동안 서로를 응시한다. 그리고, 옆에 앉아있는 황녀 올리비에는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그리 말해주니 나 또한 기쁘군. 이렇게 젊고 뛰어난 인재들이 왕국에 함께하니, 든든하기 그지없어.”
세자는 느긋한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레티시아에게 말했다.
“바쁘지 않으면 한 잔 따라 줄 수 있겠나.”
레티시아가 잔에 술을 따라주자, 세자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는 잔을 살짝 엎질렀다. 넘친 포도주가 레티시아가 끼고 있는 장갑을 적셨다.
“이런, 미안하네.”
세자는 푸후, 하는 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여봐라, 새 장갑을 하나 가져와라!”
“……괜찮습니다.”
레티시아의 말에 세자가 고개를 저었다.
“제국에서 오신 귀한 손님에게 실수를 저질렀으니, 응당 새 장갑 정도는 드려야지. 잠시만 기다리게.”
하얀 실크로 짜올린, 꽤 고급품으로 보이는 하얀 장갑 한 짝이 쟁반 위에 올려진 채 레티시아에게 내밀어졌다.
“…….”
“자, 손에 껴보도록.”
레티시아는 잠깐 그 쟁반을 바라보다가 장갑을 벗고 새 장갑을 꼈다. 그 잠깐 사이, 나는 그녀의 손등에 박혀 있는 연결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거, 너무 취하다 보니 손님 앞에서 실수를 다 하는군. 잠시 바람을 쐐야겠어.”
세자는 짐짓 비틀거리는 척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어차피 연회에서 술을 마실 게 아니라면 바람 쐬는 동안 내 말 상대라도 해달라고.”
“기쁘게 명을 받듭니다, 세자 저하.”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세자와 함께 문을 나섰다. 정원에 도착한 나는 주변을 살폈다.
“겨울바람이 차군.”
세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정원의 나무에 기댔다.
“주변에 듣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자는 건조한 표정으로 팔을 꼰 채 입을 열었다.
“그년의 손등 확인했나?”
“그렇습니다. 레티시아 들롱은 로티샤 호수에서 붉은 가지를 훔치려 했던 것이 확실합니다.”
모든 것이 일치한다. 세자가 내 표정을 한번 훑어본다.
“그런 거치고는 별로 기뻐하지 않는군.”
나는 세자의 말에 로티샤 호수에서 파악해 두었던 수상한 마법사의 특징에 대해 말했다.
“이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지만, 레티시아는 제가 예상하던 모습과 놀랍도록 일치합니다.”
“그래. 마치 전혀 숨길 생각이 없는 것처럼.”
나는 세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마음에 걸리는 건 그거다. 왜 전혀 숨기지 않는 거지? 염색을 할 수는 없다고 해도, 사용한 화장품이나, 헤어스타일 정도는 속일 수 있었을 텐데.
“그나마 손등의 연결점을 보여줄 때는 약간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고민도 오래 가지 않았다. 그녀가 로티샤 호수를 습격한 사람이라는 걸 확정 지을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증거였는데. 정말 잠깐의 고민 끝에 레티시아는 장갑을 벗었다.
“노림수가 있습니다.”
“그걸 내가 몰라서 쉰내 나는 남자랑 같이 정원에서 밀담을 나누는 줄 아나?”
“저도 서른 넘은 세자 저하와 정원에서 속닥거리는 상황이 썩 달갑지는 않습니다.”
나만 쉰내 나는 줄 아냐, 너도 쉰내 나 인마. 내 말에 황자가 기가 막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자네 이제 보니 아주 목숨을 내놓고 다니는 성격이군그래.”
“설마 저 교수형 당합니까?”
내 말에 세자가 손을 휘휘 저었다.
“잡담은 거기까지 하고. 노림수가 뭐라고 생각하나?”
나는 그 말에 턱을 감싼 채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왕도에서는 별다른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레티시아가 이렇게까지 행동한다는 건 우리의 시선을 왕도에 붙잡아 두고 싶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