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화
로델린을 위해 맞췄던 드레스는 무사히 오늘 아침 일찍 받아 볼 수 있었다.
“어때, 좀 괜찮아 보이니?’
로델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무도회에서 괜찮은 남자 하나 잡아서 시집을 새로 가게 되더라도 별로 놀랍지 않겠는데. 이리저리 드레스를 살펴보던 로델린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나저나, 정말로 그 가면을 쓸 생각이니?”
로델린의 말에 나는 내 손에 들려 있는 양반탈을 바라봤다.
원래는 그냥 붕대로 둘둘 말아서 얼굴을 가릴 생각이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귀족의 체면과 예의라는 물건이 발목을 잡아 결국 가면을 하나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생각이에요.”
이상한가? 이 탈이랑 비슷한 걸 쓰고 손에 든 쇠 퉁소로 일제 앞잡이 때려잡는 드라마도 있던데 뭐. 어차피 얼굴을 가리는 게 목적이잖아. 계속 쓰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오늘 한나절만 쓰는 건데 뭐 어때.
애초에, 얼굴을 금속 쪼가리나 나무 쪼가리로 가린다고 상대를 못 알아보는 건 좀 이상한 거다. 그냥 모르는 척해주자는 것에 의미가 있는 거지.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각자 준비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우리는 마련된 무도회장으로 향했다. 가면무도회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모두가 모두에게 반존대를 쓴다.
이 안에 가면을 쓴 사람 중에는 왕족도 있을 테고, 당연히 국왕이나 세자도 있을 거다.
“저기 있네.”
올빼미 모양의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이 세자다. 그리고 저쪽에 있는 금테를 두른 마스크를 쓴 여자는 왕비다. 이건 모르는 척 연기하는 게 더 어려울 것 같은데.
음악이 흘러나오고, 춤을 출 사람들은 중앙에 마련된 거대한 공간으로 나간다. 쉬는 사람들을 위해 중앙의 거대한 공터를 제외하고는 테이블 위에 음식이나 마실 거리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기왕에 온 무도회니 즐겁게 즐기시길 바라요.”
로델린이 곧바로 나에게 인사를 하며 반존대를 썼다. 이제부터는 서로 모르는 척 넘어가 주자는 거겠지.
“부인도 즐거운 시간 되셨으면 좋겠어요.”
내가 인사를 하자 로델린이 내 인사를 받아준 다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나는 잠깐 사람들이 춤추는 모습을 바라보며 음료수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지.”
로델린과 헤어진 이후로 두 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춤을 추는 사람들은 전혀 줄지 않는다. 지친 사람이 마련된 장소에서 물러나면,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 그 공간을 채운다.
“춤은 별로 안 좋아하시나 보죠?”
다가온 여자는 고양이를 닮은 검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잠깐, 이건 누구지? 나는 가면을 쓴 채로 앞에 서 있는 여자를 살펴봤다. 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데.
“쓸데없이 땀 빼는 걸 별로 즐기지는 않다 보니까요.”
이런 무도회가 재미있겠냐. 빨리 불 끄고 레이저 조명이랑 DJ 부스 마련해봐. 그럼 조금 더 내가 알고 있는 현대적인 무도회장의 모습이 될 테니까. 물론 그런 걸 가져와도 나는 여전히 여기 찌그러진 채 음료수나 홀짝이고 있겠지만.
“그런가요.”
말을 마친 여자가 희미하게 웃으며 내 옆의 벽에 기댄다.
“통제된 박자와 조절된 공기의 떨림일 뿐인데, 거기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는 꼴이라니.”
다소 건조하게 이죽거리는 목소리에 나는 시선을 돌려 다시 한번 가면을 쓴 여자를 살폈다.
“세자 저하도 나름대로 즐기고 계신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여자는 올빼미 가면을 쓰고 있는 세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눈이 좋으시군요.”
내 대답을 들은 여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그런가요? 마틴 레드우드, 소문에 따르면 당신도 사람 보는 눈이 만만하지 않다고 들었는데. 제가 누군지도 한번 맞춰보실래요?”
이 여자 누구야. 나는 눈살을 찌푸린 채 여자를 최대한 살펴봤다.
입고 있는 드레스는 무도회에 참석한 다른 여자들이 입은 드레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파이크 왕국에서 최근 유행하고 있는 양식인 모양이다.
빠르게 눈앞에 서 있는 여자를 훑어본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잘 모르겠습니다.”
내 말에 여자가 희미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가발을 쓰고, 코르셋으로 허리를 살짝 조이고, 가슴에 뽕을 넣었거든요. 아무래도 그것 때문인 모양이네요. 아쉬워라.”
지금 이 여자가 말한 세 가지는 이미 나도 살펴봐서 알고 있는 거다. 그리고,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람을 특정 짓는 방법은 단순히 외양만 있는 건 아니죠.”
내 말에 여자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동의해요.”
말버릇, 행동거지, 걸음걸이 같은 것들도 당사자를 특정하는 데 큰 영향을 준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여자는 내가 왕궁에서 만났던 어떤 사람들과도 그런 특징이 일치하지 않는다.
“정말 모르시겠나요? 섭섭해라. 뭐, 어쩔 수 없죠.”
말을 마친 여자가 저쪽에서 남자와 함께 춤을 추고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저 여자, 어때 보이시나요?”
나는 그 말에 여자를 보고 대답했다.
“망신당하겠네요.”
신고 있는 하이힐의 왼쪽 굽이 부러질 거다. 내 말에 여자가 작게 키들거린다.
“그러게요. 모처럼 입고 나온 소중한 드레스인데, 술이 쏟아져 버리다니.”
“확실히 저쪽에서 하녀가 다가오고 있긴 하네요. 하지만, 글쎄요…….”
가능성이 그렇게까지 높아 보이지는 않는데. 나는 슬쩍 옆에 선 채로 슬슬 잔을 흔들고 있는 여자를 바라봤다.
“어…… 아앗?!”
그런 외침과 함께 춤을 추던 여자가 비틀거리다가 쟁반 위에 와인잔을 챙겨 들고 걸어가던 하녀를 치고 엎어진다. 쟁반 위의 와인잔이 엎어지며, 액체가 여자의 드레스를 적신다.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잠깐 비틀거리더니, 하녀를 바라본다. 무도회장에 잠시 소란이 생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나와 내 옆에 서 있는 가면을 쓴 여자는 차분했다.
“신기하지 않아요?”
“어떤 점이?”
내 말에 여자가 대답했다.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잖아요. 어떻게 될지 뻔한데. 사람들은 마치 사고라도 일어난 것처럼 당황하죠.”
여자는 탄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럽다는 생각도 해요. 저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살면 하루하루가 얼마나 놀라울까요. 아, 저 남자는 어떤가요.”
다시금 여자가 누군가를 가리킨다. 나는 그 남자에 대해서 내가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을 말해본다. 내 대답을 들은 여자는 입가에 묘한 웃음을 띤 채 동의하고, 거기에 한술 더 떠 뭔가를 말한다.
그리고, 그 말은 언제나 틀림이 없다.
그렇게 1시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여자는 계속해서 내 옆에 선 채 이런저런 질문을 하고 나는 대답한다. 그렇게 불쾌한 시간은 아니었다. 어차피 시간을 때울 거리가 필요하던 참이었으니까.
“춤 한 곡 추는 건 어때요?”
“별로 춤을 선호하지는 않는데.”
내 말에 여자가 어머,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본다.
“우리는 벌써 1시간 17분 31초나 대화를 나누었어요. 서로 춤 한 곡 정도 신청해 볼 만한 관계는 되었다고 생각하는데요. 거절하실 건가요?”
나는 그 말에 잠깐 여자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고 손을 내밀었다.
“한 곡 추시지요.”
내 말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내 손을 잡았다. 중앙으로 향한 나는 여자와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바이올린의 음정이 살짝 불안해졌네요. 아무래도 손가락이 아픈 모양인데.”
“아마 이번 곡까지만 연주하고 뒤편에 대기한 사람과 교대 할 것 같군요.”
서로의 한 손을 맞잡고, 허리 위에 손을 올린 채 춤을 이어가던 와중 여자가 낮게 웃으며 한마디 한다.
“빙글 돌고 싶어요. 신호 주실래요?”
“하나, 둘.”
여자가 빙글, 돌고 나는 그 손을 다시 잡아주고 원래 자세로 돌아온다.
“나쁘지 않네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저 박자에 맞춰 몸을 흔드는 것뿐인데.”
내 말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하지만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꽤 있어요.”
“지금 저쪽에서 춤을 추고 있는 커플처럼?”
내 말에 여자가 다시 한번 키들거린다. 연주가 끝나고, 우리가 짐작했던 것처럼 바이올린 연주자 중 하나가 교대한다. 우리는 다시금 중앙의 무대에서 옆으로 비켰다.
“후우, 조금 있으면…….”
여자의 말을 내가 잘랐다.
“근처로 음료를 서빙하는 하녀가 다가오겠군요. 한 잔 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여자의 입에 걸린 미소가 더 진해진다.
“그래 주실래요?”
하녀가 지나가고, 나는 음료를 두 잔 챙겨 하나는 여자에게 건네주고, 다른 하나는 내가 가졌다. 음료를 마신 여자가 빈 잔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 이제 세자 저하께서 찾아오실 테니 저는 그만 물러날게요. 오늘 즐거웠어요.”
그래, 안 그래도 춤을 추고 있을 때 세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었겠지. 지금 저쪽에서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중이다.
“저도 즐거웠습니다, 아가씨. 가기 전에 누군지 말이라도 좀 해주시죠.”
내 말에 여자가 어깨를 살짝 으쓱하고는 연기하는 톤으로 대답을 돌려줬다.
“오, 마틴 레드우드. 적잖이 영리하신 분이니, 머지않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 이만. 우리 또 봐요.”
말을 마친 여자가 돌아가고, 세자가 내 쪽으로 찾아온다.
“내가 누군지는 알겠지.”
“세자 저하를 뵙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라 이 이상 예를 갖추기 힘든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내 말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턱짓을 했다.
“자네가 머무르는 곳에서 이야기하지. 먼저 가 있을 테니, 30분 뒤에 찾아오게.”
말을 마친 세자가 멀어진다. 나는 잠시 무도회장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세자가 말한 대로 내 방으로 향했다.
방 안에는 세자가 다리를 꼰 채 앉아있었다. 세자가 부른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클로에는 물론이고, 엘렌 리버플로우까지 한자리에 있다.
“……세자 저하를 뵙습니다.”
“그린모스 늪지대에 문제가 생겼다.”
나는 그 말에 움찔했다. 결국 거기에서 문제가 터지는구나. 엘렌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경고했는데, 기어이 현장 관리자가 땅을 판 모양이야.”
나는 그 말에 얼굴을 구겼다.
“어째서, 왕궁 마법사의 조언이었잖아.”
그게 무슨 엄마가 아침에 방 청소하라고 던지는 잔소리는 아니다. 흘려들을 수는 없었을 텐데.
“베로나 제국의 악티온 대도서관에서 유적의 조사를 위해 마법사들을 보낸 모양이다. 유적 발굴의 담당자는 엘렌의 조언을 듣고 가만히 있으면 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을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모양이야.”
그래서 엘렌의 경고를 무시하고 유적을 파고 들어간 모양이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 건데.”
유적을 판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행위로 인해 일어난 결과가 중요한 법이다.
“유적은 무덤이었고, 그 안에는 무수한 시체들이 들어있었어. 시체들은 현장 관리자가 자기들 집을 망치랑 곡괭이로 박살 내고 들어온 게 전혀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고. 벌떡벌떡 일어나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지.”
쉽게 말해서 새벽의 저주 정글판이다 그거군. 나는 하아, 하는 숨을 내쉰 다음 눈가를 꾹꾹 눌렀다.
“왕국에서는 어떤 조치를 취할 생각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내 말에 세자가 대답했다.
“인근의 기사단과 주둔 병력들이 해당 유적으로 행군 중이다. 만약을 대비해 왕도의 기사단 중 큰울림 기사단과 흔들바람 기사단이 대기 중이네.”
나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베로나 제국의 황녀는 지금 뭐 하고 있습니까?”
“오늘 중으로 제국으로 복귀한다는 공식 서한을 전달했어. 악티온 대도서관은 제국의 조직이니까.”
국가 간에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 발생했으니 돌아가는 길을 서두르는 모양이다. 레티시아 들롱 입장에서도 우리를 죄다 여기에 묶어놓고 저 아래 남쪽 땅에 분탕질을 했으니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그년이 여기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다. 나는 엘렌을 바라봤다.
“제국에도 피해가 발생할 것 같아?”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슬프게도 유적의 뚜껑을 연 건 우리야. 당연히, 영면에서 일어난 언데드들은 우리 유적 발굴단이 목적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