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화
우리는 그 말에 곧바로 성벽 위로 향했다.
“이런 씨…….”
말라붙은 시체들이 벌건 녹이 슨 무기를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지치지 않고, 배고프지 않고, 감정조차 사라진 죽지 않는 군대.
우리는 저 멀리에서 밀려오는 시체의 파도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세상에…….”
클로에가 그런 한탄과 함께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시체의 파도는 찢어지고 낡은 깃발을 앞에 세우고 대지를 뒤덮은 채 요새를 향해 다가오는 중이었다.
수천인가, 수만인가. 그린모스 정글에서 기어 나온 시체들은 그들이 유적 아래에 잠들어 있던 길고 지루했던 시간처럼, 느리지만 확실하게 밀려온다.
마침내 요새를 향해 다가오던 언데드의 군세가 멈췄다.
― 카루토스 타카운의 첫 번째 창, 용맹한 아르발리가 산 자들의 사령관에게 말하노라!
그 외침과 동시에 심장의 마력이 찡 하고 요동친다. 엘렌이 연결점이 박힌 자신의 손을 감싼 채 얼굴을 구기고, 클로에가 자신의 가슴으로 손을 가져간다.
공기의 떨림을 넘어, 나아가 영혼까지 떨리게 만드는 외침에 성벽을 지키던 병사들의 몸이 덜덜 떨린다. 병사들 중 그 심지가 굳지 못한 자들은 바지에 오줌을 지리거나, 심지어 입에 하얀 거품을 물고 졸도하기까지 했다.
“대왕 카루토스 타카운.”
엘렌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아는 모양인데.
“친한 사람이야?”
내 질문에 엘렌이 대답했다.
“3600년 전 사람이야. 친하기는 개뿔.”
3600년? 엘렌의 입에서 튀어나온 세월은 길다는 말로는 표현이 조금 부족할 정도다. 신라가 세 번 망한 걸로도 부족해서 덤으로 고려까지 한 번 망해야 그나마 비빌 수 있는 세월이잖아.
“사람이라기보다는 시신이라고 해야겠지.”
저 멀리에, 빛이 바랜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거대한 시체 도마뱀이 보인다. 크기만 봐서는 아파트 한 채가 걸어 다니는 수준이다. 그냥 도마뱀을 닮은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도마뱀은 거대한 제단을 하나 짊어지고 있었다. 방금 외침은 아마, 저 도마뱀 위에서 울려 퍼졌을 거다.
도마뱀 위에는 금박을 입힌 데드 마스크를 뒤집어쓴 시체가 보석과 금으로 장식된 갑옷을 몸에 두른 채 제단 위의 권좌에 앉아있다. 시체의 양팔에는 오랜 세월의 풍파 끝에 모양이 뒤틀린 차크람이 주렁주렁 걸려있다.
― 내 앞에 굴복하고, 유한한 육신의 굴레를 벗어라! 카루토스 타카운 전하의 말씀이다! 영면을 깨운 죄는, 그대들 모두가 영원한 헌신을 통해 속죄할지니!
그 목소리에 다시 한번 몸 안의 마력이 요동치지만, 이번에는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충격이 크지 않았다. 클로에와 엘렌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3600년이라. 그때도 베로나 제국이 존재했었나?”
내 질문에 엘렌이 고개를 저었다.
“베로나 제국이 처음 건국된 게 1300년 전이야. 파이크 왕국과 테네스 공국은 약 500년 전에 베로나 제국으로부터 독립했고.”
그럼 베로나 제국의 건국왕보다 2300년이나 더 전 사람이라는 거잖아.
“카루토스 타카운은 정복 전쟁을 통해 당시 존재하던 나라 중 가장 큰 영토를 소유했던 왕이야.”
대충 상황을 이해한 것 같다. 이런 비유가 적절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알렉산더 대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데, 갑자기 알렉산더 대왕의 시체가 벌떡 일어나더니 언데드 군단을 이끌고 '마케도니아를 다시 위대하게!' 같은 슬로건을 내건 채 현대 국가를 쓸어버리려 드는 상황이잖아.
“안티온 대도서관에서 마법사들을 보낸 이유가 있었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 도서관은 카루토스 타카운의 유언에 따라 만들어졌거든. 무덤에 대한 자료도 남아있었겠지. 장서만 50만 권이 넘어가다 보니 찾는데 시간이 엄청나게 걸렸겠지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건물의 이름은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이었다. 참나, 그냥 단순한 비유였는데 진짜로 알렉산더가 따로 없었군.
“이거 참.”
그린모스 늪지대에서 시체들이 기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분명히 규격 외의 사태다.
“저건 또 뭐야.”
도마뱀의 입에서 화염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또 불이야? 헤로스부터 시작해서 엔더슨을 넘어 저 녀석까지. 왜 내 앞길을 막는 녀석들은 죄다 저렇게 불을 좋아하는 거야. 내 가문 이름이 레드우드라서 그런 건가, 나무에 불 지르고 싶어서?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말도 안 되는 크기의 거대한 화염이 성벽을 향해 밀려들어 온다.
“환장하겠네.”
엘렌이 성벽에 손을 짚었다. 대지를 휩쓸며 내달리던 화염이 갑자기 정면에 생긴 진청색의 육각형에 막혀 돌진을 멈춘다. 바람을 타고, 지독한 유황 냄새가 퍼진다.
“마법사들 뭐 하고 있어! 안 막을 거야?!”
그제야 쏟아지는 화염을 보고 퍼뜩 정신을 차린 마법사들이 연결점에서 빛을 뿌리며 허공에 장벽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마침내 쏟아지던 화염이 완전히 잦아들었다.
곧바로 거대 도마뱀 시체가 입 밖으로 뭔가를 토해냈다. 검은 연기와 함께 아지랑이를 마구 피워올리는 심장이다.
“열을 식히는 건가?”
화염을 막아낸 엘렌이 잠깐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시선을 돌려 다른 마법사들을 노려봤다.
“화염이 밀려오는데 구경만 하고 있는 게 당신들 임무는 아니잖아.”
마법사들이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인다. 엘렌은 입가에 흘러내린 침을 소매로 훔친 다음 나를 바라봤다.
“상황이 안 좋아. 곡물가루나 소금 같은 임시방편으로는 어림도 없어. 요새 일대를 성역화할 거야.”
“요새의 상황은 비극적이지만,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한 건 너잖아.”
근데 이제 와서 생각을 바꾼 거야? 내 말에 엘렌이 턱짓으로 몰려오는 언데드를 가리켰다.
“함께 밀고 올라가지 않으면 그린모스 늪지대까지는 접근도 못 할걸.”
동감이긴 하다. 엘렌의 말을 들은 마법사 중 하나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리버플로우 양, 성역화는 고난도의 마법입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함부로 시도했다가는 연결점이…….”
엘렌이 바닥에 침을 탁 뱉은 다음 입을 열었다.
“마력 통제는 내가 할 거야. 연결점이 박살 나도 내가 박살 나니 네 몸 걱정은 좀 그만해.”
“그렇다고 해도 성역화를 발동하기 위해 필요한 마력은…… 이 자리에 있는 마법사들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엘렌이 그 말에 대답했다.
“부족한 마력은 저 수정구를 박살 내서 벌충할 거야.”
“하지만, 그 정도 마력을 통제하는 건…….”
엘렌이 그 말에 한탄을 섞은 대답을 돌려줬다.
“나도 마법사지만, 가끔은 너희들이 정말 싫어. 뭘 해보기도 전에 말이 너무 많단 말이지. 이건 이래서 안 될 것 같아요. 저건 저래서 힘들 것 같아요. 이리 뺑글 저리 뺑글.”
엘렌의 말에 마법사가 약간 상처받은 표정을 짓고 있다가 어렵사리 대답했다.
“위험성이 너무 큽니다. 당신은 왕국에서도 촉망받는 마법사입니다. 이번 사태를 진정시키는 과정에서 당신의 몸에 이상이 생기면…… 왕국은 큰 손실을 입는 겁니다.”
엘렌이 그 말에 팍 인상을 구겼다.
“이 망할 새끼들아. 이럴 때 몸 사리면서 안 쓰고 아껴 둘 거라면 마법은 뭐하러 배운 거야. 홍차 끓이려고 배웠어? 왕국에서 그러라고 세금으로 니들 연구비 지원해 준 줄 알아?”
말을 마친 엘렌이 모여 있는 마법사들을 노려봤다.
“제발…… 눈깔이 있으면 주변을 봐, 이 망할 책벌레들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여기에 모여 있는지, 얼마나 많은 피난민들이 이 전선 뒤로 후퇴하고 있을지!”
말을 마친 엘렌이 수정구 쪽으로 걸어갔다. 엘렌의 눈이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기에서 못 막으면 전부 죽을 수도 있어. 나는 이런 상황에서 사용하기 위해 연구비 지원받아가면서 마법을 배운 거야. 당신들까지 목숨을 걸어가면 도우라고는 안 할게. 그냥, 돕기만 해.”
말을 마친 엘렌이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에단을 바라봤다.
“유적 발굴을 담당했던 현장 지휘관은 어디에 있죠?”
엘렌의 말에 에단이 멍하니 있다가 대답했다.
“현재 요새에 구속 중입니다.”
엘렌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바라봤다.
“만약 나한테 문제가 생기면 길 안내는 그 녀석에게 받으면 될 거야.”
“그래야겠네.”
내 말에 엘렌이 쯔,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런 슬픈 말 하지 말라는 식의 대사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그런다고 살 사람이 죽지는 않아. 마찬가지로 죽을 사람이 사는 것도 아니지. 죽고 싶지 않으면 열심히 해라.”
말을 마친 나는 검을 뽑아 든 채 옆에 있는 클로에에게 말을 걸었다.
“버티기라. 하이랜더랑 비교하면 어떨지 모르겠네.”
“정반대의 상황이잖아요? 쿠르스트 산맥은 춥고 건조했는데, 여기는 덥고 습하지요. 하이랜더는 양보다는 질이었지만, 이 녀석들은 질보다는 양인 것 같고.”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딱 봐도 강해 보이는 녀석들이 좀 보여. 우리가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건 그런 녀석들이다.”
그냥 으어어어 하면서 녹슨 무기 꼬나쥐고 기어오는 시체 따위는 병사들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거다. 문제는 그 사이사이 보이는 특출나 보이는 녀석들이다.
“충전 좀 해주세요.”
클로에가 그런 대사를 던지고 내 쪽으로 레이피어를 내밀었다. 나는 곧바로 검으로 클로에의 레이피어를 사정없이 내려찍기 시작했다. 레이피어에 가해지는 충격을 그대로 클로에가 자신의 능력을 통해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어때.”
“이 정도면 일단 충분하겠네요.”
뒤편에서 쩌적, 하고 수정구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성역화를 발동하면, 안정시키지 못하도록 몰려들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엘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요새는 물론이고, 이 일대의 하늘 위에 오로라가 하늘거리기 시작한다.
“효과 직빵이군.”
밀려오던 언데드의 파도가 갑자기 특정 지점을 경계로 멈춰선 채 허공을 두들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체들이 허공을 때릴 때마다 녀석들의 몸에 백열의 화염이 엉겨 붙는다. 화염이 엉겨 붙은 시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연기를 피워올리며 재가 되어 무너져 내린다.
― 저항이라, 너희들은 가장 나쁜 선택을 했다.
저 멀리에서 잘나신 시체 대왕을 섬기는 장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도마뱀이 입 밖으로 내놓았던 반쯤 썩은 심장을 다시 입 안으로 밀어 넣는다.
잠시 뒤, 요새를 향해 다시 한번 그 무시무시한 유황불의 세례가 쏟아진다. 하지만, 언데드들이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있는 지점에서 쏟아지던 화염이 딱 멈추고, 허공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저거 봐요.”
클로에의 말에 그녀가 가리킨 허공을 보자, 드리워진 오로라의 아래쪽이 검은색으로 그을리더니, 이내 부스러지기 시작한다.
“크으으…….”
이어서 들리는 엘렌의 신음. 뿌득, 하는 이 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하늘에 드리워진 오로라의 부스러진 부분이 다시 자라나기 시작한다.
“투석기, 발사!”
에단이 요새에서 자신이 준비했던 모든 것들을 쏟아 넣기 시작했다.
성역화의 경계선에 막힌 언데드의 머리 위로 소금물이 떨어진다. 순철 화살촉을 박아넣은 화살이 바닥을 기어오는 시체들과 하늘을 부유하는 유령들을 향해 쏟아진다.
“그래도 넘어오는 녀석들이 있군.”
강해 보이는 개체들이 경계선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곧바로 녀석들의 몸 주변을 하얀 화염이 휘감지만, 녀석들은 칠판에 녹슨 쇠못을 비비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엉겨 붙은 화염을 견디고, 한 발 한 발 전진한다.
“약해진 건 확실해요.”
경계선을 뚫고 들어온 녀석들도 곧이어 쏟아지는 화살과 소금물 세례에 얼마 지나지 않아 형체가 무너져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