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90화 (90/275)

090화

나는 엘렌의 대답을 듣고 나서 손으로 얼굴을 벅벅 비빈 다음 세자를 바라봤다.

“칠색 내각에서 벌인 일이라면 그 유적 안의 무언가에 볼일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게 뭔지 몰라도 손에 넣으면 우리에게 좋을 일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뭘 찾고 있는 건지 알아내야 할 필요는 없다. 막기만 하면 된다. 내 말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보았어. 이 사태가 베로나 제국의 안티온 대도서관에서 벌인 일이라면 몰라도, 만약에 칠색 내각에서 수를 써서 일어난 일이라면 반드시 거기에 흔적이 있을 거야.”

“가서 찾아내면 되겠습니까.”

내 말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준비를 마치고 출발할 수 있도록 하게. 로델린 레드우드는 핀들턴 경의 저택에 머무르도록 하겠네. 그 정도면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지는 않겠지.”

“거기까지 신경 써 주시니 감사합니다.”

내 말에 세자가 굳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내 온정을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들에게만 베푼다. 그리고 자네는 그 기준을 충족했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 줬으면 한다.”

세자는 그 말을 끝으로 문을 나섰다. 그리고 엘렌이 짐을 싸면서 나에게 말했다.

“손등의 화상 자국, 아직 남아있지?”

“그래.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는 거야.”

내 말에 엘렌이 짐가방을 탁 하고 친 다음 나를 바라봤다.

“헤로스가 남긴 흔적이라면 큰 도움이 될 수 있어. 언데드니까.”

나는 그 말에 슬쩍 손등에 남아있는 흉터를 살폈다. 하긴, 악마와 언데드는 서로 빼놓으면 아쉬운 짝꿍이지. 라면과 찬밥 같은 관계라고 해야 하나.

“나약한 언데드들은 헤로스의 흔적 앞에서 맥을 못 출 테고, 어지간한 수준의 언데드라고 해도 힘이 크게 제한되겠지.”

“유적에서 튀어나온 언데드들은 어지간한 수준인가?”

내 말에 엘렌이 대답 대신 책을 한 권 나에게 넘겨줬다.

“지금까지 확인된 건 배회자와 부유령 정도야. 도움이 될 테니, 가는 길에 읽어둬.”

짐을 다 싸서 마차로 향하는데, 클로에가 짐가방 몇 개를 들고 뒤따라오면서 나에게 뭔가를 건네주었다.

“이건?”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마틴 님 앞에 온 편지에요. 이전에 마차에 놓여있었던 것과 비슷해요. 우편배달부가 주고 간 모양이더라고요.”

마차에 오른 나는 곧바로 그 편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보라색 잉크로 써진 글이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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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마틴 레드우드에게.

의존증에 걸린 황녀. 재미있는 조합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이 편지를 받을 때 즈음이면 그린모스 늪지대로 향하는 마차에 이미 탔으려나? 아니면, 짐을 싸고 있는 중이려나?

뭐,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해.

요 며칠간 꽤 재미있었어. 보통은 이렇게까지 준비해서 연기를 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는데, 이번에는 신경을 많이 썼지.

무도회에서 나누었던 대화는 즐거웠어. 조금은, 눈치채는 편이 짜릿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아쉬움이 남는 만남이었네.

그래도 꽤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 고마워.

그리움을 담아, 베로나 제국 황녀 올리비에가.

ps. 곧 알게 될 거라고 했잖아. 우리 또 보자. K63. 답장을 어디로 보내야 할지는 이제 알 거라고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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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한 마차 안에서 멍하니 그 편지 내용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이내 종이를 확 구겨버렸다.

“망할.”

다시 구겼던 편지를 펴서 내용을 읽고, 나는 다시 종이를 구겨 바닥에 던졌다. 베로나 제국의 황녀 올리비에가 자색이었다고?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클로에가 집어 올려 내용을 읽은 다음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이게 지금…… 저는 못 믿겠어요.”

“클로에, 우리가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한 게 아니야.”

올리비에는 스스로를 자색이라고 밝혔다.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얌전히 돌아갔으면 되는 건데, 뭐하러…….”

클로에의 말에 나는 창문을 열어젖히고 찬 바람을 쐬며 대답했다.

“그편이 재미있을 테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클로에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한 번도 수상하게 여길 틈을 주지 않았어.”

무도회에서는 내가 대화를 나눈 상대가 올리비에라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검투 경기가 있을 때는 바로 옆에서 대화를 나눴는데도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연회장에서 나와 정원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도 수상한 점을 눈치채지는 못했다.

아니, 더 나아가 나는 이틀 동안 올리비에 황녀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녔다.

관찰의 정확도는 시간과 비례한다. 오래 보면 더 많은 정보를 찾아내게 된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수많은 기회를 앞에 두고도 올리비에 황녀를 조금도 의심하지 못했다.

그야, 의심할 건덕지를 그 긴 시간 동안 한 번도 주지 않았으니까. 나는 클로에가 들고 있는 편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창밖으로 침을 뱉고 물을 들이켰다.

“확실히, 상대가 머리가 좋은 편이네.”

엘렌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좋은 편이라는 단어로는 한참 부족해.”

이런 식으로 사람 가지고 노는 녀석들을 경험한 적이 있다. 베로나 제국의 올리비에 황녀는 그냥 뭐, 어릴 때 미적분을 풀었어요! 내 새끼 대단해! 같은 식의 천재가 아니다.

아예,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정도의 천재들.

내 말에 클로에가 나를 바라봤다.

“자세히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내가 사람을 관찰해서 이것저것 맞추는 건 훈련의 영역이거든.”

꾸준히 시간을 들여 노력하면 굳이 머리가 엄청나게 좋지 않아도 충분히 나처럼 할 수 있다. 실제로, 내가 본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주면 어지간하면 알아듣고 그 과정을 이해한다.

세월과 경험, 훈련이 쌓여 만들어진 성과니까.

내가 보는 세상은 물음표로 가득하다. 내가 하는 일은 그 물음표를 보고, 풀어서 답을 찾아낸다.

근데, 가끔 세상에는 그냥 답안지를 가지고 태어나는 녀석들이 있다.

“모든 네 기지 다 내꺼다요.”

내 말에 클로에가 기괴한 얼굴을 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문장이 이상하지?”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이상한지 설명해봐.”

내 말에 클로에가 침묵했다.

“그냥…… 이상한 문장이에요. 말이 안 되잖아요.”

태어날 때부터 모국어를 쓰던 사람들은 저렇게 말한다. 그냥 딱 봐도 이상한데 그걸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나?

하지만, 외국의 언어를 학문으로서 공부한 사람들은 저 문장을 분석한 다음에야 이상한 문장이라는 걸 이해 할 수 있다.

“누가 계속 저런 이상한 문장을 네 앞에서 말하면 어떻게 할 것 같아?”

내 말에 클로에가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이상하게 말하지 말고, 제대로 말하라고 하겠죠.”

“상대가 이상한 걸 느끼지 못하고 계속 저런 식으로 말하면? 심지어, 뭐가 이상한지 제대로 설명해달라고 하면?”

“……짜증나겠죠.”

“올리비에가 그런 사람일 수도 있어. 그냥, 보면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

나처럼 옷에 얼룩이 있고 근육 발달이 어느 정도 되어있고, 손에 굳은살이 박인 부분을 보니 이 사람은 대장장이일 것이다. 같은 식으로 분석해서 결과를 도출하지 않고도 그냥 아는 사람들.

소위 말하는 천재.

천재들은 대장장이인 사람을 보면 대장장이라는 걸 안다. 어떻게 저 사람이 대장장이인지 알았어? 라고 누군가 물어보면 설명할 수도 없고, 오히려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을 한심하게 본다.

그냥 보면 알 수 있는 걸 왜 이 사람은 모르지, 병신인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엘렌과 클로에의 표정이 어둡다.

“왜 그런 표정이야?”

내 말에 엘렌이 대답했다.

“네 이야기대로, 올리비에 황녀…… 그러니까 칠색 내각의 자색이 그런 천재라면 우리가 상대하기 힘들다는 소리잖아.”

나는 그 말에 으음, 하는 소리를 냈다.

“꼭 그런 건 아니야. 올리비에 황녀가 몇 살이지?”

“올해로 24살이 되었을 거예요.”

24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올리비에는 24년 동안이나 그렇게 살았다는 뜻이야.”

지루할 만하지. 뭔 말을 해도 알아듣지를 못하니, 그냥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는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는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심심했겠지. 아니, 어쩌면 어느 시점부터는 다른 사람들이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았을걸.”

그 여자가 처한 상황을 비유해보자면, 마네킹으로 가득한 무인도에 혼자 떨어진 거다.

엄청나게 심심하니 주변에 쌓인 마네킹을 가지고 놀았겠지. 이렇게 움직여도 보고, 저렇게도 움직여도 보고, 그러다가 지루해지면 망가뜨리기도 하면서.

칠색 내각이라고 하는 조직은, 그 마네킹 놀이의 일환일 뿐이다.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알아. 공감 능력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주로 연쇄 살인을 저지르는 걸로 아는데.”

엘렌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올리비에는 공감 능력이 없는 게 아닐걸. 우리가 바닥에 떨어져 깨진 접시나, 불판 위에 올려진 그릴을 보고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잖아.”

내 말에 클로에가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가 접시나 불판으로 보인다는 거예요?”

그녀 입장에서는 크게 다를 것도 없었을 거다.

“그런 와중에 나를 만난 거지.”

마네킹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던 올리비에 입장에서는 같은 수준의 사람은 아니라도 개를 한 마리 발견한 느낌일 것이다. 마침내, 최소한 살아있는 것 같은 생물을 하나 찾아낸 거다.

“그 여자는 나를 가지고 놀고 싶은 거야.”

앉아! 라고 하면 앉나?

손 내밀어! 라고 하면 손을 내미나?

때리면 아파하면서 피하나?

그런 식으로 이것저것 시켜보고, 할 수 있나 확인하고. 못 하면 실망하지만 다시 다른 걸 시켜본다.

“살아나갈 수 있는 틈을 만들어 놓고 계속 문제를 던질 거야. 내가 문제를 푸는 데 성공하면 즐거워하겠지.”

“못 풀면?”

나는 엘렌의 질문에 웃었다. 그게 핵심이다. 24년 동안 무인도에서 마네킹 가지고 놀다가 처음으로 발견한 개를 죽도록 방치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은 개를 죽일 생각이 없다. 그 개가 없으면 그녀는 다시 지루해 터진, 24년이나 반복했던 마네킹과의 인형 놀이를 다시 해야 하니까.

하지만 개는 사람을 죽일 생각이다. 사람 입장에서는 지루해 터진 마네킹들일 뿐이지만, 개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다. 사회생활이 가능하고, 전혀 외롭지 않다.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차이점. 나는 올리비에를 죽일 수 있는 상황이 오면 죽인다. 올리비에는 나를 죽일 수 있는 상황이 와도 못 죽일 것이다.

사실, 이미 그녀가 나를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나는 꼼짝없이 죽어야 했을 거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이유는 저 차이 때문이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야.”

이미 지구에서는 올리비에와 비슷한 천재들을 몇 놈 제쳐봤으니까. 이번에도 반드시 성공한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승산은 있는 편이지.

“일단은 그린모스 늪지대에 집중하자.”

이미 제국으로 출발해버린 올리비에는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심지어 올리비에는 그냥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흔해 빠진 갑순이도 아니고 황녀씩이나 되는 사람이다.

상대를 하기 위해서는 긴 준비가 필요하고, 그 준비를 하기 위해서는 지금 그린모스 늪지대에서 일어난 새벽의 저주부터 해결하는 게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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