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화
왕도를 벗어난 우리는 지금 마차를 타고 그린모스 늪지대 인근까지 접근하는 중이다.
타고 있는 마차의 창으로 피난민의 행렬이 보인다. 내가 탄 마차는 그 피난민의 행렬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언데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해줘.”
책으로 알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데드를 단순히 창칼로 찌르는 건 큰 의미가 없어.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상징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해.”
상징. 언데드를 제압하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다.
“대표적으로는?”
내 말에 엘렌이 대답했다.
“소금이나 보리를 제외한 곡식의 가루. 순철이나 은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겠네.”
소금은 시체의 부패를 막는다. 그것 자체로도 언데드를 제압하는 상징성이 있다. 은이 언데드를 제압한다는 건 굳이 설명하기도 귀찮을 지경이다. 하지만…….
“곡식 가루?”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봄과 여름을 지나며 양기를 흡수하고, 가을이 되면 산 사람의 피와 살이 되는 양식이니까. 언데드를 물리칠 수 있어.”
“보리는 왜 예외인데?”
내 말에 엘렌이 간단한 대답을 돌려줬다.
“보리는 겨울을 지새운 다음, 봄에 수확하지. 자라는 과정에서 겨울의 음기를 빨아들였기 때문에 오히려 언데드의 기운을 강하게 해줘.”
상징을 활용해야 한다는 의미는 대충 알 것 같다.
“더 희귀한 물건으로 나간다면 벽조목이나 용안목 같은 것들이 있어. 그 정도의 물건이라면 강력한 언데드도 물리칠 수 있지만…….”
대량의 언데드 사태를 막기에는 물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벽조목은 벼락 맞은 대추나무고, 용안목은 벼락 맞은 감태나무인데, 그런 게 막 발에 채는 물건은 아니잖아.
다행히도, 내가 가지고 있는 칼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마법은 어때?
“물론 마법이 효과는 직빵이지. 하지만, 원령들은 마법사들의 마력 사용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아. 어중간한 실력으로 마법을 구사하면 오히려 연결점이 박힌 신경이 갈려 나갈 수도 있어.”
이야기를 듣고 있던 클로에가 다소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피난민들의 표정이 영 좋지 않네요.”
“집 버리고 가는 길이 가벼우면 또라이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아무래도 목적지에 도착하면 천상 언데드부터 밀어내야 할 것 같은데.”
현재 그린모스 늪지대 쪽에 형성된 방어선은 롱리버 요새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베로나 제국의 악티온 대도서관에서 마법사를 보내서 생긴 일이니까. 악티온 대도서관 소속의 마법사 중 하나가 칠색 내각에 속해있을 확률이 높아.”
“어쩌면 도서관장일 수도 있겠지.”
내 말에 엘렌과 클로에가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왕국의 기사단장이었던 엔더슨은 물론이고, 베로나 제국의 황녀와 시녀까지 칠색 내각에 소속되어 있는 판이다.
악티온 대도서관이라는 곳의 관장도 칠색 내각 소속이라는 추측은 전혀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다.
“거의 다 왔네.”
엘렌의 말에 나는 고개를 창밖으로 내밀었다. 저 멀리, 롱리버 요새가 보인다.
“망할 해골.”
창밖으로 내밀었던 머리를 집어넣은 나는 소파에 털썩 앉으면서 중얼거렸다.
“헤로스, 요새 위에 떠 있어?”
나는 엘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쿠르스트 산맥에서도 그렇고, 왜 저 해골은 아군 편에 떠 있는 걸 저렇게 좋아하는 걸까. 이대로라면 롱리버 요새는 무너질 것이다.
“아마 짐작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헤로스가 너에게 검을 건네준 건 네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야.”
“그렇겠지.”
악마잖아. 악마가 누가 마음에 든다고 선물을 주는 경우는 없다. 대부분 그 선물은 대상을 파멸로 이끄는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다. 나는 검을 뽑아 들고 슥 훑었다.
이 검의 내구도는 내 투지에 비례한다. 헤로스가 이 검을 나에게 주고 간 이유는 그 때문이다.
‘패배가 예견되는 상황에서도 인간은 투지를 불태울 수 있는가?’
헤로스가 나에게 남겨놓은 이 검이 상징하는 파멸은 저 질문과 일맥상통한다. 당연히, 사람이 그러기는 쉽지 않다.
게임만 봐도 알 수 있지. 게임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으면 '나 게임 안 함, 던질 거임. ㅅㄱ'라고 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데.
“공기가 왜 이래.”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얼굴을 구겼다.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확 하고 밀려온 바람은 시체가 썩는 역겨운 냄새를 품고 있다.
“냄새가 심하긴 하네요.”
“시체들이 일어나서 밀려오고 있는데 꽃향기가 날 리는 없잖아.”
문제는 시체 냄새가 아니라, 불쾌할 정도로 습하고 뜨겁다는 점이다.
이건 완전 정글이 따로 없군. 벌써 이마에서 땀이 삐질삐질 흘러나올 지경이다. 이 정도면 체감 온도는 45도는 넘을 것 같은데. 나는 물통의 표면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보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면 습도도 90%는 넘었다고 봐야 한다. 그냥 벗고 다니는 편이 훨씬 쾌적하겠는데.
“그대들은 멈추고 신원을 밝혀라! 지금 이 지역에는 대피령이 내려져 있으며, 이유 없는 출입은 용납하지 않는다!”
요새로 다가가자, 곧바로 성벽 위에서 우렁찬 외침이 들렸다. 나는 녀석을 향해 세자가 건네주었던 통행증을 던졌다.
“마틴 레드우드와 왕궁 마법사 엘렌 리버플로우, 그리고 클로에 로니세라 경입니다! 세자저하께서 내리신 통행증이 있습니다!”
남자는 내가 던진 통행증을 확인하고 나서 외쳤다.
“마음 같아서는 환영하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성문을 열어 줄 테니, 들어오도록!”
이내 육중한 성문이 열렸다.
“바닥에 곡물가루가 뿌려져 있네.”
성벽을 따라 곡물의 가루가 쭉 뿌려져 큰 원을 이루고 있다.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잖아. 언데드의 접근을 막는 방법 중 하나야. 식량은 아깝지만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한 임시방편이지. 밟지 않도록 조심해.”
엘렌의 말대로 우리는 곡물가루를 밟지 않도록 조심해서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투구를 뒤집어쓰고 있던 남자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덮개를 열었다. 땀범벅이 된 얼굴이 드러났다.
“현재 롱리버 요새 일대에 형성된 전선을 지휘하고 있는 에단 딘버스다.”
그의 소개를 받은 우리는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아직 여기까지 언데드가 밀려오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내 말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이 도왔지. 다소의 피해가 발생하기는 했지만, 어떻게든 일대의 백성들을 피난시키는 데에는 성공했다. 현재 인근 마을의 백성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파견했던 병력들이 복귀 중이다.”
전선은 여기에 형성될 모양이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렌이 성벽 위에 놓인 지도를 확인했다.
“단체 행동을 하는군요. 보통의 언데드라면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데.”
엘렌의 말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휘관, 상위개체가 있는 거야.”
“맞아요. 언데드를 잘 아시는 모양이네요.”
엘렌의 말에 에단이 얼굴의 땀을 훔치며 대답했다.
“이 지역에서만 10년을 넘게 근무했으니. 내가 알고 있는 지식들을 최대한 동원하는 중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내 말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의 무기를 짐승의 피로 적시도록 했다. 우선적으로는 닭 피를 쓰게 하고, 없다면 다른 짐승의 피를 쓰게 했지.”
짐승의 피는 주기적으로 다시 무기에 적셔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이나 순철을 대체하기 위한 훌륭한 방법이다.
거기에 더해, 형성된 전선에는 일차적으로 곡물가루를 뿌려 그어놓은 선이 있다. 나약한 언데드는 그것만으로도 접근하기 쉽지 않을 거다.
“저기 쌓여있는 가죽 부대는?”
내 말에 에단이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소금물을 담아놓았지. 언데드가 밀려오기 시작하면 투석기를 사용해 쏘아붙일 거다. 직격하면 큰 피해를 줄 것이고, 이후 만들어지는 소금물 웅덩이가 언데드의 접근을 늦출 거야.”
에단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활을 들고 있는 병사들의 화살통을 슬쩍 확인했다. 화살촉을 전부 순철로 바꿔 놓은 상황이다. 마찬가지로, 언데드에게 효과가 있다.
이 친구 준비 많이 했는데. 내가 약간 경탄의 표정을 띤 채 에단을 바라보자 그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연다.
“그뿐이 아니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인근에 있는 과수원에서 복숭아나무를 벌채하고 있는 중이다.”
복숭아나무는 언데드에 효과가 좋은 걸로 안다. 이야기를 마친 에단이 굳은 표정으로 주먹을 쥐고 말을 이었다.
“현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 많은 준비를 하고 있다. 증원군이 오기 전까지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야.”
에단은 성벽 근처에 놓여있는 수정구를 가리켰다.
“상황이 안 좋아진다고 해도, 이 녀석을 사용해 성벽의 방호 마법을 발동시키면 시간을 더 벌 수 있겠지.”
글쎄…… 나는 슬쩍 엘렌과 클로에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표정도 나와 비슷하게 어둡다.
이 정도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경험 많은 유능한 사령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헤로스의 대갈빡은 롱리버 요새 위에 떠 있다. 에단의 성실하고 섬세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왕국군이 패배한다는 뜻이다.
엘렌이 에단 옆에 놓여있는 지도를 확인하고 말했다.
“살아있는 인간을 증오할 뿐인 언데드는 이런 움직임을 보일 수 없어요.”
에단이 엘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휘를 전담하는 상위개체들이 있다는 뜻이겠지. 이 정도 규모라면 최악의 경우, 리치가 존재할 가능성까지 상정하고 있다. 그 경우에는 내 가문의 가보가 나서야겠지.”
에단이 벽에 기대놓은 창을 가리켰다. 벽조목으로 만든 창이다. 끝에는 미스릴을 합금한 창날이 달려있다.
“그렇군요. 지휘관께서 많은 준비를 했다는 걸 느낄 수 있어요.”
“세 명이 세자저하의 명에 따라 여기에 온 이유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롱리버 요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언데드의 공세를 맞이하게 된다. 세자저하께서 롱리버 요새의 교전을 무시하고 임무를 수행하라 지시를 내리셨나?”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마틴 레드우드, 그렇다면 우리에게 도움을 다오. 쿠르스트 산맥에서 자네가 이루어낸 성과가 이 전선에 필요할지도 모른다.”
“곧바로 정할 만한 문제는 아닙니다. 함께 온 사람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눠봐도 괜찮겠습니까?”
에단이 후우, 하고 숨을 내쉬고는 나를 바라봤다.
“알겠다. 심사숙고해서 결정하기를 바란다.”
말을 마친 에단이 우리가 머무를 곳을 안내해주었다.
“어떻게 생각해?”
내 질문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안티온 대도서관의 마법사들은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요?”
그래, 지금 내 마음에 걸리는 것도 바로 그 점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언데드를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치자. 그 사이 안티온 대도서관에서 온 마법사들은 뭘 할 생각인 걸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이 전선의 방어가 아니라, 그린모스 정글 안에 있을 안티온 대도서관의 마법사들을 찾아내는 거야.”
엘렌의 말이 정답이다. 그 녀석들이 노리고 있는 물건을 가질 수 없게 막아야 한다.
“너는 유적에 가본 적 있지?”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유적에 도착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아. 내가 안내할 수 있어.”
그렇다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이곳의 사정이 위태로운 건 알지만, 어쩔 수 없겠는데.”
정글로 가야 한다. 우리의 의견이 그렇게 모이기 시작할 때 즈음, 갑자기 성벽 너머에서 기괴한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 들어본 적 없는 음정이다. 대놓고 불협화음이 귀를 때리자, 척추를 긁어내리는 것 같은 불쾌함이 엄습한다.
벌컥, 문이 열리고 에단이 우리를 바라봤다.
“미안하지만, 성벽 위로 올라와 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