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88화 (88/275)

088화

말을 흐리며 잠깐 고민하던 로델린이 입을 열었다.

“연회나 무도회와는 다르게, 검투 대회나 토너먼트 같은 건 다들 관람에 집중해서 딱히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없단다.”

아하, 쉽게 말해서 영양가가 전혀 없는 행사라는 거군.

“그럼 저도 내일은 쉴까 하는데요.”

내가 남들 싸우는 걸 구경하는 건 그다지 흥미가 없어서. 뭐, 소설 같은 거 보면 토너먼트나 검투 대회 나가서 우승하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꽤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필요에 의해서 싸우는 게 아니라 보여주기 위해서 싸우는 일은 그리 반기지 않는다. 뭐라고 해야 하나, 약간 광대놀음 같다고 해야 하나. 내가 이만큼 대단하다는 걸 남들에게 자랑해서 얻게 되는 것도 분명히 있기야 하겠지만, 별로 내키지 않는다.

애초에, 나이를 이 만큼 먹고도 스스로를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그럼, 내일 일정은 휴식으로 알고 있을게요.”

클로에가 수첩을 꺼내 일정을 적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이렇게 마무리되는 모양이다. 내일은 책도 좀 읽고, 클로에 도움을 받아서 검 연습도 해야지. 일종의 개인 정비 같은 거다.

“주무세요.”

왕궁에 마련된 숙소 앞에 도착한 우리는 먼저 로델린을 배웅해주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래. 애썼다.”

클로에와 헤어진 다음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서 몸을 씻고, 눈을 감은 채 늦게까지 마력을 모았다. 어차피 내일은 쉴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다음 날이 밝았다.

오늘은 개인 정비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로델린이 꼭 가지 않아도 괜찮은 행사라고 했으니까.

그녀가 나에게 엿을 먹이고 싶어서 거짓말을 한 건 아닐 것이다. 사실, 이건 로델린 잘못이 아니지.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재빠르게 씻은 다음, 아침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허겁지겁 경기장으로 향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 모래밭 위에서 두 사형수 친구가 서로를 죽이기 위해 무기를 들고 휘두르는 꼴을 보는 중이다.

“…….”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검투사가 들고 있던 거대한 철퇴가 상대의 뚝배기를 박살 낸다.

거리가 제법 멀어서 뼈가 아작나는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박살 나는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철퇴를 맞은 친구 머리에서 어떤 소리가 났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환청이 들리다니, 이게 공감각이라고 부르는 건가?

“이기셨네요.”

근처에 앉아있던 레티시아가 히죽 웃으면서 내 쪽으로 론도가 담긴 주머니를 내밀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돈주머니를 받아들고 던진 내 대답에 레티시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가요? 이번에는 누가 이길지, 알겠어요?”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검투사들의 모습을 먼눈으로 살피던 나는 어렵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글쎄요, 이번에는 잘 모르겠네요.”

나를 이 자리로 끌어들인 건 공식적으로는 제국 황녀의 요청이었다. 당연하지만, 실제로 나를 여기로 끌어들인 건 지금 나와 돈 내기를 하고 있는 레티시아다. 나를 불렀다고 하는 황녀는 그저 레티시아의 옆에 딱 붙어 앉은 채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어머, 그러지 말고 한번 짐작이라도 해보세요.”

모르겠다고 했잖아 이년아.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잠깐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레티시아 들롱 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 말에 레티시아가 으음, 하는 소리를 내고 눈을 가늘게 뜬 채 검투사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방패와 검을 든 검투사가 이길 것 같네요. 이유를 말씀드릴까요?”

별로 듣고 싶지 않은데. 나는 입을 다물었지만, 레티시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입을 연다.

“상대는 그냥 콜로세움에 소속된 검투사지만, 제가 이긴다고 생각한 검투사는 파이크 왕국 왕도에서 잘나가는 상인의 소유라고 들었어요.”

“잘 먹고, 잘 훈련받았겠군요.”

내 말에 레티시아가 히죽 웃었다.

“그것도 있지만, 배경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죠. 제아무리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결국 조직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잖아요.”

하고자 하는 말을 어쩐지 알 것 같은데.

“지금 당장 한 번 상대가 이길 수는 있겠지만…… 결국 그 검투사는 왕도에서 잘나가는 상인의 미움을 받게 될 거에요. 결국, 이 검투에서는 이겨도 결과적으로는 패배한 거죠.”

레티시아는 말을 마치고 나서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슬프지 않아요? 이겨도 지고, 지면 끝장인 싸움이라니.”

슬프다면서 웃고 있는 걸 보니 오늘 아침 팬케이크에 코카인이라도 뿌려 먹은 모양이구나.

그리고 지금 저 망할 년은 검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나는 레티시아의 말을 듣고 나서 활짝 웃었다.

“듣고 보니 레티시아 들롱 양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점 찍으신 검투사가 이기겠네요.”

내 말에 레티시아의 표정이 약간 애매하게 변했다. 왜, 이런 식으로 도발하면 내가 뭐라도 말할 줄 알았냐? 애도 아니고.

저런 도발에 발끈해서 뭐라고 쏘아붙이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다.

‘나는 뒤에 든든한 빽이 있고, 너는 없다. 그러니 너는 결국 이겨도 지게 될 것이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알아서 생각하라지.

계획을 세우고 적절한 순간에 꺼내서 찌른다면 젓가락도 흉기가 되는 법이다.

고로, 내가 가진 칼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자랑할 필요는 없다. 그저, 필요한 순간에 꺼내서 찔러 숨통을 끊으면 된다.

“아, 경기가 시작되는군요.”

나는 말을 마친 다음, 입을 다물고 검투 경기를 바라보는 척한다.

“사람이 죽는데, 그걸 보는 사람들은 즐거워하네요.”

갑자기 입을 다물고 있던 올리비에 황녀가 슬픈 표정을 짓고 검투장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저 모래밭에서 싸우는 사람들은 살아남고 싶어서 최선을 다하고 있죠. 그렇지만, 결국 저 모래밭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처절한 투쟁이 단지 눈요깃거리일 뿐이에요.”

말하는 와중 올리비에의 얼굴에서 안타까움이 절절히 묻어난다.

“황녀 저하, 방금 검투 경기 때는 아무 말씀 없으셨잖아요.”

레티시아의 말에 황녀가 움찔하고는 작게 대답했다.

“그 경기는…… 사형수들 간의 대결이었잖아요. 둘 다 죽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는데, 하나라도 살 수 있다면 다행이 아닐까요?”

둘이 죽을 걸 하나만 죽었으니까.

“황녀 저하의 말씀에 저도 동감합니다.”

내 옆에 앉아있던 로델린의 말에 황녀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레티시아가 손을 뻗어 황녀의 손을 잡으며 로델린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저자들은 검투사지요. 검투사는 목숨을 걸고 싸우면서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걸 업으로 삼죠. 우리 모두 각자의 역할이 있답니다. 그걸 충실하게 수행하는 건 의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황녀 저하?”

레티시아의 말에 올리비에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죄송…… 아니,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그 대화를 들은 로델린이 살짝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로델린은 황녀와 레티시아 사이의 기묘한 관계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을 테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음료 한 잔 드릴까요, 어머니?’

“그래 주겠니?”

로델린이 음료를 받아 한 잔 마시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색이 별로 안 좋은 걸 보니 역시 피가 쏟아지고 내장이 굴러다니는 검투 경기는 그녀의 취향이 아닌 모양이다.

“저는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내 말에 레티시아가 어머,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조금 더 보다 가지 그래요?”

나는 그 말에 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검투나 토너먼트는 별로 취향이 아니라서.”

그래도 베로나 제국 황녀의 요청이라는 타이틀을 챙겨서 나에게 요청 같은 강요를 해서 지금까지 머무르고 있었던 거다. 이 정도 머물렀으면 예의는 다 차렸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실제로는 황녀가 요청한 게 아니라 네년이 요청한 거잖아. 이쯤 장단 맞춰 줬으면 슬슬 꺼져.

“아, 저기. 조금만 더 보다 가면 좋을 것 같은데.”

슬슬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올리비에 황녀가 나와 로델린을 보며 그런 말을 건넸다. 저런 대사를 던지고 나서 레티시아의 눈치를 보는 꼴을 보니, 아무래도 레티시아가 어떤 신호를 보낸 모양이다.

공식적으로만 황녀의 요청이었을 뿐인 부탁과, 직접 황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제안은 그 무게 자체가 다르다. 레티시아가 황녀의 말을 듣고는 활짝 웃었다.

“올리비에 황녀 저하께서도 머무르다 가라고 하시는데. 조금 더 있다 가는 편이 어떨까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가만히 앉아있던 로델린이 갑자기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놀란 표정으로 로델린을 살폈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미안하다…… 익숙치 않은 잔인한 광경을 계속 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로델린은 손수건으로 입가를 훔치면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레티시아와 올리비에를 향해 연신 사과한다.

“황녀 저하, 그리고 레티시아 들롱 양. 어머니가 상태가 안 좋으셔서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클로에, 돌아가자.”

나는 말을 끝내고 나서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황급하게 로델린을 부축해 자리를 빠져나왔다.

“레드우드 부인, 괜찮으세요? 의사에게 연락을 해야…….”

클로에가 당황한 표정으로 로델린을 확인한다. 로델린은 별다른 말 없이 약간 걸음을 비틀거리면서 서둘러 경기장을 나왔다.

“어때, 조금은 도움이 되었지 싶은데. 예전에도 별로 오래 머무르고 싶지 않은 자리가 지속되면 가끔 이러곤 했단다.”

마침내 경기장을 벗어나자 안색을 싹 고치고 로델린이 던진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거짓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코앞에서 시체를 봤을 때도 안색이 변했을지언정 토하지는 않았었다. 그런 점을 고려해보면 로델린이 그 자리에서 헛구역질을 할 이유는 없다. 물론, 그것 말고도 천천히 살펴봤다면 로델린이 정말로 구역질이 올라와서 그랬던 게 아니라는 건 눈치챌 수 있었겠지.

그저, 내가 그 자리를 나가고 싶어 하는 것 같은 눈치길래 로델린이 도와줬을 뿐이다.

“다행이구나.”

말을 마친 로델린이 살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클로에가 멍하니 나와 로델린을 번갈아 보다가 손을 들어 스스로의 눈가를 비비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바보가 된 느낌이에요.”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로델린의 연기는 훌륭했다. 심지어 나도 속아 넘어갈 뻔했다.

“너는 그 시녀가 불편한 모양이더구나. 그렇지?”

로델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엔더슨 하이빌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내 말에 로델린이 잠깐 움찔하고는 대답했다.

“제국의 시녀가 왕국의 기사단장과 관련이 있다니.”

그렇게 중얼거린 로델린이 잠깐 나를 복잡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기껏 쿠르스트 산맥을 나와서는 또다시 위험한 일에 뛰어드는구나.”

“정확히 말하면…… 위험한 일이 자꾸 저한테 다가오는 거예요.”

나도 그냥 편하게 지낼 수 있으면 그러고 싶다. 내가 무슨 전쟁 후 PTSD를 겪는 군인도 아니고, 위험과 스릴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것도 아니다.

“어떻게 설명드리는 편이 좋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막 이야기를 하려는 순간 로델린이 손을 살짝 저었다.

“일일이 말해 줄 필요 없단다. 네가 잘 해낼 거라고 믿는다. 그저, 모자란 어미가 네 일에 방해나 되지 않을까 그게 걱정이구나.”

그 모자란 어미가 방금 전에 검투장에서 나가고 싶어 미칠 것 같던 나를 거기에서 꺼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로델린이 너무 자기 가치를 깎아내리는 게 아닐까 싶군.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간단하고 훈훈한 대화를 나누며 나는 왕궁 안에 마련된 숙소로 어머니를 안내하고,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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