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화
지금까지의 상황은 내 눈으로 보기에도 썩 괜찮아 보였다. 여전히 헤로스의 머리통은 요새 위에 떠 있었지만, 저 머리통이 실수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대로라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지금 상황을 바라보던 클로에가 말을 하기 무섭게 다시 한번 쏟아진 도마뱀의 유황불이 엘렌이 유지하고 있던 성역화의 경계선을 후려쳤다.
하늘에 드리워진 오로라가 다시 한번 검게 그을려 부스러져 내린다. 그리고, 경계선까지 돌진한 도마뱀이 그대로 몸을 들이받는다.
허공에 쿵,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도마뱀의 몸에 화염이 엉겨 붙는다. 도마뱀은 경계선을 뚫고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러는 대신 계속해서 허공을 향해 손을 휘두르고 있었다.
도마뱀만 그러고 있는 게 아니다. 성역을 충분히 뚫고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살벌하게 생긴 언데드들이 성역을 뚫고 들어가는 대신 허공을 향해 연신 공격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하늘에 드리워진 오로라는 찢어지거나 검게 그을리면서 그 형체가 망가지고 회복되기를 반복한다.
“저걸 처리하지 않으면 힘듭니다.”
나는 시선을 돌려 에단을 바라봤다.
“병력을 성 밖으로 빼서 도마뱀을 비롯한 언데드를 공격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에단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수밖에 없어. 엘렌 리버플로우 양은 우리를 위해 큰 각오를 했네.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말을 마친 에단이 큰소리로 외쳤다.
“전 병력은 성문 앞에 집결해라! 북을 울려 요새 주변에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병력들에게도 돌격 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내려라!”
에단은 침을 삼키고 가문의 보물이라고 하는 창을 양손으로 꽉 쥐고 도마뱀을 노려봤다. 그 괴물이 심장을 내놓은 채 열을 식히는 모습을 바라보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다음 화염 공격이 끝나고 나면 바로 성문을 열고 돌격하겠네.”
말을 마친 에단이 시선을 돌려 불안한 표정으로 집결하는 병력들을 바라보다가 뭔가를 거머쥐고 외쳤다. 마법 같은 건가, 에단의 외침은 성벽을 넘어 요새 일대에 울려 퍼졌다.
“우리는 평범하다! 몰려오는 시체가 두렵고, 풍기는 냄새는 역겨워서 토악질이 나온다! 바라보고 있으면 오금이 저리고 손이 떨린다!”
병사들이 그 말에 에단을 바라봤다.
“시체들이 일어나, 우리의 피와 살을 탐내고 있다. 무기를 들고 있지만 머리 한편에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품은 채 여기에 서 있다! 오감을 통해 전달된 공포는 척추를 긁어 올려 머리를 때린다. 몸은 굳고 머리는 생각을 멈추게 한다!”
말을 마친 에단이 창의 뒤끝으로 땅을 한 번 강하게 찍는다.
“하지만, 두려움은 평등하다! 언데드의 접근을 막고 있는 마법사들도 우리와 같은 공포를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저 힘을 유지하고 안정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에단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모인 병사들을 향해 다소 갈라지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외친다.
“말해보라! 그대들은 이 싸움을 피해 어디로 가려 하는가! 우리는 도망칠 곳이 없다!”
에단의 말에 병사들이 침을 삼키고 무기를 거머쥔다. 에단이 창으로 성 밖에 포진한 언데드의 파도를 가리켰다.
“공포의 머리를 붙잡고, 눈을 마주치는 거다. 그리고 보여주자. 우리의 공포가 그들인 것처럼, 우리 또한 그들의 공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도마뱀이 뿜어낸 화염이 다시 한번 허공에 때려 박히며 하늘에 드리워진 오로라를 불태운다.
“성문을 열어라! 우리는 여기로부터 진격할 것이니!”
잠깐 사이에 갈라지고 쉬어빠진 목소리와 함께 성문이 열렸다. 나는 성문 밖으로 튀어 나가며 중얼거렸다.
“질 것을 알면서도 투지를 불태울 수 있는가?”
헤로스가 나에게 이 검을 두고 돌아가며 남겨놓은 질문이었다.
나는 작게 중얼거리고 나서 하늘을 바라봤다. 방금까지만 해도 롱리버 요새 위에 더 있던 헤로스의 머리가, 이제는 몰려오는 시체의 파도 위에 떠 있었다. 살짝 바꿔서, 이런 질문은 어떨까.
“투지를 불태우면 질 싸움도 이길 수 있는가?”
언제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긍정적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투지를 불태워도 지는 싸움도 있다. 압도적인 차이로 패배하는 싸움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종이 한 장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승패가 갈리는 싸움이라면 헤로스의 머리통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일반인이 프로축구선수들과 축구를 하면 역전승은 불가능하지만, 프로들끼리 뛰는 프로리그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잖아. 땅 위를 달리던 나는 급정거를 한 채 눈앞에 서 있는 언데드를 올려다봤다.
“좋아, 덩치. 크기는 하이랜더 뺨치는군.”
시체들이 서로 엉겨 붙어 만들어진 기괴하고 거대한 덩어리가 나를 노리고 구역질과 함께 액체를 쏟아낸다. 자리를 피하자 액체가 닿은 곳의 땅이 부글거리며 고약한 냄새와 함께 연기를 피워올린다.
분신이 녀석의 몸에 검을 박아넣고, 그대로 위로 베어 올린다. 반으로 쪼개진 녀석이 비틀거리다가 그대로 철벅은 소리와 함께 쓰러진다.
“그런 거치고는 보기보다 쉽잖아.”
덩치만 크지 완전 공갈빵이군. 하긴, 다 썩은 시체의 내구도가 튼튼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하이랜더가 니들 보면 비웃을 거다. 다만, 숫자가 좀 많긴 하네. 이런 덩어리가 지금 당장만 해도 수백 마리는 보이니까.
― 네놈…… 그 흉터는!
부서진 갑주를 입고, 썩어가는 말의 시체를 타고 달리던 언데드가 나를 보고 움찔한다. 녀석의 머리통은 내 손등으로 향해 있다.
그러고 보니, 손등의 화상 자국에서 음습한 붉은 색이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다. 녀석이 당황하는 사이 달려들어 말 위에 올라탄 나는 녀석의 가슴팍에 검을 박아넣었다.
“좋아, 엘렌. 네 짐작대로네.”
헤로스가 남기고 간 흉터는 그것 자체로도 주변에 있는 언데드를 움츠러들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지성이 없는 언데드는 얼굴을 가리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난다. 심지어 강력한 언데드들 조차 내 손등에 박힌 흉터를 의식하느라 제대로 싸우지 못한다.
이미 죽은 시체들이 두려움을 느낄 수 있는지의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싸움에 큰 도움이 된다는 건 확실하다.
― 크아아아아아!
그건 저 미친 듯이 거대한 도마뱀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그 반응이 다른 언데드들과는 사뭇 다르다. 그 위에서 거대한 호령이 울려 퍼진다.
― 전신 헤로스 님의 인정을 받은 전사라!
전신? 엘렌에게 들은 이야기와는 다른데. 뭐, 대충 4000년 전의 사람이라고 했지? 당시에는 신으로 모시던 녀석이 나중에야 악마로 밝혀진 걸 수도 있다.
고름이 엉겨 붙은 썩은 살점을 뚝뚝 흘리는 도마뱀이 방금까지 후려치던 허공을 외면하고 나를 노려보며 괴성을 지른다.
“왜 그래, 어릴 적에 헤로스한테 두들겨 맞은 기억이라도 있냐?”
건물만 한 크기의 앞발이 땅을 갈아엎으며 나를 향해 밀려온다.
“하나, 둘.”
바람과 함께 밀려오는 팔을 확인한 나는 그대로 근처에 있는 시체의 머리통을 밟고 뛰어오른 다음, 손을 하늘로 뻗었다. 분신이 나타나 내 손을 잡고 다시 확 집어 던진다.
훌쩍 뛰어오른 내 아래로 도마뱀의 팔이 지나가고, 자연스럽게 머리와 눈이 마주친다.
“파충류 새끼.”
빠각, 하는 소리와 함께 썩어 빠진 살점을 뚫고 들어간 다음 뼈에 막힌다. 곧바로 도마뱀 위에 올려진 단상에 서 있던 카루토스 타카운의 부하가 나를 노리고 거대한 작살을 던진다.
“커허.”
투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온 작살을 검을 들어 막자. 충격에 내 몸이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작살이 무슨 대포도 아니고! 투창기를 써도 저렇게 살벌한 속도로 날려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빡, 하는 소리와 함께 땅으로 곤두박질친 내 몸이 바닥을 구른다. 다시 정신을 차리자 하늘이 어둡다. 내 머리 위에 도마뱀의 발바닥이 보인다.
“으아아아.”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뒤흔들렸다. 바로 앞에 자리 잡은 앞발을 향해 마구 칼을 휘두르자, 고름과 체액에 적셔진 살점이 뜯어져 나가고 변색된 뼈가 드러난다.
― 으헤, 아하하학! 크헤헤헤헤헤헥!
“바쁜데 쪼개지 마라.”
내 쪽으로 날아오는 서너 개의 흐릿한 형체들 앞에 차례차례 분신이 나타나 검을 휘두르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검을 얻어맞은 형체들의 색이 진해졌다가, 이내 한 줄기 연기가 되어 흩어진다.
그 틈을 노리고 주춤거리던 언데드 중 하나가 내 머리를 노리고 녹슨 도끼를 내려찍는다.
“어딜!”
근처에 있던 클로에가 충격파와 함께 쏘아져 나가, 나를 향해 휘둘러진 도끼를 막아내고 머리통을 레이피어로 꿰뚫었다. 머리를 관통한 레이피어의 검신을 타고 새빨간 닭 피가 흘러내린다.
해골의 몸이 부스러지는 사이, 시커먼 칼날이 나와 클로에를 향해 쏟아졌다. 딱 봐도 저거 맞으면 좋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 같군.
“왼쪽으로 피해.”
내 말을 들은 클로에가 먼저 왼쪽으로 피하고, 나는 오른쪽으로 피했다. 우리가 서 있던 자리로 쏟아진 검은 칼날이 대지를 갈아엎고 허상처럼 사라졌다.
“비겁하게 마법을 쓰고 있네.”
경계선을 두들기던 원령과 시체들이 행동을 멈추고 자신을 공격하는 병사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 집중해라!
거대 도마뱀 위에서 쇠를 긁어내는 것 같은 외침이 울려 퍼지고, 시체와 원령들이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다시금 성역의 경계선을 향해 손과 무기를 휘두른다.
그 사이, 병사들의 칼날이 고름이 가득 차 있는 썩은 시체의 살점을 발라내고 창과 화살이 뼈 사이를 쑤신다.
“이래서는 소용이 없겠는데.”
언데드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녀석들이 우리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성역을 공격하는 건 원했던 상황이 아니다. 내 중얼거림을 들은 클로에가 대답했다.
“이러면 머리를 쳐야 해요.”
그래, 도마뱀 위에 올려진 단상에서 호령하는 저 녀석을 잡아 족쳐야 한다. 그러면 녀석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의 공격을 무시하던 언데드들은 경계선을 공격하는 대신 병사들을 노리겠지.
그 방법 말고는 없다.
“일 참.”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클로에에게 턱짓을 했다.
“손 좀 빌리자.”
“하나, 둘.”
클로에는 양손을 서로 포개 배구선수와 같은 자세를 취하고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셋!”
클로에를 향해 튀어 나간 나는 포개진 그녀의 양손을 콱 밟으며 그대로 도움닫기를 했다. 발에서 투쾅, 하는 소리가 들리며 내 몸이 하늘로 튀어 나간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떠오른 나를 마주한 건 반쯤 썩은 활에 시위를 먹인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언데드의 대장이었다.
― 어서 오너라.
“그래, 이리 오너라. 시체 새끼야.”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가 나를 노리며 놓였다. 썩은 활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흉악한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화살을 분신이 쳐내고 사라진다. 나는 무사히 도마뱀의 등 위에 안착했다.
“이야, 넓네. 이런 건 얼마나 하나?”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단상 위에 서 있는 녀석을 향해 검을 겨눈 채 허상을 만들고, 천천히 왼쪽으로 걸었다. 녀석의 눈이 나와 허상을 번갈아 바라본다.
― 잔재주를 부리는 거냐. 전사가 야바위를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은 모양이지.
“그래, 뒤진 다음에 지옥 떨어져서 칭얼거려. 상대가 비겁하게 싸워서 졌다고.”
녀석이 말하는 동안 나는 허상과 함께 도마뱀의 등 위를 달려 녀석의 코앞에 도달했다. 허상은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려찍고, 나는 피고름 섞인 녹물이 뚝뚝 떨어지는 갑옷의 가슴팍을 노리고 검을 내질렀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녀석의 팔에 걸려있던 차크람 중 하나가 날아가 허상을 지운다. 동시에, 시체가 허리춤에서 짐승의 어금니와 비슷하게 생긴 단검을 꺼내 들어 내 공격을 막았다.